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시인론
잘 지내나요
아침 전철역에서 잠시 멈춰 섭니다. 사람들이 서둘러 들어가고 나오고 사라지기를 되풀이하는군요. 개찰구는 경마장의 출발게이트처럼 생겼어요. 신호와 함께 앞만 보며 달리는 하루가 되겠지요. 이처럼 뒤를 돌아보다가는 늦을 것 같아요. 걸음을 재촉합니다.
며칠 전 청주에 다녀왔어요. 당신의 이전 시집 속 청주의 공원이 기억났어요. 저로서는 거의 20년 만의 방문인데요. 무심천은 가물어서 바닥이 다 드러났고요. 도심은 쓸쓸하고요. 당시의 쇠락은 더한 쇠락이 되었어요. 그곳엘 가고 오며 당신의 시집들을 다시 읽었습니다. 돌아와 빨래방에서도 산책로 벤치에서도 놀이터 그네에 앉아서도 자꾸 읽었어요. 햇살과 나무와 꽃과 바람의 곁이라니 당신의 시집 자리로 적합하였습니다.
저는 숨고 싶을 때, 지칠 때, 결핍을 느낄 때, 도망치고 싶을 때, 사라지고 싶을 때 당신 시집을 펼칩니다. 마음이 산만한 채 책장을 펼치고는 아아 시라니 나여 대체 무슨 짓이야, 그래서 뭐, 왜 하면서도 잡고 있어요. 거기 무엇이 있을지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니아니 하다가, 그래그래 하게 됩니다. 가쁘던 숨이 가만해져요. 눈을 꾸욱 감았다가 뜨고 고개를 이리저리 가벼이 돌리기도 합니다. 두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려 느리게 기지개를 켜기도 합니다. 그대로 앉아 있으면 소리들이 찰랑거립니다. 파문이 와닿기 시작해요. 멀리 가까이 자동차 달리는 소리, 바람에 버티컬 흔들리는 소리, 베란다에서 노는 거북이들은 찰방찰방, 창에 달아놓은 풍경 소리, 위성 안테나 쪽에 내려앉은 직박구리 울음소리도 들려요. 허공을 떠다니는 먼지들이 빛을 받아 반짝거립니다. 흰 벽 위로 오후의 햇살이 야트막하게 고였다가 사라져요. 돌아보면 모든 게 제자리에 있습니다. 그렇게나 괜찮아집니다.
당신 시는 왜 그럴까요. 무슨 짓을 하는 건가요. 행복 같은 걸 노래하는 일도 없는데, 해답 비슷한 것을 주는 일도 없는데. 까닭을 물어보아야 무슨 설명을 줄 것 같지도 않고요. 당신의 시들이 어떤 심정의 전언이라 상상하며 살펴보려고 합니다. 존재-관계-시간-집의 키워드로 묶어 보았어요.
1. 존재마다 저 홀로 흔들리며
출근길을 살짝만 틀면 산책로가 나옵니다. 그 끝에는 나무로 만든 벤치와 탁자가 있습니다. 흰 셔츠를 입은 여인이 흰 개와 함께 산책을 나왔어요. 여인은 개를 후추후추, 부르네요. 이름을 연달아 부르는 마음이라니. 후추는 잔뜩 신이 났어요. 주인의 말이 들릴 리 없어요. 몇 번 리드 줄을 당기던 여인이 힘을 뺀 채 후추를 따라 걸어요. 나무 한 그루에 한 걸음, 이제 막 피려는 딸기 꽃송이에 한 걸음, 후추는 궁금한 게 많아요. 온 세상의 냄새를 맡고 온 세상에 제 체취를 남기고 온 세상 발치를 파헤치느라 흰 털은 끄트머리부터 연갈색으로 변하기 시작해요. 그들의 머리 위로 연초록, 연초록의 머리 위로 아침의 햇살이 번지네요.
