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이사가 진행되면서 신경 쓴 가전기기가 몇 가지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세탁기였습니다.
이사 오면서 모든 것은 신혼살림준비하듯이 아내가 원하는 것으로 전부 고르도록 제안했습니다. 저의 어설픈 제안이나 평가가 아내 의견을 훼손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도 했고요. 아내는 형편에 맞게 세탁기와 건조기가 포함된 세트를 구매했습니다. 아이가 셋이다 보니 수건, 겉옷, 속옷, 기타 등등이 매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여차하면 "입을 옷이 없어요. 어제 입은 옷 이뻐서 또 입고 싶은데 빨래통에 있어요.."등등의 푸념을 들었던 생각을 반영해서입니다. 베란다가 없는 환경도 반영해서 빨래는 건조대 말리는 것을 대신해서 아예 말려서 입기로 했고요. 그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어느 날, 아이가 학교에 다녀와서는 무심하게 던지는 말에 웃음이 빵 터졌습니다.
"애들이 나한테 냄새난대요?"
"뭐?"(내심 걱정되었습니다. 예전 기억이 떠올라서요..)
"애들이..'내 옷에서는' 향기가 난대요.."
아...(속으로 천만다행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군. 다행이네."
"지들 옷에서는 구린내, 땀냄새가 난대요."
"체육복 안 빨아 입나? 무튼 그래요.."
아이가 한 말을 아내에게 들려주면서 이제야 '푸하하' 웃었습니다. 아내도 '피식'웃었습니다.
"짜슥이.. 아직 젖비린내가 안 가시고 수컷냄새가 안 나는 거지. 물론 늘 빨아 입기는 하지."
"남편, 얼마나 빨래향기 신경 쓰는대요.."
"그렇지. 당신이 항상 향기 신경 써서 세제 사는 거 알아요. 그렇네.."
그렇게 말하면서 잠시 웃고 나서 혼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전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예전 기억.. 그래.... 그 기억...
그 기억들을 생각하면 울컥합니다. 옷을 둘 곳이 없어서 모두 쌓아둔 탓에 맨날 애들 옷에서 곰팡내나 장롱냄새가 났습니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인데 옷에서 의도치 않게 눅눅한 냄새가 났습니다. 좁은 곳에서 살다 보니 애들용 샴푸나 비누로 열심히 씻겼는데도 말리고 나면 눅눅한 곰팡내가 몸에서도 가시지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빠이자 남편으로써 미안함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파트에서 빌라 2층으로 이사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파트 짐을 많이 버리고 빌라로 들어갔는데도 여전히 짐이 많아서 공간이 부족했습니다. 아이 셋이 어리다 보니 보일러를 늘 틀어야 했고 아이들이 없을 때 잠시 환기를 시키고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아이가 온몸에 두드러기가 덮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병원을 황급히 다녀오게 되었고요. 원인은 빌라 외벽의 냉기와 방안의 온기가 부딪히는 벽에 곰팡이가 전체적으로 핀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 공기를 몇 달간 마신 아이의 몸에 두드러기가 심각하게 난 것입니다. 아이의 몸을 붙들고 아내와 함께 엉엉 울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사를 나와서 처가살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몇 차례 겪으면서 우리 집이 제대로 생기면 아이들에게서 곰팡내가 나지 않도록 해주겠다. 아이들 옷이 늘 상큼한 향기가 나게 해주고 싶다 가 저의 소원이자 아내의 소원이었습니다. 8년 만에 그 소원이 이루어지고 세탁기와 건조기를 산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세탁기와 건조기를 들여다 놓고 사용하기 시작하니까 아이들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 몸에서 눅눅한 냄새나 칙칙한 느낌은 없었습니다. 늘 뽀송하고 은은한 향기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큰 아들의 옷에서도 칙칙한 냄새가 날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두 딸들 옷에서도 고운 옷색깔처럼 은은한 향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꼭 필요한 옷은 다음날 바로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걱정하거나 "내 옷 빨래통에 아직도 있어요. 엉엉..." 하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들이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애들이..'내 옷에서는' 향기가 난대요.."라는 말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감사'라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어른이 그런 상황일 때는 "어쩔 수 없으니 감당하자."라고 할 수 있는데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런 상황을 겪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기본적인 것을 해주지 못하는 미안함'이 앞설 때가 많습니다.
큰아들과 '옷 향기'얘기를 나누면서 두 가지가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첫째,
아직 중학생인 아들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런 것들을 학교 다녀와서 웃으면서 얘기해 줄 때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중2병이 본격 오고 나면 쉽지 않을 수 있지만 지금 이 순간!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아이들 옷과 몸에서 곰팡내와 눅눅한 냄새가 나지 않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해맑게 웃어주는 아이들의 머리와 몸, 옷에서 그런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면서 버텨야 하는데 아이들이 같이 감당해야 하는 시간들이 너무 미안했었습니다. 일단 이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어서 감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감사를 할 수 있다는 자체로도 감사했습니다. 물론 돈이 많아서 구매한 것은 아닙니다. 가장 필요한 것을 적정가로 잘 구매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구매 못한 것도 많습니다. 이사 왔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져오고 부족한 것은 구매해서 '시작'하는 것이 당연한 순리입니다. 그렇지 못한 상황이기에 당장 필요한 것은 억지로 구매하고 당장 급하지 않은 것은 차차 상황이 나아질 때마다 하나씩, 매월 조금씩 사면서 채워나가기로 했습니다.
아이의 말 때문에 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다행이다.'라고 한숨 돌렸던 '아들 옷 냄새'를 적어봤습니다. 전전긍긍하는 삶 속에서도 아이들과 함께 있기에 감사가 흘러나올 수 있는 지금에 감사합니다.
제 글을 여전히 읽어주시는 작가님들, 가끔 공감과 격려가 가득한 진심의 댓글들을 달아주시는 작가님들께 여전히 미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