눈 달리기

by 김박은경


영하 9도, 베란다의 트레드밀에 오른다. 점퍼 지퍼를 바싹 올리고 걷기 시작한다. 베란다 창 너머 맑은 빛이 환하다. 해는 등 뒤에서 앞으로 둥글게 높아지고 있다. 앞 동 옥상 안테나에 앉은 까치는 해의 방향을 향한 채 울지도 않고 미동도 않는다. 그 발끝에 걸린 똑같은 창문들 너머 주방 창에 얹어 둔 작은 화분, 언뜻언뜻 움직이는 사람들, 뭔지 모를 작은 사물들. 보일러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는 뭉툭한 꼬리를 흔들다가 어지러운 세필로 흩어진다. 옥상에는 대관식 왕관처럼 생긴 둥근 환풍구들이 저마다 왼쪽으로 돌고 있다. 도로변 상가의 옥상은 연녹색, 아니 오늘은 눈의 빛이다. 그 위로 선명한 발자국들이 이어진다. 눈사람도 눈 오리도 만들지 않고 눈 내리는 밤을 가만가만 걸었을 사람을 그려본다. 내리는 눈 밤 지나 쌓인 눈 아침 위로 아파트 그림자가 기우뚱, 교회 첨탑 그림자가 기우뚱 서로 닮은 사선을 긋고 있다. 휴일의 자동차들은 느리게 달리고 경적 소리는 가끔 멀리서 들린다. 길 건너 아파트 놀이터도 텅 비었다. 아직 추워, 더 있다가 나가 놀자, 달래는 엄마들이 있겠지. 빨리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고 조르는 아이들이 있겠지. 장갑을 끼고 모자를 쓰고 장화를 신기 시작하려나. 미끄럼틀은 둥글 빼족한 푸른 지붕을 이고 초록을 지나 노랑을 지나 빨강을 지나 다시 노랑을 지나 파랑을 지나는 긴 터널을 물고 있다. 16분 20초 걸으니 슬슬 더워진다. 점퍼를 벗는다. 까치가 날아갔던 자리에 다시 까치가 앉아있다. 그 까치가 그 까치인지 모르겠다. 새들은 비슷하게 보인다. 가까이에서 깃털 색을 관찰하기 전까지는 구분이 쉽지 않다. 그들은 서로를 구분할 수 있을까. 새는 통통 튀어 안테나 끄트머리 쪽으로 간다. 어딜 가려는 거니. 어디든 가려는 거지. 늙어서 날 수 없게 된 새들은 어디로 가나. 코끼리들이 마지막을 위해 숨어 들어가듯 새들도 예감 속의 날갯짓을 하는 건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그 많은 새들의 죽음이 이토록 감쪽같을 수가 있나. 최선을 다해서 날다가 휘청휘청 고도를 넘나들다가 단 하나의 장소를 찾아가 툭 떨어지는 건 아닐까. 이곳이면 되겠다, 이제 되었다, 하면서 가만히 내려앉아 마지막 들숨을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의식이 명멸하는 순간까지는 훼손되지 않는 죽음을, 방해받지 않는 죽음을 원하고 향하는 것은 아닐까. 까치는 꼬리를 들어 올리고 내리기를 반복한다. 뛰어내릴까 고민하는 수영선수처럼, 그러다가 떨어지듯 곡선을 짧게 그으며 허공을 건너간다. 낮게 혹은 높게 날다가 어딘가 내려앉는 새들의 순간의 망설임을 본다. 앉아도 될까, 묻는 사람처럼 조심히 작은 발을 펴고 앉자마자 재빨리 바투 쥐겠지. 도전하는 평행봉 선수의 손처럼 발톱이 불안의 귀퉁이를 움켜쥐고 있다. 어떤 날에는 눈앞 베란다 난간에 앉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숨을 죽인다. 사진을 찍고 싶지만 기척에 놀랄까 날아갈까 꼼짝도 않고 지켜본다. 그래도 금방 날아가 버리지만. 검고 푸른 깃털들, 빛나는 부리와 뾰족한 발톱을 마주할 때면 구체적인 비밀을 만나는 기분이다. 언젠가 앞 동 옥상에 15분도 넘게 앉아 있는 새도 있었다. 시간을 재가며 바라보았는데 역광 속이라 어떤 새인지는 알 수 없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왜 가만히 있는 거니 중얼거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게 된 사람처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베란다 위성 안테나에 앉는 건 주로 직박구리다. 뭔가 먹기도 하고 좌우를 살피기도 하고 똥을 싸기도 하는데 뭐라도 바른 듯 촉촉하고 다부지게 세워진 머리깃털을 보면 안다. 사납고 급하게 우는 소릴 들어보면 안다. 새를 키울까. 손에도 앉고 머리 위에도 앉고 소파에도 앉고 이리저리 어지러이 장난치는 새를 키울까. 아니다. 거북이로 충분하다. 목숨을 책임지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새를 키운다던 그는 말했다. 누가 베란다 창문을 열어두었는지 슬그머니 날아가는데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더라. 예전에 창문을 열어두었을 때는 괜찮았거든. 새는 당신이 완전히 믿는 순간을 기다렸을 거야. 반드시 도망치려고 당신 어깨에 깃털을 비비면서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것처럼 다정하게 굴었을 거야.