「오늘 별이 뜨는 이유에 대해」의 할머니와 늙은 개가 떠올랐어요. 나란히 함께 편히 걷는 일이 저절로 될 리 없습니다. 시간과 마음을 들인다고 해서 반드시 되는 일도 아니고요. 저 할머니와 개처럼 서로에게 스며들 수 있다면 정말 좋겠어요. 반려의 동물이나 식물들은 확실한 기쁨을 줍니다. 언어가 부재하기 때문일까요. ‘바라보지도 않고 가만히 기다리는’ 일이라니 사랑에도 완결이라는 게 있다면 그런 장면일 것 같고요. 함께 걸으며 만들어내는 곡선이라니, 그 곡선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기다리는 마음이라니, 고요한 이심전심이라면 삶을 견디는 일도 견딜 만하겠습니다.
‘오늘은 참 많은 별이 뜨겠구나’ 하니 언젠가 들었던 사막의 밤이 떠오릅니다. 상상할 수 없이 많은 별들을 보았다고 했지요. 그 하늘에는 어떤 별자리들이 있었을까요.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 제 별자리는 가을 무렵 남쪽하늘에서 볼 수 있다는데 한 번도 본 일이 없어요. 이름 지어진 모양이 상상이 안 되더라고요. 의미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 별들을 이어 선을 긋고 형상을 만들고 이야기를 전하는 일이라니 허망한 맛이 있습니다.
당신의 시에는 텅 빈 것들이 만들어내는 충만감이 있어요. 오늘 보내준 시 속에는 별처럼 홀로 빛나는 존재들이, 어떻게든 이어지는 형상으로 등장합니다. 그것을 특별한 별자리라고 해도 좋겠어요. 할머니도 개도 빨간색 물뱀 같은 호스도 소금쟁이도 수국도 자작나무도 물고기도 배추흰나비도 둥근 사과도 화분도 창문도 그 자리에 있어야만 그 장면이 완성됩니다. 저마다 적막 속으로 가라앉은 듯, 존재하여도 부재하는 것 같을 때가 있지만 서로에게 길이 든 것도 같아요.
근본적인 부재감은 이전 시집에서도 느꼈던 점입니다. 「제목을 입력하세요」에서 당신은 ‘내 몸 어딘가에 나 살고 있기나 한 걸까’ 묻습니다. 「다시 봄비는 내리고」에서는 ‘봄비를 맞으며 골목을 지나가는 연인들. 저들은 서로를 버티느라 또 얼마나 힘겨울 것인가. 내가 없이 봄비가 내리는 저녁’을 바라보고요. 「여름의 대화」에서는 ‘수시로 나는 나를 만나지 못하고 잃어버리곤’합니다.
그런데 당신 마음에 약간의 변화가 생기는가요. 예전 「여름의 대화」에서 ‘내 몸에 내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불안’했다면 오늘의 시 「오늘 별이 뜨는 이유에 대해」에서는 ‘애초에 거기 있었던 마음’이라고 하네요. ‘흘러가는 시간을 흘러가게 그냥 두는 것’도 그렇고요. 물론 그냥 두는 수밖에 다른 수도 없겠지만, 알면서도 그러지 못할 때가 많잖아요. 마음을 놓아버리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까?
당신 곁에 홀로 있는 존재들은 서로 닮아 보여요. 저마다 무겁고 어두운 그림자를 끌고 다녀요. 그것을 벗어버릴 생각은 하지 않아요, 그럴 생각을 못하는 것도 같아요. 그 상태를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지도 않아요. 그저 지고 갈 뿐. 격정도 걱정도 없이, 과장도 엄살도 없이, 울어도 소리가 없고, 아파도 비명이 없어요. 그렇게 저마다의 어둠 속을 지나고 있습니다. 혹시 그들은 어둠 아닌 것을 살아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요. 존재는 자신이 겪은 것만을 제대로 이해하지요. 어둠이 어두운 줄도 모르고, 아픔이 아픈 줄도 모르고, 슬픔이 슬픈 줄도 모르고 꾸역꾸역 버티는 것은 아닐까요. 「오, 행복하여라」에서 처럼요. 어떤 시간을 통과한 당신은 스스로를 포괄한 전체를 관(觀)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페이지를 열고 나오는 사람이 어른거려요. 혼자 앓고 일어나 마른세수를 하네요. 물 한 컵을 마시고, 신발에 발을 넣고 대문을 밀고 나오는군요. 아직 힘이 드는지 비틀비틀, 혼자 어딜 가려고 그래요. 그래도 그 뒤로 곁으로 홀로인 존재들이 정령처럼 호위하고 있네요. 그들은 직선도 아니고 곡선도 아닌 전생의 그리움으로 까마득하게 이어져있는 것만 같습니다.
