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도의 처음과 고난의 시작
당신과 월미도에 함께 갔을 때 저는 월미도라는 그 이름이 얼마나 예쁜지 신이 나서 설명을 했지요. 월미(月尾)라고, 달의 꼬리 모양을 한 섬이라고요. 그런데 요번에 자료를 찾아보니 시작은 그게 아니더라고요. 월미도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1695년 숙종 비변사등록인데요. 어을미도(魚乙未島), 어을미도(於乙味島), 돌도(突島), 월성(月星), 돌미도(突尾島) 등으로 불렀다고 해요. ‘달 꼬리’를 닮았다고 해서 월미도가 아니라 ‘얼다(어르다)’의 ‘얼’과 ‘물(水)’을 뜻하는 ‘미’가 합쳐져서 물이 섞이는 섬이라는 ‘얼미도’가 되었고 한차로 음차하면서 ‘월미도’가 되었다고요.
월미도에 대한 첫 공식 기록은 1708년 상소문 중 몽골 기마병이 침략하여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혔을 때를 대비하여 월미도에 행궁을 만들어 피난로를 만들자는 기록이 있고요. 월미도와 인천이 해상군사요충지라는 이유를 들었는데 이를 통해 조선 중기부터 이미 월미도가 군사 요충지로서 알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쯤부터 어을미도에서 월미도라고 바뀐 것으로 추정되고요.
행궁이 지어지던 이야기는 조금 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병자호란 때 미처 강화도로 피난할 틈도 없이 몽골 기마병이 길목을 막아서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야 했던 경험을 했으니 강화도로 가는 제2의 피난길을 개척하게 되는데요. 경로는 서울-영등포-인천도호부-월미도-영종도-강화도의 순서이고요. 1656년(효종7) 홍명하의 건의로 인천부사 윤부가 비밀리에 월미행궁을 세웠다고 해요. 인천에서 월미도에 들러 머물렀다 가는 것은 물때를 맞추기 위해서라고 여겨지고요. 1695년(숙종21) 행궁이 중건되었고 북벌론이 수그러들면서 그 기능이 상실되어 조선 말 고종 때 헐어버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월미행궁의 터가 어디였는지는 월미도 동남쪽이라는 설과 서북쪽 산자락이라는 설이 있는데요. 동남쪽은 경사가 가팔라서 행궁을 지을 평지가 없어서 영종도로 갈 뱃길이 없으니 서북쪽 산자락 나루터에 축조된 것으로 짐작됩니다. 하지만 확증할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지는 않았고요. 문헌에서는 ‘영종진의 남쪽 수로 7리’, ‘일본 해군 석탄고’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후 월미도는 본격적인 수난이 시작됩니다. 1866년 프랑스는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에 항의하기 위해 조선에 군함을 파견해요.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인천 앞바다에 당도해서 한성으로 들어갈 항로를 탐사하면서 월미도를 발견, 해도에는 함대 사령관의 이름을 따서 ‘로즈섬(Rose Island)’라고 적었어요.
그 후로 서양 세력들은 조선 지도를 제작할 때 월미도라는 지명 대신 로즈섬이라고 이름을 붙였고요. 덕분에 월미도가 장미섬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지요. 해안을 측량하고 해도를 작성해서 조선 공략에 나선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세력들은 조선 침략의 발판으로 제물포를 강제로 개항시키고요. 월미도를 차지하기 위한 제국 열강들의 각축전이 벌어집니다.
조선 정부는 뒤늦게 월미도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1879년에 월미산 정상에 포대를 설치하여 열강들의 침탈에 대응하고자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1891년에 우리 정부가 일본의 요구에 의해 월미도지소차입약서를 체결하면서 월미도는 외세 침략의 본거지가 됩니다. 이에 긴장한 러시아도 1896년 이곳에 해군용 저탄고를 세웠고요. 1900년 한인 송정섭이 정부로부터 월미도 개척 허락을 받아 이를 일본인 요시가와에게 전매하자 일본은 이를 기회로 1904년 월미도 민가를 강매하여 철거하고 순환도로를 건설하고 해군기지와 포대, 석탄창고, 급수소 등을 설치했습니다.
1902년 정부는 월미도에 예포대를 설치하여 인천항을 들고 나는 외국배에 예포를 발사했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1903년 월미도와 소월미도에 등대가 설치되었습니다. 1906년 일본은 군 요새인 월미도에 수송을 원활히 하기 위해 교량을 준공, 1908년 월미도에 폭풍우표(暴風雨標)를 설치하고 해상 기상을 표시하기 시작합니다. 1910년 항로표식선 광제호가 최초로 무선 전신을 개시하고 1915년 인천관측소는 월미도에 기상 신호를 게양하기 시작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