새를 키우고 싶지만 키우지 않는다. 거북이를 키우고 있지만 키우고 싶지 않다. 반려도 애완도 생명 가진 것들에게는 못할 짓 같다. 더 멀리 갈 수 있고 더 크게 자랄 수 있는데 원하는 만큼 살고 원하는 때에 사라질 수 있는데 억지로 잡아두는 건 죄짓는 일 같다. 숲의 것은 숲에, 하늘의 것은 하늘에, 강의 것은 강에 이런 결론을 내렸으면서 여름에는 바질 씨앗을 사고 말았다. 그것은 작은 마침표 아니 검은깨처럼 생겼다. 왕성한 생명력에 대해 들었던 터라 작은 화분에 열 개만 뿌렸는데 여섯 개가 떡잎을 올렸다. 어찌나 예쁘고 신기하고 기특하던지 보고 또 보고 있었다. 물을 줄 때 자꾸 떠다니던 떡잎은 시들어버렸고 남은 다섯 개가 자라고 있다. 줄기도 단단해졌다. 넘치는 이파리들을 따서 스파게티에 얹기도 하고, 바질 티를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별로였다. 실은 가위를 들고 이파리를 딸 때마다 마음 한쪽이 불편해져서 식용은 포기했다. 그렇게나 바질을 사랑하는 거야, 그렇게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거야, 비건도 아니면서 유난스럽다. 아무려나 물을 주고 가지며 이파리를 약간씩 쳐주고 햇빛과 바람을 챙겨준다. 언제고 꽃을 피우겠지. 꽃이 피면 잎은 질겨진다는데 튼튼해진다는 뜻일까. 작고 흰 꽃이라는데 어떤 향기가 날까. 잎사귀의 향기와 꽃의 향기가 같을까. 커다란 바질나무가 될 수도 있을까.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오늘의 바질은 마루 끝에서 햇빛을 보고 있다. 추위에 약하다고 해서 들여놓았다. 인도에서는 바질을 귀하게 여겨 음식에는 넣지 않고 차로만 마신다는데. 부디 강건하게 살아주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죽어버리면 어쩌지. 20년 넘게 키우던 거북이 두 마리 중 하나가 여름에 죽었다. 시판 먹이보다 멸치나 상추나 특히 바나나를 아주 좋아해서 들고나가면 신나게 달려오는데 그날따라 한 마리가 조용했다. 먹이를 줄 때는 성급한 아이와 느린 아이가 있어서 각자의 집에 분리해서 먹게 하는데 그날은 한 마리만 반응을 했다. 곧 먹겠지, 하고 돌아섰는데 아니었다. 들여다보니 등껍질이 넓고 날씬한 아이가 네 다리를 늘어뜨리고 둥둥 떠 있었다. 왜 그래, 자는 거야, 손끝으로 톡톡 쳐도 움직이질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대로였다.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덜컥 겁이 났다. 죽음은 왜 그리 이물 같은지 씻기고 장난치던 몸에 손을 대기가 무서웠다. 다른 한 아이가 눈병이 나서 병원에 데려가고 안약이며 약을 먹이며 간신히 나은 참이었는데. 완전 멀쩡하던 아이가 죽다니. 깨끗한 택배 상자에 흰 종이를 깔고 거북이를 눕혔다. 배를 바닥에 두었으니 엎드린 건가. 그 위로 다시 흰 종이를 덮고 안고 근처 천변으로 갔다. 물 가까운 곳에 묻어주고 싶었다. 가물어서 모종삽으로 땅을 파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종이를 수의처럼 덮은 거북이를 묻고 흙으로 덮고 가장자리는 돌멩이를 둘러주었다. 기도를 하고 안녕을 하고 빈 상자를 안고 돌아오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장마라고 했다. 혼자 남은 거북이는 씩씩하게 잘 살고 있다. 12월 무렵이면 겨울잠에 들어 입춘 지나 경칩이면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여름이면 미친 듯 먹고 분주히 돌아다니다가 크고 작은 사고를 친다. 