2. 복도에서 복도를 지나는 마음들이
「복도의 마음」을 읽습니다. 복도는 복도(複道), 건물 안에 다니게 된 통로를 말하지요. 세상 무수한 길 위의 길이라니, 단 한 지점이라니 우연이라고 해도 의도라고 해도 운명이라고 해도 놀라운 아닌가요. 우리가 여기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경탄을 반복하다가 익숙해지고는 다시 무감해지기도 하겠지만요. 이 복도를 지나면 또 어떤 복도를 통과하게 될까요. 복도를 나란히 지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라도 해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시죠, 부디 안녕하셔야 합니다.
이 시에서의 ‘복도’란 삶의 궤적인가요. 삶에서의 관계들인가요. 후자 쪽으로 저는 읽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삶이 타인의 그것과 겹치는 일이 가능할까요. 아무리 오래 걸어도 복도가 복도와 완전히 겹쳐지는 일이란 없습니다. 아무리 기다린다 해도 소실점이란 부재합니다. 그러므로 관계들의 순전한 동행이란 불가능할 겁니다. 그렇다고 각자도생은 아닙니다. 마음이 그 사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만은 믿을 수 있고, 믿을 수 있기에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다는 말’, ‘나를 데려갈 거라는 말’은 설레게 하고 안심을 줍니다. 당신은 복도 끝으로 ‘여름’이 온다고 믿습니다.
당신은 여름을 몹시 좋아하는군요. 가을이나 겨울을 좋아할 것 같았는데 말이지요. 여름이 좋다는 사람을 만나면 한 번 더 보게 됩니다. 어떻게 여름이 좋을 수가 있지, 속으로 생각하면서요.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쉽게 지치지 않고 열정적이고 망설임이 없고 명랑하고 쾌활합니다. 여름을 좋아하는 마음은 아주 튼튼해 보입니다.
이미 온통 여름인 아이들이 ‘여름을 기다리’네요. ‘창문에 붙어서’ 기다리고 있어요. 설레서 애가 타서 기다리는 모양입니다. ‘여름이 와서 나를 데려’ 간다면 어디로 데려간다는 것일까요. 다음 여름일까요. 그것에 이르는 여타의 계절들일까요. 우리 일생의 여름은 몇 번이나 남아있을까요. 그 여름들은 어떻게 다를까요, 혹은 비슷할까요. 여름마다 뉴스에서는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몇 년 만의 더위라고, 기록을 경신한다고요. 사실 늘 더웠고 더운 게 여름이고 더워야 여름일 텐데 매해 처음 같고요. 보나 마나 저는 또 백전백패할 겁니다. 여름의 승리자에게 나의 여름을 통째로 드리고 싶군요.
이 시에서 ‘물가로만 걷는 습성-뭘 사랑해야 하는지 몰라서-쏟아진 우유-울고 싶은 마음들-상처-불행-뭘 해도 다치는 마음-밤’ 같은 것은 하나의 색에서 번져 나온 것처럼 보입니다. ‘습성’이 운명을 만드는지 운명이 습성을 만드는지 그게 그건지, 한번 회로가 만들어지면 쉽게 바꿀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큰 배 한척이’ 들어옵니다. 뭔가 달라지겠지요. 외부적인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을 대하는 마음이라도요. ‘쏟아진 우유’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불행으로 자란다 해도, 우리를 살리던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 해도, 긴요하던 것이 무용하게 된다 해도 흘러가야 하고 흘러가게 됩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순리로요. 순리라면 맥없는 말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것만큼 단호하고 건강한 이치도 없는 것 같아요. 당신의 시는 상황과도 타자와도 자기 자신과도 다투지 않는 순리에 이르고 있습니다. 역순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겠지요. 자기 자신과 화해할 수 있다면 타자와도, 상황과도 그럴 수 있습니다. 자신과의 관계가 모든 관계의 치트키가 될 테니까요.
