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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없이 연 날리는 남자 외전(3)

C - section 3rd

첫째가 아장아장 걷고 둘째는 기어 다닌다.

어른이는 바쁘게 다닌다.


  아기 둘이 커가면서 일반 유모차 둘, 쌍둥이 유모차 하나 총 3개가 항상 현관에 준비되어 있었다. 아내가 혼자 아이 둘을 데리고 다닐 때는 쌍둥이 유모차를 사용했다. 아이 둘이 기저귀 차고 모유수유를 함께 해야 하는 상황에 여름은 정말 괴로웠다. 에어컨 없는 아파트에서 아기들은 온몸이 땀띠로 고통받았고 기저귀에 짓무른 살 때문에 아프다고 늘 울었다. 아내는 수유 중 아기가 얼굴을 찡긋하거나 쎄근쎄근 자는 하얀 아기 얼굴을 보고 있으면 피로가 스르르 풀린다고 했다.



  아기가 둘이다 보니 지출의 비율이 달라졌다. 고정비(기저귀, 때로 분유, 물티슈, 아기 관련용품)는 절약한다고 되는 게 아니어서 부부의 지출을 줄이고 줄여도 벅찰 지경이 되어갔다. 매월 아기 고정 지출 부담 때문에 어떤 날은 둘이서 앉아서 몰래 울기도 했다. 어른은 안 먹거나 안 써도 견디지만 아기 둘은 부족한 모유를 채우기 위해 분유를 병행해야 했다. 분유가 떨어지면 식사를 굶기는 것이라서 줄일 수가 없었다. 기저귀를 제일 싼 것으로 하면 금세 피부가 짓물러져서 병원비가 더 들었다. 절약하려다가 병원비를 더 많이 지출하기도 했다. 우선순위는 항상 아기용품이었다.



  우유 먹는 양이 많아지면서 기저귀 소비량이 갑자기 많아졌다. 한 번이라도 더 소변을 받아내고 기저귀를 갈아주려고도  해 봤다. 그랬더니 아기가 부풀어 오를 대로 오른 기저귀를 깔고 앉게 되어 불편해서 울기도 했다. 둘째 딸은 소변부위가 헐어서 약을 엄청 발라야 했다. 기저귀 교체 횟수를 줄여 보려다가 역시 약값이 더 많이 들었다. 기저귀 갈고 있는데 오줌을 또 싸기도 했다. 예상할 수도 줄일 수도 없는 고정비였다. 곡절에 곡절을 거듭하다 보니 시간이 흘러서 첫째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고 둘째까지 이유식을 먹기 시작했다.



아기들을 먹이고 낮잠을 재운 어느 날,

"여보, 우리 세 명 낳기로 한 거 기억하죠?

"노산 전에 세 명 낳으려면 쁘겠지요?"

"여보.... 여보..."

수차례 부른 다름에서야 아내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출산에 대해 자신이 없어요. 수술을 또? 이제 나이도 많아요."

"남편, 진짜 무서워요. 지금 아기 둘도 벅차고요."

"우리 나중을 위해서 조금만 더 용기 내 볼까요?"


여자나이 40세를 넘기면 출산전후 모두 힘들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좋을 것이 확실하다며 용기를 내도록 아내를 설득시키는 내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그리 멋지는 않다. 맹목적이고 목표지향적이기만 한 차가운 동물 같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말이다.



  간신히 용기를 냈는데 예상 못한 변수가 생겼다. 아기 둘과 치열하게 살아가는 동안 아내 몸과 마음 피폐해져 있었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새로 시작한 일은 건설현장 시공관리였다. 밤낮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많았고 처음 하는 일을 잘 해내려 하다 보니 내 몸 또한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노산 전 출산해야 한다는 강박적 생각까지 겹쳐서 심리적인 불안감도 커져갔다. 그래서 매월 기대했던 "임신"소식은 한동안 없었다.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건강하게 두 명이나 출산했는데 우리가 임신을 걱정까지 할 것은 없다고 자부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달력이 한 장 한 장 더 뜯어져 나가는데도 "남편, 임신이에요."라는 말은 없었다. 임신기간 포함해서 출산한다는 전제에서는 여차하면 40세를 넘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제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우리 둘의 심리상태는 점점 불안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마음도 생기기 시작했다.  '난임은 이것보다 훨씬 더 힘든 마음이겠지?' '몇 년씩 이런 생각으로 사는 부부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우리 너무 욕심부린 건가? "

오만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점점 아내는 더 지쳐갔고 나 또한 거의 자포자기상태까지 되어갔다.






감기약


어느 날,

"남편, 몸이 이상해요. 열도 나고 몸이 으실거리고 안 좋아요. 몸살인가 봐요."

이 와중에 "몸살이면 어떡해요. 아내가 정말 힘든가 보다. 셋째는 포기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했다.

병원을 다녀온 아내가 나를 불렀다.

"남편. 감기약 먹지 말래요. 큰일 난대요."

"감기가 아니에요?"

"임신"



드디어 셋째가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갑자기 입덧이 심해지면서 아내가 잘 먹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기 둘은 남자 여자가 다르듯이 다른 패턴으로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다. 아내의 배는 나날이 불러오고 아이들에게 셋째의 존재를 설명해 주었지만 전혀 이해 못 했다. 그렇지만 첫째는 상황을 아는 것 같았다.  첫째는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아야 할 때에 둘째가 생겨서 모유수유도 중단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커져 가는 엄마 배를 보며 그냥 엄마 곁에 와서 앉아 있기만 했다. 둘째는 태어나보니 오빠가 있고 곧 동생이 태어난다는 말이 이해가 안 되었다. 근데 엄마 배에 올라가면 안 된다는 사실이 더 이해가 안 되었다. 그래서, 종종 울었다.