베란다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이 방 저 방으로 산책을 하는 거다.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벽을 세워두었는데 틈만 나면 기어오르고 파고들고 밀고 들어온다. 거실 문이 조금이라도 벌어져 있으면 뾰족한 얼굴로 밀어서 문을 연다. 자판을 두드리다가 시커먼 것이 스르륵 움직일 때면 깜짝 놀란다. 등껍질이 23센티도 넘게 자랐으니 작다고는 할 수 없다. 어느 여름엔 하루에도 두 번 세 번 들어오기에 아예 거실로 데려왔다. 마주 엎드려서 얼굴을 보니 도망을 친다. 들어오면 나가고 싶고 나가면 들어오고 싶니. 인간인 내가 무섭고 싫은 거니. 진심으로 가고 싶은 곳은 거실이 아니라 핏줄 속에 새겨진 아득한 강가일 텐데. 붉은귀거북의 분포지는 인디애나주, 뉴멕시코주, 텍사스주, 멕시코만 등이라는데. 너무 멀어서 갈 수도 없을 텐데. 지루하겠지. 똑같은 세상, 똑같은 풍경, 똑같은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야 하는 일생이라니. 발버둥을 쳐도 달아날 수 없는 현실이라니. 걱정되는 일은 사라진 거북이를 찾지 못하게 되는 일. 그런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장롱 뒤에, 싱크대 밑에, 여기저기 들어갔다가 등껍질이 걸려서 나오지 못한다고. 이사 갈 때, 가구를 옮길 때 바짝 마른 거북이 미라를 발견하는 일도 있다고. 그래서 거북이가 안 보이면 큰 소리로 부른다. 놀랄까 봐 인기척을 내면서 찾는다. 여기 있니? 어디 있니!


트레드밀의 손잡이를 잡고 눈을 감고 달린다. 근사하다. 두 발이 떠오르는 것 같다. 약간 날아가는 것 같다. 두 손 다 놓고 달리고 싶지만 금방 넘어지겠지. 넘어지는 찰나의 아득함, 아무 것도 잡을 수 없고 무엇도 나를 지탱해주지 않는 허공의 감각. 아버지는 왜 넘어지셨을까. 늘 펴두는 보료 위에서 늘 덮는 겨울 이불을 밟고 일어나다가 미끄러지시다니. 스탠드에 부딪히면서 얼굴은 긁히고 팔을 여섯 바늘이나 꿰매셨다는데 아프고 불편해서 어찌 지내시나 밤새 마음을 끓였다. 일요일 아침, 반찬가게에 들렀는데 휴무일이었다. 슈퍼에 들러 애호박 두 개, 등갈비 한 팩, 삼계탕 끓일 닭 한 마리와 찹쌀 한 봉지, 꽈리고추 한 봉지, 곶감 한 팩. 떡집에 들러 인절미 한 팩을 산다. 올 겨울 가장 춥다는 날이었고 폭설 내린 다음 날이었다. 전철역에서 옥수수 두 봉지도 사고 전철에서 내려 초밥 도시락과 파운드케이크와 햄샌드위치와 에그샌드위치를 사고 무거워서 휘청휘청 아버지 집을 향한다. 문을 두드리며 아버지, 아버지 부르니 일어나시는 소리. 아이구, 앓는 소리와 함께 나오신다. 대문이 열리기를 기다릴 때마다 겁이 난다. 아버지가 나오지 않으실까 봐, 그런 사람 여기에 살지 않는다고 할까 봐. 방에는 텔레비전이 살고 컴퓨터가 살고 책상이 살고 의자가 살고 필사하시는 불경이 산다. 왼손을 붕대로 감은 아버지, 아이구 왜 넘어지셨어요, 앉으세요, 어서 앉으세요. 도시락을 펼쳐드리고 반찬을 만들며 밀린 대화를 나눈다. 뭐라고? 하시며 귀에 손을 대시면 나는 크게 소리치고, 급할 때면 필답을 나눈다. 보청기가 무의미해진 청력이라니. 아버지는 내 입을 바라보시고 나는 아버지 눈을 바라보고. 힘이 없다고 누워만 계시면 다리 근육 더 빠져요. 운동 삼아 거실이라도 왔다 갔다 하셔야 해요. 한다, 하지, 하고 있다. 하셨을 거다. 뭐든 열심히 하시니까. 절망도 분노도 외로움도 열심을 다하셨을 거다. 그러다가 넘어지셨겠지. 삼계탕이 끓는 동안 호박전이 익는 동안 꽈리고추 찜이 완성되는 동안 등갈비가 익어가는 동안 청소를 한다. 아버지 곁에서 먼지들이 자라고 거미들이 자라고 얼룩들이 자라고 차곡차곡 비닐봉지며 신문지 더미가 자란다. 