「사물들」은 저 또한 ‘책상에 앉아’서 읽습니다. ‘앉아 있다는 사실이 기억나지 않는 어떤 보풀’처럼 읽고 싶었습니다. ‘넌 어떤 사물이니 누군가 내게’ 물어보지만 ‘이 집에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고 ‘누군가 그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언어의 부재가, 소통의 부재가, 사랑의 부재가 사람을 사물화 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모두 조금씩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사람들 아니 사물들, ‘눈물도 없이 살아왔는데 모두 제 울음에 갇혀있다’고 말하지만 눈물을 흘리지 못해서, 슬픔을 말하지 못해서 울음에 갇히는 인과가 맞겠지요. 그리고 울음에 갇혀버리는 일이야말로 가장 서러운 사물화가 아닐까 싶어요. 극렬한 감정에 시달린 사람은 그 반대의 감정에 무뎌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사진은 권오상의 작품입니다. 모델의 몸을 360도 돌아가며 촬영한 후 인화된 사진으로 다시 인체를 재조합하는 방식이라고 해요. 190×70×50㎝의 전신상으로 거의 사람 크기인데요. 일부만 떼어서 본다면 원래의 모델과 같겠으나 조금 뒤로 물러서서 보면 머리가 둘 달린 기이한 형상으로 변합니다. 3차원의 입체물을 사진이라는 2차원으로 옮기고, 다시 조각처럼 재조합하여 3차원의 이미지로 변형하며 새로운 리얼리티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사진은 단 한 장도 같을 수가 없지요. 찍는 순간의 빛이며 찍고 찍히는 자의 위치와 자세 등이 계속 달라지니까요. 그것은 변수들이 얽혀서 만든 순간의 캡처일 텐데요. 그런 사진을 다시 잘라 재조합하였으니 얼룩덜룩 닮은 듯 다 다른 형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 같아요. 환경도 마음도 상황도 시시각각 변화무쌍하니까요. 누구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있느냐에 따라 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게 당연합니다. 누군가 왜냐고 묻는다면 몰랐다고, 본능이라고, 습관이라고, 배려라고, 예의범절이라고, 친교의 방식이라고 자기보호라고, 사랑이라고, 체면이라고, 당연한 거라고 기타 등등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기도 합니다만 가장 확실한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왜 세상에 던져졌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속이 텅 빈 스티로폼 같은 존재, 가볍고 연약한 물성을 가졌습니다. 그 위에 무엇을 점착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되겠지요. 아침에는 좋았다가 저녁에는 망한 것 같다가, 이 사람과는 괜찮은 것 같은데 저 사람과는 엉망진창이 되는 식으로요. 그래도 그게 불행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매 순간 선택할 자유가 있으니까요. 매 순간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 가능성을 가능케 하는 힘은 ‘책상에 앉아’서 ‘흘러내리는 눈 코 입을 보고 있’는 자에게 있습니다. 당신은 관계들의 참혹에도 불구하고 바라보기를 멈추지 않는 견자(見者)로 존재합니다. 바라본다면 언젠가 대답을 듣게 될 거라는 단단한 희망을 던져줍니다.
산문집 『어떤 밤은 식물들에 기대어 울었다』에서 당신은 말합니다. ‘나의 정원은, 나의 화분들은 자꾸 죽는 것과 자꾸 사는 것이 서로 좋아해서 물고기 때처럼 흘러가는 세계, 그런 곳이었으면 싶다. 나는 그런 세계는 잘 모르지만 내가 몇 번 죽으면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모르는 것이 생겨날수록 나는 모르는 일에만 집중하고, 모르는 것들 사이로, 모르는 것들과 모르는 것들을 낳으며, 그런 식물들의 세계를 함께 살고 견디고 싶다. 이 모든 것은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니다. 책상 위의 작은 선인장 하나에서도 배우게 되는 것들이다.’ 당신에게 있어서의 관계란 무진하고 무구한 당위의 세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기대도 두려움도 놓아버린 채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아요. 여린 풀잎이며 어린 짐승들처럼.
