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나, 잘 가고 있는걸까?

인생이 다 그렇지 뭐

by 조르바


폴란드 아우슈비츠를 떠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헝가리에는 세멜바이스 대학, 페치, 세게드, 데브레첸 대학에 치의학과가 있었고 나는 세멜바이스 대학을 먼저 찾아가 보기로 했다. 혹시나 메일을 보낸 곳에서 연락이 와있을까 했지만 메일은 와있지 않았다. 단지 페이스북으로 연결된 네덜란드 의사한테 연락이 와 있었는데, 그 또한 외국인들에 관한 편입 시스템에 대해선 알 길이 없다고 했다.


헝가리는 작년에 왔었고, 이번이 두 번째다. 언제 와도 평화롭고 멋진 곳이다. 대학을 찾아가기 전에 먼저 도시를 둘러볼 마음으로 겔레르트 언덕을 찾았다. 부다페스트 전경이 모두 다 보이는 언덕. 하- 좋다! 언덕에 앉아 부다페스트의 엔틱 한 도시를 바라보고 있자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네팔 지진, 캐나다에서의 강제추방, 리투아니아의 한인들, 아우슈비츠. 짧은 시간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구나. 내 친구들은 미국 국가고시 1차 NBDE 합격을 하고 2차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내게도 거기서 그러고 있지 말고 미국으로 넘어오라고 말한다. 그게 말처럼 그리 쉬우면 내가 지금 이 언덕에 이렇게 앉아 있겠냐고. 그들이 내심 부럽다. 평탄한 길. 앞이 보이는 길. 목표가 보이는 길. 사실 그들도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름의 문제를 안고 있을 테고, 국가고시 준비를 하느라 얼마나 하루하루 전쟁이겠는가(말하는 걸 들어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지만).



아무튼 그들과 내 처지를 비교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 누워 눈만 끔벅끔벅거릴 때도, 바르샤바로 이동하는 야간 버스 안에서도, 아우슈비츠의 수용소를 거닐 때에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다. 나 과연 잘하고 있는 걸까..? 맞는 길로 가고 있는 걸까.


앞이 컴컴하다. 어떨 때는 흐리멍텅하다. 내가 가고 있는 길에 대한 의심이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쳐들고 관자놀이를 쫀다. 무너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버티는 정신은 하늘을 떠받치는 아틀라스와도 같다. 만약 아틀라스의 정신이 무너졌다면 하늘 또한 무너졌을까.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정신은 얼핏 단단해 보이지만 누군가 그 속을 톡- 하고 건드린다면 금세 둑이 터져버릴지 모른다. 사실 세상살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각자의 길을 묵묵히 잘 걸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어떤 이의 속은 이미 곪아버렸을지도, 어떤 이의 속은 터지기 일보 직전일지도 모른다. 서로의 속이 문드러져 가고 있는지, 화산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인지, 마음속 내면을 투명하게 비춰주는 시대가 온다면 우리는 서로를 더 안아주고, 토닥 거려 줄 수 있을까? 그때는 힘들면 힘들다고, 지치면 지쳤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될까?




언덕에서 내려와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세멜바이스 대학교를 방문해 현지인과 외국인 치대생, 교수들을 만났다. 헝가리 의, 치대야 워낙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어 해외 의사를 꿈꾸는 학생들에겐 기회가 되기도 한다. 직접 이들과 이야기를 해보니 인터넷에 나와 있는 것만큼 그렇게 많은 돈은 들지 않는다고 한다. 알아본 바 학비 약 1700에 생활비 2000, 연간 4000 정도가 들 줄 알았는데 막상 살아보면 물가가 그리 비싸지 않아 생활비를 더 아끼면서 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학비나 생활비 따위가 아니다. 그 누구도 나 같은 케이스를 본 적이 없단다. 아니, 졸업을 했는데 왜 다시 편입을 하려고 하는 거야?라는 질문을 또 받는다. 리투아니아에서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설명을 한다. 이러이러해서, 저러저러해서, 그래. 나도 답답해 죽겠어. 꼭 편입이 아니라 자격증을 딸 수 있는 시험이라도 볼 수 있냐는 거야. 어찌 됐든 자격증을 딸 수 있는 시험만 볼 수 있다면 학교를 조금 더 다니든 상관없으니까 그거라도 알려주라. 음.. 미안하지만 그건 잘 모르겠네. 좀 기다려봐.


형의 경우, 편입은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기야 하겠지만 길이 보인다. '가. 능. 성' 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는.. 나느은... 학생이고 교수고 행정 담당이건 간에 모른다는 답변만 나온다. 혹은, 알아볼 테니 이메일을 달라. 네가 가져온 서류,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 그거라도 놓고 가라. 연락 주겠다. 대체 언제? 얼마나 걸리는데? 그건 우리도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지친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세체니 다리를 걷는다. 숙소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나 같은 케이스는 아무도 없을 거야. 그렇겠지? 누가 이런 그지 같은 상황에 놓이겠어. 나 같은 재수 없는 놈이나 이러는 거지. 형과 맥주를 마셨다. 인생이 뭘까요 형. 인생? 몰라. 그냥.. 이렇게 뭣 같은 게 인생인가 보다. 정신은 술에 흐트러지고, 지친 마음은 괜히 부다와 페스트를 향해 원망 섞인 소리를 내지른다. 결국 이게 내 인생이고, 내 업보고, 내 실패고, 내 실패고... 내 실패야. 나는 실패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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