색이 변해버린 은수저는 수저통에 꽂혀 있다. 엄마가 수시로 닦으시던 빛나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붉게 각인되었던 목숨 수(壽)는 검푸른 빛이 되었다. 철수세미로 문질러 닦아도 예전 같지가 않다. 책장 한 칸에는 총천연색 라이터로 성채가 세워졌다. 담배 한 보루를 사면 일회용 라이터를 하나씩 준다는데 그걸 모아두셨다. 버릴 수도 없고 해서 쌓아 두었다고 하시는데. 힘들 때 한 모금, 외로울 때 한 모금, 지칠 때 한 모금, 심심할 때 또 한 모금. 피우려다 만 담배 한 개비가 싱크대 사이에 떨어져 있다. 개수대 앞에 걸린 메모지에는 밥 해동 시간, 국 해동 시간 같은 것들이 적혀 있다. 요리 대장 아버지의 곰솥도 커다란 국자와 집게도 계량저울도 동치미 담그시는 큰 독도 먼지가 앉아 있다. 후다닥 할 일을 끝내고 집에 오려고 일어서니 아버지는 오늘은 힘이 들어서 여기서 안녕을 하자, 하신다. 계단을 내려오다가 돌아본다. 골목을 돌아서다가 돌아본다. 아버지가 손을 흔드시던 자리를 전철을 타고 오며 찾아본다. 연녹색 옥상으로 가득한 모퉁이를 돌아 계단을 올라가면 된다. 그곳에 아버지가 사신다. 독거(獨居), 독처(獨處), 독수(獨守), 독고(獨孤)... 홀로 독(獨)은 독 독(毒)처럼 읽히는데.


슬슬 땀이 난다. 소매를 걷고 속도를 낮추어 걷는다. 올여름 엄마 제사 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내년 제사에는 아무래도 내가 못 오지 싶다. 화가 나서 나는 못 들은 척 하고. 누군가는 네에, 그렇지요, 한다. 대체 무슨 소리야, 더 화가 났는데 곧이어 누군가는 아니요, 건강해지셔서 함께 오셔야지요, 한다. 그럼요, 그럼요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쉰다. 엄마 영정은 은평구 진관사에 있고 아버지는 관악구 신림동에 계신다. 엄마 제사에 우리는 다 함께 절에 모여서 좋아하시던 음식을 올리고 절을 하고 앉아 있다가 내려온다. 근사한 회식을 하는 것으로 제사 일정은 마무리된다. 엄마가 계셨으면 말도 안 되는 법도라고 하셨을 텐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는데 합리적인 결론이라 믿고 싶다. 영혼이 있을 리가, 다음 생이 있을 리가. 엄마 영정 앞에서 아버지가 절 하시는 모습을 볼 때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엄마는 젊고 붉고 아버지는 늙고 희다. 엄마는 정면을 향해 웃고 아버지는 고개를 숙이고 웃지 않는다. 내 발은 엄지보다 둘째 발가락이 길어서 다들 엄마가 오래 사실 거라고 했는데 아버지가 버텨주신다. 버티는 삶에 좋을 일이 뭐가 있겠나. 여기가 나으면 저기가 아프고, 입원하고 퇴원하고 또 입원하고. 보이지 않는 곳곳이 막히고 부푼다. 그의 18살, 24살 사진을 나는 갖고 있다. 사막의 나라에서 찍은 사진도 갖고 있다.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꿈을 잃지 않는 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일. 무너지고 부서지는 일상 속에서 모든 게 마음 같지 않아도 걸음걸음 이어가는 일. 날마다 긴 하루가 가면 다시 긴 하루가 오고 돌아보면 텅 빈 시간 같을 텐데. 무엇을 기다린다는 마음도 없이 혼자 남겨진 거북이처럼 빈 벽을 밀고 나가는 삶이라니. 이런 생각을 하면 허물어진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날기를 잊은 새처럼 걸음을 멈춘 채 휘청한다. 다시 손잡이를 잡는다.