이제 제 마음의 가장자리는 둥그스름해졌어요. 요동치던 오후가 잔잔해지고 있어요. 이유를 모르겠는 불안이 가라앉고 있어요. 당신 말대로 죽는 것과 사는 것이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닐 수 있겠어요. 죽음이 삶을 살게 하고 삶도 죽음을 살게 하는 것도 같아요. 죽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이야말로 불가능한 일일 것도 같아요. 죽은 사람들이 여전히 곁에 있는 것 같을 때, 사라진 사람들과 닿아 있는 것 같을 때, 괜찮다 괜찮아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요. 집을 나설 때면 오래전 엄마의 당부들, 차 조심하고 밥 잘 먹고 조심히 다녀오라는 말. 그래서 오늘도 잘 다녀왔습니다. 당신도 잘 다녀왔습니까.
초록 풀밭 위의 낙화를 보냅니다. 피도록 좋고 지도록 좋은 저 꽃들, 저마다 피었다가 지고 말았지만 그렇게 여름을 향해 흘러가고 있습니다. 생전에는 만날 일이 없는 꽃과 풀들이 저렇게 종일토록 뺨을 부비고 있네요.
3. 순간의 영원이 영원히
청주에는 이팝나무 흰 꽃이 한창이었는데요. 돌아오니 제가 사는 곳에도 그 꽃이 그야말로 팝팝 터지더라고요. 이팝이 이밥이라 흰 쌀알이라는 말에는 서글픈 감이 있지만 그래도 이팝 꽃이 풍성하면 풍년이라는데 쌀농사 작황이 좋으려나요. 뿌리내린 것들마다 그 자리의 기후에 따라 준비, 땅 하면서 열과 성을 다해 꽃을 내미는 풍경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요. 이팝나무의 자리를 알고 그것의 꽃 시절을 알고 난 후로는 한겨울 앙상한 나무를 보아도 흰 꽃이 보이는 것만 같아요. 꽃의 순간이 저의 영원이 된 것일까요.
「정원에서의 하루」를 읽습니다. 당신의 정원과 당신의 하루를 상상합니다. ‘소금쟁이처럼 가로질러 갔다 왔다’하는 부지런함이라니, 무엇 하나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겠지요. 어느 풀잎 하나 함부로 떨어지게는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겠지요. 그토록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이라면 그곳의 전지적 정원사(^^)가 될 자격이 있습니다. 빛나는 흙덩어리 아래로 물기가 잘 스미는지, 햇살을 독점하려는 이파리는 없는지, 땅 위의 일들도 땅 밑의 일들도 더듬어 살피겠지요. 가지가지 송이송이 풍성할 것 같습니다.
위의 시에서 ‘오늘-하루 종일-여름’은 점진적으로 확장되는 시간입니다. 시간이 흐르는 사이 무슨 일인가 자꾸자꾸 벌어지고 있습니다. ‘갔다 왔다 하고-흔들리고-쏘다니고-하품을 하고-고파지고-높아지고-흘러가고-풍성해지고-가고 싶어 질지도–핥아줄 수도-기다렸을’ 행동들이 이어집니다. 이 모든 것들을 시간이 하고 있군요. 당신의 시에서 시간은 배경이 아닌 주인공, 직접적인 행위자로 존재합니다.
‘자작나무 사이로 물고기들이 숨어드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지느러미가 수피와 스치는 순간 두 몸의 분간이 사라지겠지요. 어느 비늘이 어느 것의 비늘인지 헷갈릴 것 같습니다. 물고기가 지나갈 때마다 나무는 겨드랑이가 간질간질하겠어요. 자작나무는 70년에서 80년 정도로 짧게 산다지요. 시베리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우주수로 삼는다고 하더군요. 화촉(樺燭)을 밝힌다고 할 때의 화촉이 바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초라고요. 자작나무는 샤먼이 하늘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기도 한답니다. 물고기의 시간과 자작나무의 시간과 그것을 바라보는 당신의 시간은 어떻게 다를까요. 시간이 행위자라 해도 당신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시간을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알아차리는 자가 없다면 시간이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의 말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니까’ 그대로 두는 게 맞습니다. 설명할 수 없어도, 이해할 수 없어도 받아들이게 되는 일이 있으니까요. 그럴 때면 마음 같은 건 아무 쓸모도 없는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이 내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마음의 것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가라앉을 수도 없고 떠오를 수도 없을 때’는 또 얼마나 많던지요. 얼굴을 가리고 여기 없는 척을 하는 어리석은 짓을 곧잘 합니다. 물고기처럼 눈만 크게 뜨고 말이지요. 자작나무 흰 숲 같은 장소를 찾아다니지만 제가 사는 곳에 흰 것이라고는 아파트의 벽면뿐이군요.
