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패션회사에 다닐 때였습니다. 점심을 먹고 길가에서 쉬다가 선임의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래된 나이키 운동화였습니다. 한정판 고급버전이 아니라 진짜 오래 신어서 누런 신발이었습니다.
"새 거 좀 사신 거요. 꽤 오래되었나 봐요."
"괜찮다. 너도 결혼해 봐라."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나 봐라."
"에이..."
저는 속으로 '바보'라고 했습니다. '무능하기는, 자기 운동화하나 제대로 못 사신고 다니면서..'라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렇게 대화는 끝났습니다. 그 후로 선임은 이직했고 저는 더 일하다가 퇴사를 하면서 더 이상 만날 기회는 없었습니다.
결혼하고 10년이 지난 어느 즈음에,
아이들과 운동화를 사러 아웃렛에 갔습니다. 아이들이 발이 갑자기 커져서 운동화를 급히 사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브랜드 운동화 진열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디자인을 고르기도 하지만 가장 합리적인 가격에 아이가 좋아할 만한 디자인을 찾아내느라 진열장을 계속 돌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문득 예전에 선임과의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저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급여를 받고 있을 때면 아내와 아이들에게 더 좋은 브랜드와 제품들을 사주려고 했습니다. 저에 대한 것은 살짝 뒤로 미루고요.
아내는 그런 저의 마음을 알기에 늘 본인도 최저가를 찾아서 이쁘지 않아도 입고 편하지 않아도 신고 다니는 걸 택했습니다.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해도 남편이 그렇게 하는데 미안해서 그럴 수 없다고 하고요. 그런 마음을 알기에 아내가 좋아하는 브랜드 제품을 눈여겨봐 뒀다가 갑자기 사서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행동들 모두 사실은 한정적인 수입과 어마무시한 지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부모의 행동들과 별도로 아이들은 지금 나이가 주변의 친구들 따라서 모두 하고 싶어 할 때입니다. 친구들 모든 것이 다 부러운 때이기도 하고요. 아이가 아이폰을 가지고 싶어 했을 때,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들 손에 들린 아이폰 시리즈를 모두 맞히고, 길에 지나가는 언니들 아이폰 버전을 모두 맞히면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하고 싶어 하길래 눈에 그것만 보일까?'라며 웃었습니다. 아이들은 지금 그런 시기이기 때문에 원하는 걸 못하게 되면 "나는 왜 못해요?"를 연발하며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로 엄마 아빠를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런 아이들을 이해하고 이해시키면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브랜드 제품들을 구매해주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최고급 브랜드는 아니고 아웃렛 매장에 있는 할인제품을 구매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아이 얼굴에는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면서 '너무 좋아!!'를 외칩니다. 아이들은 실용적이고 저렴한 것을 잘 찾아서 입고 신고 다니는 것도 괜찮은 삶이라는 것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립니다. '마음 맷집'도 약하고요.
반면에 엄마 아빠는 '마음 맷집'을 한껏 키워서 살고 있습니다. 저도 정신을 차렸습니다. 현실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패션을 전공했다고 요란하게 옷을 입고 시즌 유행을 챙겨 보면서 즐기던 모습은 일장춘몽처럼 날려 버렸습니다. 아내는 덩달아 이쁜 옷, 예쁜 구두, 딸랑거리면서 우아한 귀걸이, 원하는 헤어스타일은 포기했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아내와 저는 점점 더 저렴한 것을 찾아서 구매합니다. 깨끗이 빨아서 냄새 안 나게 입고 다닐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지내고 있고요. 이런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진열장 앞을 분주하게 돌고 있는 동안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나도 바보가 되었다."
"바보가 될 줄 모르고 선임을 보고 바보라고 중얼거렸던가."
지금. 대화하면서 마음으로 '바보'취급했던 선임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아이 셋은 너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친구들처럼 비슷하게 살도록 해주다 보니 아내와 저는 '브랜드 제품들을 걸쳐 본 적이 언제인가?'라고 생각할 만큼 우선순위를 바꾸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가진 것을 오래도록 사용하도록 노력 중이고요.
그런 삶이 억울하지는 않습니다. 저의 역량에 의한 현실에 맞춰서 살다 보니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이니까요. 다만 아내와 아이들이 선택한 삶이 아닌데 그렇게 지내고 있는 것에 미안함은 늘 가지고 삽니다.
아이의 운동화를 사려고 돌아다니다가 예전 선임 운동화가 생각났습니다. 그 생각 덕분에 '깨달음'을 진하게 느낀 어느 날이었습니다.
결혼하면 "네가 원하는 거 하나도 할 수 없다." "결혼 전에 실컷 해라."라는 말들을 일하면서 많이 들었습니다. 결혼하면 쉽지 않으니까 "신혼여행은 꼭 무리해서 원하는 곳을 다녀와라."라는 말도 들었고요.
결혼을 했고 현실을 살다 보니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생기는 것은 사실입니다. 수중에 가진 돈을 알기에 아이들을 우선순위로 두느라 그런 것도 있고요. 이제 결혼한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배제하다 보면 안 하게 되는 것도 많습니다. 저는 지금 취미생활을 가지지 않습니다. 가질 형편이 안 되는 것이 맞고요.
그렇게 못하는 것이 많아진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결혼 전에 원하는 대로 살고 돈 쓰고 지낸 시간이 후회가 되고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 시간들을 아끼고 돈을 아꼈더라면 지금 결혼생활동안 아내와 아이들에게 더 좋은 것들을 많이 해줄 여력이 있을 텐대라는 후회입니다.
결혼하면 '못 하는 게 많다.'라는 말은 맞지만, 못 하는 게 많아지는 만큼 '얻게 되는 행복과 보람'도 커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못 하는 게 있으면 좀 어때?"라고 말하고 싶기도 합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돈을 좀 더 벌어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원하는 것을 조금 더 해주고 싶은 게 변하지 않는 아빠의 마음입니다.
예전 어릴 때는 구멍 난 양말을 덧대서 꿰맨 양말을 신도록 했던 어머니를 극도로 원망했습니다. '창피해서' 신발 벗고 들어가는 장소는 가능하면 피했습니다. 그렇게 양말을 덧대서 꿰매 신겨야 하는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지내야 했을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했습니다. 저보다 더 많이 꿰매서 신고 있던 어머니의 양말을 몰라봤습니다. 이제야 현실적인 삶에 대해 정신을 차렸습니다. '마음 맷집'이 길러져 가고요.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브랜드 옷이 아니더라도 아무렇지 않고,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고, 구제가게에서 사더라도 전혀 창피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현실을 직시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의연하게 지내주는 아내를 보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존경심이 샘솟았습니다.
이 땅의 어머니들을 존경합니다.
누군가의 아내와 엄마로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아내분'들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사랑스럽고 감사한 건
제 아내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야 '마음 맷집'키운 세 아이 아빠 올림.
바람 없이 연 날리는 남자 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