며칠 전 횟집 앞을 지나다 뜰채와 망치를 들고 나오는 요리사와 마주쳤다. 수족관의 방어를 들어 올리려는데 뜰채가 휘청, 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머리를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방어는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맞은 것도 같고 피한 것도 같은데 쩔쩔매는 건 요리사였고 의연한 건 방어였다. 방어는 망치보다 훨씬 크고 요리사는 방어보다 약간 크고. 방어는 바닥에서 버티는데 요리사는 덜덜 떨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작은 아이는 놀라 울고 아이 엄마는 그 눈을 한 손으로 가려주며 가자, 가 소리쳤다. 초보 요리사는 주인에게 야단을 맞겠지. 죽을 때까지 망치를 피하는 방어도, 죽을 때까지 망치를 휘두르는 요리사도 저마다 최선을 다한다고 말해야 하나. 방어의 푸른 몸에는 더 푸른 멍이 들었을까. 방어 살점이 붉은 것은 이런 악전고투 때문이 아닐까. 도마 위에 던져진 채 피를 뽑아내는 작업이 남았을 텐데. 접시 위에 얹힌 채 제 살점을 바라보며 뻐끔뻐끔 가쁜 숨을 내쉬어야 하는 두 눈의 절망도 남았을 텐데. 횟집 손님들이 방어회를 입에 넣으며 아아, 신선하군, 소리친다면 그건 삶의 맛일까, 죽음의 맛일까. 각자의 앞에는 가장 신선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단 한 번 맛볼 수 있지만 음미할 틈도 없는 맛. 누가 무엇이 단 한 번의 최후를 향해 망치를 휘두르나. 접시 위의 살점과 그것을 집는 사람의 살점이 다르지 않다는 시를 썼다. 누가 먹고 누가 먹히나,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 기승전결도 없이 돌고 도는 역할극이라니. 생각은 그만하고 속도를 높이자, 달리자, 하나 둘 하나 작게 외치는데 눈이 또 온다. 눈 위에 눈이 쌓인다. 사람들은 머리에 어깨에 가방에 눈을 이고 다니겠지. 가능한 수평마다 작고 흰 눈가루들이 내려앉겠지. 슈거파우더처럼 간질간질한 눈, 휘핑크림처럼 풍성한 눈. 재채기를 할까, 살짝 핥아 볼까. 손가락을 들어 콕 찍으면 정말로 차가워서 정신이 퍼뜩 들겠지. 슬프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날들. 의미 없는 일을 하고 먹고 재미없는 일을 하고 자고, 이게 다 뭐 하는 짓이야. 시도 글도 잘 되질 않는다. 나 뭐 하는 인간인가. 눈 덮인 거리를 조심조심 걷는 어른들이 있고 기꺼이 미끄러지는 아이들이 있다. 조심은 잡을 조(操)에 마음 심(心)을 쓴다. 방심은 놓을 방(放)에 마음 심(心)을 쓰겠지. 저마다 마음만은 항시 있다는 건데. 눈이 오는데 나는 달리고 오늘 이 눈을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 있고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지. 붉은 신호등 옆에는 장례식장 24시간 장례지원 전화번호가, 갓 신내린 애기씨 전화번호가, 성인학생모집 주야간 전화번호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검거나 희거나 붉은 무늬를 가진 얄따랗고 기다란 동물들 같다. 수직으로 내걸린 천 조각, 가능한 잠시의 비탈 위로도 눈은 쌓이겠지. 고개를 숙이고 걷다가 눈송이가 목덜미로 떨어지면 지금 여기였나, 화들짝 놀라겠지. 마침내 도착한 사람들이 공동 현관 앞에 서서 젖은 신발을 탕탕 털어대는 것만 같고, 그 소리는 어딘가 두드리는 것만 같고, 두드리면 마침내 열릴 것만 같은데. 마오리족은 우렁찬 구호에 맞추어 발을 힘차게 구른다는데. 그럴 때면 공기를 뒤흔들어 생명의 진동이 퍼져 나간다고 믿는다는데. 온통 눈 세상이다. 눈 아파트, 눈 경비실, 눈 주차장, 눈 안테나, 눈 자전거, 눈 유모차, 눈 강아지, 눈 새들. 가득한 눈 하루를 지나는 골목골목이 미끄러우니 절대 조심하시라고 아버지에게 문자 해야겠다. 멈춰 선 트레드밀을 탕탕, 치면서 내려온다.


=.jpg


* 이 글은 <문학인> 2023년 봄호에 게재되었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당신의 슬픔은 아프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