그러니 나무 사이로 숨어드는 일은 자작에게도 물고기에게도 구체적인 ‘친절’ 맞습니다. 곁에 와서 실컷 울고 가는 물고기가 있어주어 나무는 덜 외롭겠어요. 슬픔을 알아차리는 마음은 품이 넓으니까요. 알아차리면, 바로는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괜찮아지더라고요. 하루 종일 숨고 싶어질 때 어서 와, 괜찮아, 말하는 듯 흔들리는 듯 빛나는 이파리들이 얼마나 고마울까요. 그 정원은 사람을 살리고 있습니다.
「사물들」에서 ‘조금 가까워진 화분과 창문의 사이’ 또한 시간이 하는 일입니다. 그다음에 시간은 무슨 일을 할까요. 다시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다가 어느 날엔가 융성한 뿌리들이 화분을 깨고 나오기도 하겠지요. 조금씩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자라다가 시들다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모든 순간들이 모여 영원이 되겠지요. 영원이라고 하면 막연하고 망연한 것, 어쩐지 속이 텅 비었을 것 같지만 시시각각의 사건과 감정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요. 그렇게 당신의 시간은 필연적인 순간들을 배태하며 영원이 됩니다.
다시 「정원에서의 하루」에서 ‘수국이 피면 구름이 더 높아’지는 장면으로 갑니다. 수국은 무도회의 여인들 같아요. 저마다 댄스 드레스를 뽐내고 있군요. 수국의 꽃은 범의귀과, 꽃은 산방꽃차례로 달린다고요. 산방이란 우산의 방이라는 뜻일 텐데요. 아래 달린 꽃은 길게 위에 달린 꽃은 짧게 피어 수평의 꽃 대열을 이루더군요. 꽃은 처음에 연자주색에서 하늘색에서 다시 연홍색이 된다는데 올해는 잘 살펴보려고 합니다. 수국은 꽃도 잎도 뿌리도 귀한 약재가 되어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열이 심할 때, 심장을 강하게 해주는 효능이 있다고 하네요. 행여 수국을 약으로 쓸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수국은 물을 좋아하는 아이니 혹여 날이 가물면 ‘붉은 뱀’을 풀어 물을 주느라 분주하겠어요. 당신이 수국에 물을 주는 동안 수국도 당신에게 물을 주겠지요. 그럴 때 서로의 시간은 함께 흐릅니다. 같은 시간을 살고 있어요. 나란히 이어진 혈맥 같은 것, 숨관 같은 것, 엽맥 같은 것. 서로가 서로에게 이어진다는 것, 서로가 서로를 살게 하는 것,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듣고 있겠지요. 당신이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것은 서로를 살리는 일이 됩니다.
그렇다고 시간이 산 자만의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전의 시 「맨드라미는 지금도」를 볼까요. 여기서 ‘햇살-죽은 나무-내 얼굴’은 꽃차례처럼 매달려 있어요. 산 것-죽은 것-산 것이 경계를 허물고 나란해요. 지나간 시간이 죽은 것이고 지금 이 시간이 산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시간은 시제와 무관해요. 시간은 그 연속성으로 시제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에서는 ‘오전과 오후의 거리란 게 딱 이승과 저승의 거리와 같다’고요. 정말 바로 곁에 있겠지요. 「가족사진」에서는 ‘햇살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느리게 걸어가는 동안 얼굴이 반쯤 지워졌다가 다시 생겨났다 맨드라미가 거짓말처럼 피어 있었고, 멈춰진 시간은 어떻게 결박을 풀고 지금까지 흘렀을까 맨드라미가 얼룩이 되는 동안 익명의 계절이 어떻게 나를 대신하였을까’ 라고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에요. 시간이 나를 사는 것이에요. 우리들이 주인이 아니고 시간이 주인 같아요. 그러나 내가 없다면 이 모든 인식이 부질없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주종을 가릴 수 없게 됩니다. 시간 속의 인간, 인간 속의 시간은 서로를 서로가 포섭하면서 유의미해지고 있어요. 단 한 번인 이 순간이 문득 아깝고 안타깝습니다.
