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성을 쌓는 자 망하고 길을 내는 자 흥한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계획에도 없던 리투아니아 한인 치대생들을 만나고 기분만 불쾌해졌다. 그러나 그들이 내게 모른척하고 그냥 지나가 주시죠,라고 한다고 그냥 지나칠 내가 아니었고 나는 가능한 많은 정보를 얻으려 했다.
다시 빌뉴스 학교 치대 Department로 찾아가 현지인, 외국인 치대생들을 만나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외국인은 졸업 후에 어떻게 할 계획인지, 졸업을 하면 자격증을 딸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지, 아니면 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지부터 시작해 전반적인 이 나라의 라이프 스타일이나 주변 환경은 어떤지, 각각의 나라와 비교했을 때 살만 한 것 같은지 등을 물어봤다. 리투아니아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말이지만 이곳 언어 시험을 봐야 한다. 빌뉴스의 치대 수업들은 영어로 진행이 되지만 우리가 미국에 가서 영어를 배울 때 ESL 클래스를 따로 듣는 것처럼 이곳에도 그런 언어 수업이 따로 있었다. 졸업을 하고, 자격증을 따고 일을 하기 위해선 이 두 가지 자격 외에 언어의 자격 또한 필요한 것이다.
이곳에는 레바논과 이스라엘, 터키에서 온 중동 친구들도 많았고 다른 EU 국가들에서 온 친구들도 많았다. 해외 대학교를 돌아다니면서 느낀 점 중 하나는 우리나라만큼 대학 입학이 힘든 나라가 많이 없다는 것이다. 보통 입학은 쉽지만 졸업은 굉장히 어려웠고, 내가 다녔던 대학 또한 그와 마찬가지였다. 도태되고, 떨어져 나가는 수가 어마어마했고 입학생의 30프로 정도만이 무사히 졸업을 했다. 이곳도 마찬가지였고 이들에게 한 가지 더 주어진 과제는 치의학을 공부하는 시간 동안 리투아니아어를 일정 레벨까지 마스터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며칠에 걸쳐 학생들과 교수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나는 형과 P가 머물고 있는 우테나라는 도시로 잠시 가기로 했다. 형과 P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좁았고 허름했다. 둘은 그 근처에 있는 어떤 전문대에서 학점을 따기 위해 수업을 듣고 있었다. 목표는 내가 다녀왔던 빌뉴스 치대로 다시 편입을 하는 것이었는데 그러려면 학점을 더 취득해야 한다고 했다. 때문에 이렇게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 자취방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삶이 삶이 아니었다.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고 옆방에는 매일 대마 파티를 하는 학생들이 살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자주 술에 취해 소리를 질렀고, 복도를 나다녔다. 대마 냄새가 복도에 흥건했다. 나는 형과 P에게 여기서 학점을 따면 확실히 편입을 할 수 있냐, 어디서 얻은 정보냐고 물었고, 둘은 어물쩡 대답을 했다. 수업은 자주 캔슬됐고 그럴 때마다 집에서 유튜브나 게임을 하는 시간이 많다고 했다. 우린 많은 얘기를 했고 내 생각에 그런 학교에서 더 머무는 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둘도 벌써 그곳에 있던 시간이 1년 이상이었고 그런 생활에 지쳐있었다. 나는 캐나다와 빌뉴스에서의 일을 들려주었다. 앞으로 나는 여러 국가들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으고, 적당한 나라가 있으면 그곳에 정착할 것이다. 둘도 결정을 하라. 제대로 정보를 확인하고 이곳에 남아 이 생활을 지속하던지, 아니면 나랑 같이 가던지. 그것도 아니면 귀국을 하던지.
우리는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며칠이 지난 후 형은 나와 함께 가기로 했고, P는 조금 더 생각해 본 후 결정하기로 했다. 우리가 빌뉴스가 아닌 '카우나스'에 있는 대학으로 한번 더 가보려고 했기 때문에 그 후에 결정을 한다고 했다. 어찌 됐든 둘의 의견도 이곳에 머무는 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결정을 한 우리는 빠르게 움직였다. 집 계약을 마무리하고, 짐을 쌌다. 그리곤 카우나스라는 도시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카우나스에 있는 lsmu 대학에 들러 비슷한 절차를 밟았다. 교수들을 만나고 학생들을 만났다. 그곳의 교수들은 조금 더 호의적이었다. 한 교수와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요는 이것이었다. "왜 애초에 자격증을 주지도 않는 나라로 갔느냐?" 나도 그 현실이 너무 짜증 나고 속 터지지만 어쩔 수 있겠나. 시간은 이렇게 지났고 현실은 그대로인데. 그들은 나 같은 케이스를 신기해했다. 차라리 형과 P의 케이스는 그나마 괜찮았다. 편입을 하면 됐으니까. 반면 나는 이미 졸업을 했는데 왜 이곳에 굳이 다시 와서 편입을 하냐는 것이다.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캐나다 이야기까지 흘러 들어갔고, 결국 마지막 질문은 위에 있는 저 질문으로 끝이 났다. "그러게 거길 왜 갔어?"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나도 내가 이런 상황이 펼쳐질 줄 알았다면 그때의 나를 뜯어말렸겠지.... 후.
형과 P는 편입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시기상으로 맞지 않으니 몇 개월을 기다렸다가 다음 연도에 다시 와서 편입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나는 자기들도 모르겠단다. 이런 케이스가 지금까지 있질 않았어서 헤드와 논의를 해봐야 한단다. 수많은 이야기를 더 했고, 이러나저러나 어찌 됐든 지금은 편입이 불가하니 내년까지 죽치고 앉아서 기다릴 바에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게 답이었다. 우리는 다시 결정해야 했다. 나는 밑의 나라 폴란드로 간다고 했고, 형도 나와 같이 가기로 했다. P는 귀국해서 내년에 있을 편입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본다고 했다. 형과 나는 폴란드로 가는 야간 버스를 예매했고, P는 귀국행 비행기를 예매했다. 생각이 많은 밤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깜깜했다. 그러나 그 깜깜함 속으로 들어가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한 발을 내밀고, 가보기로 정했다. 칭기즈칸의 말이 생각났다. '성을 쌓는 자 망하고 길을 내는 자 흥한다'. 그 깜깜함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