역시 시작부터 이번 임신은 너무 어렵고 힘들었다. 그런 탓인지 아내의 배에서 잘 자라고 있어야 할 아기가 예정일이 한참 남았는데 일이 생겼다. 허리는 끊어질 듯이 아프고 고관절도 아파서 제대로 앉지를 못하는 아내가 병원검진 후 얼굴이 먹구름이 되어서 왔다. 검진 결과가 안 좋다는 것이다.  

"아기는 벌써 밑으로 내려왔대요."

아기 둘을 키우면서 임신한 상황이라서 아내 몸도 뱃속 아기도 견디기 힘들었나 보다. 정상분만이면 괜찮은데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기가 밑으로 내려갔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고 했다.   






출산


걱정근심 많고 사건사고 생길 때마다 처리하느라 허둥대다 보니 출산일이 다가왔다.

아내의 편안한 출산을 위해 예전에 두 아이를 출산한 병원을 예약했지만 이번에도 여의사 선생님은 안 계셨다. 아예 다른 병원으로 가셨다고 한다. 둘째 출산 때 남자 의사분과 또 출산을 해야 했다. 아내에게 도움 되는 것은 아이 둘을 출산한 병원이라서 익숙하다는 것밖에 없었다. 출산 전 마지막 검진 때 아내가 불편해하는 것을 눈치챈 수간호사님이 한마디 해주셨다. 남자의사분이 이 병원에서 제왕절개수술을 제일 많이 집도하셨단다. 그러다 보니 수술자국이 제일 예쁘게 마무리된다고 산모들이 은근 선호하는 의사분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간호사분의 말씀에 아내는 살짝 안심이 되기도 했다. 셋째 이후 더 이상 출산은 불가하다는 말에 이번에 배의 수술자국이 가장 예쁘게 마무리되길 내심 소원했었다.  





출산 당일


"여보, 미안해요. 잘하고 나와요."

"남편, 무서워요. 못 깨어날까 봐 걱정돼요."

아내를 잠시 안아줬다. 수술실로 간호사와 함께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복잡했다.


"응애응애  응앵엥에"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아기 울음소리가 적막을 깨고 또 울려 퍼졌다.

셋째가 잘 태어났구나. 우리 이제 출산은 그만해도 되겠구나. 아내! 대단하다.


간호사가 막 태어난 아기를 내게 건네주었다. 안아보는 것이 익숙한 것 같은데 새 생명 안으면 매번 마음이 뭉클했다. 셋째는 조그만 여자아기이다. 바라보는 내 눈은 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생명의 신비는 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초음파사진으로 본 '점'이 10개월이 지나 '사람'이 되어 나오는 것은 경이롭다. 감동과 감사가 끝나자마자 간호사와 아기는 다시 들어갔다. 이제 나의 아내가 나올 차례이다.  



  드디어 아내가 또 침대에 누운채로 수술실 밖으로 나왔다.

"으으으으으으. 아파요. 아파" 이제는 별 말도 못 한다. 너무 아프다는 것이다.

"미안해요. 미안." 아내 손을 꼭 잡고 엉엉 울면서 고맙다고 거듭 말했다. 세 번씩이나 수술을 감당해 준 아내를 만나는 순간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고 이제는 콧물도 주르륵 흘렀다. 턱밑까지 주르르 흐르는 것이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정도였다. 아내 손을 잡고 한동안 엉엉 울었다. 정말 너무 고마웠다.  



이렇게 아내의 헌신과 용기 덕분에 세 아이와 살게 되었다. 제왕절개 때문에 지출도 많았고 시간도 더 오래 걸렸다. 그러나, 그 값진 대가 덕분에 나는 두 가지를 얻었다.

 

1. 아내를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2. 출산한 모든 엄마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망각의 동물이었다.

그 덕분에 이 글을 쓰게 되었고 계속 쓰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마음을 잊어버리고 종종 아내와 여전히 감정싸움을 한다. 사실 우리 둘 사이에 성격차이로 인한 것은 1/3이다. 주로 아이들에 관련된 것들이 2/3이다. 가끔은 그래서 속상하기도 하다. 우리 둘은 괜찮은데 아이들 문제 때문에 종종 대립하기 때문이다. 다행인 건 아이들이 커가면서 의견차이가 더 많이 나지만 부부사이에 필요한  '사랑과 신뢰'를 잊지 않고 있어서 다행이다.




아들 딸 딸과 살면서 다양하게 느끼고 배운다.

비로소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다른 사람'도 이해하기 시작했다.








바람 없이 연 날리는 것처럼 가족을 위해 엉뚱한 일을 열심히 해댔던 남자의 헛수고 같은 시간들을 적고 있다.

세 아이를 낳느라 고생 많이 한 아내에 대한 감사와 존경심 그리고 세 아이 자체가 나를 열심히 살도록 이끌고 있다. 물론 방향과 방법이 틀렸던 지난 과오때문에 지금 더 열심히 수정하고 있다.



이제는 바람 없이 연 날리느라 헛수고하는 남자가 아니라

바람 부는 날 연 높이 날리는 남자처럼 제대로 된 방법으로 사랑하며 가정 회복하려고 한다.

그리고, 계속 그 과정을 나누려고 한다.  


 출처:  UnsplashJonathan Bor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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