며칠 전 향을 하나 들여왔어요. 향목과 계피와 백단 같은 것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향이 좋아서 몇 번이고 피우는데요. 체감으로는 5분 정도 타는가 했는데 타이머를 눌러보니 25분이나 타더라고요. 유튜브를 2배속으로 보면 엄청 빨라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요. 제 일상은 그것보다 더 빠르게 감각된다는 건데요. 한 시간은 12분, 하루는 5시간 정도. 한 달은 6일 정도가 되려나요. 말도 안 되는 비교인데 생각해 보니 의미 있는 시간이 전체 중 딱 그 정도, 아니 그보다도 훨씬 적을 것 같아요. 당신의 5분은 몇 분인가요. 당신의 시간은 언제인가요.
바삐 걷는 사람의 그림자가 꼭 시침 같아서 찰칵, 눌렀습니다. 기둥도 돌 의자도 그 순간의 제 그림자도 저 사람과 다르지 않겠지요.
4. 당신은 세상에 없는 집을 찾아다니고
「이제 그만 집에 가자라는 말」을 읽습니다. 언제든 어디서든 이제 집에 가자, 하고 생각하면 좋아요. 마음이 편안해지고 몸도 곧 편안해질 것을 아니까요. 그런데 당신 시에서의 집은 잠과 상실과 망각과 죽음 같은 것으로 읽힙니다. 돌아가는데 아주, 아예 돌아간다는 말 같아요. ‘넘치는 얼룩 사이로 모자라는 얼룩처럼’ 잠을 자다니, 얼룩의 자리는 얼룩이 아닌 곳에 있을 텐데요. 그렇다면 집은 집이 아닌 곳에 있을까요. 당신의 집은 영영 부재하는 장소가 되나요. 상정하는 그 집이 아니면 어떤 곳도 집이 될 수 없나요. ‘다 조금씩 떠 있다’는 건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마음이 표면 장력 같은 걸 만들어낸 것인가요. 절대 만질 수 없는 몸처럼, 절대 갈 수 없는 장소가 되나요. 떠있다면 허공의 집 한 채, 사상의 누각인가요. 이로써 당신의 집은 영영 상실한 것들의 은유입니다. 당신은 집을 찾아다니는 행위를 통해 그것의 불가능성을 역설합니다.
물속에서는 느려지고 멀어지고 아득해집니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다른 생의 일 같지요. 그럼에도 ‘수없이 많은 배추흰나비가 한없이 느린 속도로 소리가 되고 있었다’ 면, 그게 ‘이제 그만 집에 가자라는 말’이라면 말할 수 없는 것들이 하는 말이 우리를 집으로 이끈다는 뜻인가요. 집도 없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없고 그런 말을 듣는 사람도 사라진다는 뜻인가요. 당신의 집은 부재하는 것들이 귀소하는 장소로 존재합니다.
물속으로 내리는 폭설은 녹아 흘러가겠지요. 바라보는 자도 없이 사라질 흰 눈을 바라보는 존재는 폭설 속에 피어난 한 송이 ‘배추흰나비’ 같은 것이 되겠네요. 그 나비를 바라보는 당신이 되겠고요. 사라지는 나비가, 흘러가는 나비가 집에 가자고 말한다면 그것 또한 갈 수 없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매일 단체사진을 찍는 사람’은 하루하루가 기억해야 할 유일하고 특별한 시간이라는 뜻이 되나요. ‘단체’란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 우리가 속한 이 세계 속 관계라는 뜻인가요. 마음은 없지만 몸이라도 가있어야 하는 부질없는 여행이라는 뜻인가요. 오래된 단체사진을 바라볼 때마다 좋거나 싫거나 지나고 보면 별일 아니다, 싶어지는 미래를 예감하는 것인가요. ‘여전히 의자에 앉아있는’ 그 자리가 지상의 집이니 어딜 더 찾아 헤맬 것도 없이 이미 당도하였다는 뜻은 아닌가요.
