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알프로젝트 #8

큰사람

날이 감당 못할 만큼 더웠다가 이겨내지 못할 만큼 비가 왔기도 했습니다. 이런 변화무쌍한 상황을 견딜 수 있는 것은 길을 걸으며 만나는 깨알 같은 재밋거리 덕분이었습니다. 일, 사람, 가족 모든 상황 속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에 앞서서 대가 없이 저에게 주는 재미들이 매 순간을 견디는 박카스 한 병 같습니다. 작은 것이지만 ‘콩 한쪽도 나눠 먹는 것’ 같은 느낌으로 나눠 봅니다.





#1 박스

골목마다 크고 작은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각양각색의 메뉴와 알코올들로 사람들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느라 간밤에 또 시끌벅적했을 겁니다. 그런 시간을 보낸 음식점들이 어제의 왁자지껄을 놓아주고 조용한 아침을 시작합니다. 그 잠잠한 시간에 내놓은 쓰레기들도 있지만 어제 사용된 수많은 병들이 빼곡히 채워진 제각각 박스들도 보입니다. 브랜드마다 다른 색깔 박스를 쌓아놓으신 사장님의 센스도 재밌었지만 쌓인 모습들 자체가 보는 동안 재밌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상상력을 더해 보았습니다.


어제 바빴니?

어제도 골고루 일했구나.



알록달록한 유니폼 입고

경기 순서를 기다리는

축구선수들 같다.



색색깔의 너희들이

회색빛 도시 속의

건물들에게

빛을 주는 것 같다.


너희를 만난

이 아침!


사장님

감사합니다.

색색깔 맞춰서 놔주신 덕분에

웃고 지나갑니다.


By Dd






#2. 반송함

골목코너를 돌아 걷다 보니 우편함이 줄지어 달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눈에 띈 것은 그 철제 우편함 위로 정직하게 ‘반송함’이라 쓰인 플라스틱 박스였습니다. 투박하고 어설픈 듯하면서도 필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 플라스틱 박스와 그것을 설치하신 주민분을 생각하면서 지나갔습니다. 얼른 찍어놓은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잘못 온 소식을

네가 챙겨야 하는구나.



너는 뒤늦게 설치되었지만

제일 중요하네.



우체통들은 기쁜 소식을 전해주지만

너는 잘못 전달된 소식을 다시 전하도록

보관해줘야 하네



그러니까

어쩌면

네가 제일 중요해.



모습은 쫌 그래도,

너 덕분에

편지들이 다시 제대로 전달되네.

역시 네가 제일 중요해.



모습이 그렇다고

위기소침하지 말자.

네가

제일 중요한 일하니까

알지?


by Dd






#3 도장

요즘은 도장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회사 업무 중에는 각종 서류에 날인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인 생활에서는 이제 도장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길거리를 가다 보면 늘 보이던 것이 도장, 열쇠집이었는데 이제는 쉽게 볼 수가 없습니다. 더 시간이 흐르면 열쇠, 도장을 사용했던 것이 전해지는 이야깃거리가 될지도 모르고요. 길을 걷다가 도장 만든다고 내놓은 도장모양 간판이 정말 반가웠고 재밌었습니다. 그 재미가 사라지기 전에 얼른 상상해 봤습니다.


이게

얼마만이에요?



요즘은 어디서 일해요?

점점 일할 곳이 줄어들고 있네요.



요즘 젊은 친구들이 대신해서 일하느라

이제 거의 주력으로 일할 기회가 없네요.



이제 기념으로 사용할 날도 머지않았네요.

그래도

아직 우리와 함께 있으니까

너무 좋네요.



오랜만에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잊지 않으니까

서운해하지 말아요.



by Dd







#4 베어

출근 때는 항상 가게 안에서 쉬고 있는데 퇴근 때 보면 항상 가게 앞에 나와서 안내판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봅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모습을 하고 모두를 위해 자리 잡은 테디베어를 보면 늘 반갑습니다. 아직 들어가서 먹어보지는 못했습니다. 매일 오고 가면서 가족과 함께 와서 즐겨야지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얀 테디베어를 보고 즐거워서 상상하며 오늘도 지나갔습니다.



하이!

또 나왔네.



맨날

포즈가 똑같아.



팔이 얼마나 아플까

그런데

너로 인해 많은 손님들이

오 고갈테니까

안 할 수도 없겠어.



널 볼 때마다

즐거워

나도 가족과 올 생각에

설렌단다.



함께 올 때까지

상상하며 지나다닐 거다.



가게가 끝나고 주인이 퇴근하면


너는

안내판을 내려놓고

망토를 휘날리며

밤새 도로를 뛰어다니겠지


그렇게

상상해 본다.



by Dd







#5 입간판

길을 걸어 다니며 수많은 간판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못 보고 다닌 것인지 몰라도 입간판에 비옷을 입혀 준 것은 처음 봤습니다. 비가 와서 우산을 쓰고 신발이나 옷이 젖을까 봐 조심히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입간판의 모습을 보고선 잠시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충 걸친 비옷도 아니고 맞춤사이즈로 걸쳐진 것을 보면서 사장님의 센스와 함께 그 센스가 발휘된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맛있을까? 재밌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날도 있었습니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이 아니라



비가 오니까

보게 된

입간판

비옷.


만들어 입혀준

사장님 센스에

빵.


입혀준 그대로

입고서

제 할 일 하고 있는

입간판에

빵.



나는

터진 웃음을 못 참고

웃으며 서 있었다.



비가 와도

재밌는

하루.


by Dd






#6 미니 러버덕

지나다니며 다양한 깨알들을 만나느라 늘 즐겁습니다. 그래서, 두리번거리기에 종종 오해를 삽니다. 비가 오면 늘 조심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찍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오토바이 주인의 센스는 우주최강이었습니다. 오토바이를 늘 타고 있어야 하니까 선글라스도 씌워 주고, 헬멧도 장착해 줬고, 거친 마초이즘을 부여하기 위해 목걸이도 걸어줬습니다. 마침 비가 오는 터라 오토바이도, 미니 러버덕의 헬멧도 비에 젖었지만 하나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센스를 알아달라는 주인의 간절함을 내가 알아챈 느낌입니다. 그저 즐거웠습니다.



주인은

어디에?



주인대신

타고 있는

너를 보며



주인은

기분 좋게

의기양양하게

너와 함께

타고 다니겠다.



재미없는 세상

삭막한 세상 속에서



네가 건네주는 웃음이

최고였다.



오늘도

안전 운행해라.



by Dd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도 많았습니다. 비 피해도 많이 있었고요. 매일 아침 출근시작하며 비가 오는 날에는 비피해가 많이 없도록! 비로 인해 마음 아픈 사람들이 없도록! 마음으로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길을 걷다 보면 비가 오면 비 오는 대로 재미와 멋이 있고 해가 나면 쨍쨍거리는 날씨 속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웃음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다양한 것들을 느끼며 살고 있는 일상이 감사입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프훗’하면서 저처럼 웃으셨다면 저는 성공한 것입니다. 잘 찾아내서 나누었으니까요. 여기까지 읽어주시고 즐겨주셨음에 미리 감사드립니다.



늘 같은 길을 걷다 보니 이제 며칠쯤 새로운 동네나 다른 나라 도시를 다녀보며 깨알재미를 찾아보고 싶기도 합니다.





큰사람의 깨알 프로젝트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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