이전의 시 「맨드라미 정원」에서는 ‘무엇과 무엇 사이에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 있습니다. 「빈방 있음」에서는 ‘들여놓을 마음 없이 몸만 가도 되는 방’에서 ‘이 세상은 빈방’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뭉쳐지지 않는 구름」에서는 ‘집을 떠날 때 두고 온 맨드라미가 가끔 전철을 타고 왔다 갔다 침대에 창문에 맨드라미 발자국으로 물든 방’이 되는데 ‘맨드라미 손목 잡고 집에 가는 길 멀고 멀어서 나 맨드라미로 지고 싶’다고요. 당신의 집은 비어 있고, 마음조차 살지 않고, 살았다 해도 맨드라미 같은 것들의 거처였을 뿐입니다. 당신의 집은 텅 빈 것들로 촘촘하여 비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부재가 존재를 가득히 채우는 집이 됩니다.
「시소의 세계에서 우리는」에서는 ‘마주 앉은’ ‘너와 나’도 ‘세상’도 ‘내가 살던 집’도 ‘보였다 안 보였다’ 합니다.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거, 좋아요. 당신이 왜 세상에 없는 집을 자꾸 찾아다니나 싶지만 이 세계는 정말이지 ‘시소의 세계’ 같아서 좋다가 나쁘다가 있다가 없다가 웃다가 울다가 되풀이되니까요. 부재하기가 있어서 존재하기가 가능해집니다. 양 쪽 시소 중 한쪽만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움직여진다는 것, 그것은 적어도 그 순간까지는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니까요. 어쩐지 위로가 됩니다. 언젠가 사람도 집도 시소도 완전히 다 사라지겠지만 모두가 깃들어 살고 있는 이 세계라는 집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겠지요. 허공이라는 영원의 집으로 우리는 돌아가고 있는 중이고요.
4월 말에서 5월 초에는 오동나무를 만나야 해요. 창백한 보랏빛 꽃이 매달려 있는데요. 나무 아래 꽃송이들이 요술호리병처럼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를 집어 올리니 꿀을 먹던 개미가 화들짝 놀랍니다. 오동나무 꽃봉오리는 잠시 개미의 집이 되었어요. 그 집 벽에는 솜털이 가득해요. 이미 가장자리부터 갈색이 번지기 시작했지만 향기도 냄새도 그림자도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정말이지 이때쯤에는 오동나무를 꼭 보아야 해요. 세상에 없는 집을 찾아다니는 틈틈이요.
저는 잘 지냅니다
당신에게는 스며드는 어린 햇살 같은 것이, 아득하게 울리는 음성 같은 것이, 온 마음을 다해 보듬어 안고 있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당신은 무심한 나무처럼 보이지만 해와 달과 별과 바람과 눈과 비와 안개 같은 것들 속에서 쉬지 않고 흔들리고 있어요. 서두르지도 않고 늑장을 부리는 일도 없이, 과장하거나 숨기는 일도 없이 다만 무구한 마음이 지은 가난한 정원을 그려봅니다. 비밀의 정원 같지만 그곳의 결계는 지어진 적이 없을 거예요. 누구든 페이지를 넘기면서 걸어볼 수가 있으니까요. 지금 그곳에는 어떤 나무들이 있습니까? 이팝나무 꽃으로 시작한 글인데 아카시아 꽃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당에도 아카시아 꽃송이들이 갓 태어난 아기 양말처럼 떨어져 있나요 그 꽃을 밟지 않으려면 발끝을 들고 콩콩 뛰어야 한답니다.
사진은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 속 장면입니다. 그녀가 말합니다. 세 살 때, 일곱 살 때, 열아홉 살 때 어린 시절의 당신 옆에 가 앉아서 가만히 같이 있어 주고 싶다고요. 그러자 그가 말합니다. ‘있어 주네 지금. 내 나이 아흔이면 지금이 어린 시절이야’ 라고요. 무지개가 그들을 둥글게 감싸 안고 있었어요. 당신은 어떤가요. 몇 살 때의 당신 곁에 가 있고 싶은가요. 가서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은가요. 그리고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의 당신이 지금의 당신 곁에 오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하게 될까요.
잘 지내나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 이 글은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2년 6월 게재된 이승희 시인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