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치 않은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익숙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공항 냄새, 간간이 들려오는 한국 방송, 한국말, 편의점, 바나나우유. 아, 정말 한국에 도착했구나. 실감이 났다. 쿠바로 떠난다던 내가 감옥에 갇혔고, 한국으로 추방당했다는 걸 알리자 많은 분들이 연락을 주셨다. 친구들은 출소를 축하한다며 순댓국집에서 두부를 선물로 주었고, 출소 축하합니다 라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순댓국밥 주인아주머니도, 옆자리에 앉은 회사원들도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그렇게 2주간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PCT 시작 전 모습
혹시나 쿠바와 캐나다에서의 일을 문제 삼을까 싶어 미국 이민국을 지날 때 가슴 조리며 인터뷰를 했다. 직원은 PCT 퍼밋과 비자를 보더니 6개월을 걷는다고? 대체 왜?라고 물었다. 나는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사람들을 만나 PCT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걸 왜 걸어?, 시간 아까워, 취업해야지, 여행은 그만할 때 되지 않았어?' 등등 여러 이유로 나를 말렸다. 그때마다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냥, 하고 싶으니까'. 친구들은 나를 보며 혀를 찼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떤 일을 할 때의 동기는 중요하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이 생길 때마다 동기를 찾는 일이 '무조건' 필요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꼭 이유가 필요한가. 그냥 가슴이 뛰고, 설렌다면 아무런 동기가 없더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내겐 PCT가 그런 일이었다.
PCT는 6개월이라는 시간을 걷는 만큼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 매년 3000명 이상의 하이커가 도전하지만 완주율은 20프로 정도라고 한다. 장비가 부실하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자칫 잘못하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텐트, 침낭, 가방, 트레킹 폴, 스토브, 가스, 정수 필터기, 반팔, 반바지 하나, 속옷 하나, 경량 패딩, 5일 치 음식을 준비했다. 보통 머쉬 포테이토나 라면, 멕시코의 건조 쌀밥, 또띠아, 참치, 누텔라, 건조과일, 식빵, 트레일 믹스 초콜릿, 에너지바 같은 것을 먹는다. 5일 치 음식과, 한 번 걸을 때 적게는 3리터에서 5리터의 물을 가방에 넣고 갖가지 장비들과 함께 걸어야 하니 무게는 15킬로에서 20킬로 이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면 가벼운(대신 비싼) 장비를 사용하는 게 좋고. 음식은 가능하면 가볍게 하는 것이 좋다. 한번 트레일에 들어가면 하루에 20~50km 사이를 걷는다. 3일 내지는 5일 동안 산행을 이어가며 길어질 땐 일주일까지 이어질 수 있다. 산행을 할 때는 텐트 생활을 하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나, 어딘가에 고여있는 물, 말들이 먹는 물을 정수해서 마시게 된다. 텐트와 침낭은 한국 제로그램 사장님의 후원으로 저렴한 값에 구할 수 있었고, 스토브나 가방, 트레킹 폴 등은 샌디에고의 REI 아웃도어 매장에서 구매했다.
PCT를 걷는 사람들을 PCT 하이커라고 부르지만, 우리끼리는 Hiker Trash(노숙자와 비슷한 개념),라고 부른다. 캘리포니아와 오레곤, 워싱턴이라는 긴 길을 매년 지나는 하이커들이 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우리에게 Respect을 보내고 좋아해 준다. 마을에 도착해 길을 걷고 있으면 차에 탄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Hey! Are you a PCT hiker?라고 묻는다. 맞다고 하면 우리 집에 자리 남는데 자고 갈래? 라던가 먹을 것을 사주고 차를 태워주기도 한다. 이런 분들을 Trail angel이라고 부른다. 마을에서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물이 없이 30킬로를 걸어야 하는 사막 구간이나 곳곳에 하이커들이 통과하기 어려운 지점에 천막을 크게 쳐놓고 초콜릿, 콜라, 아이스크림, 음료수, 치킨, 과자 등을 준비해 놓기도 한다. 뜨겁고 힘든 사막을 걷다가 콜라나 물이 들어있는 아이스박스를 만난다면 오아시스를 만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깜짝 선물을 우리는 Trail magic이라 불렀다. 이들의 이런 도움은 순전히 머나먼 길을 두 발로 걷는 이들에 대한 존경 때문에 이루어진다.
출발지점인 샌디에고에 도착하면 Scout & Frodo라는 트레일 엔젤이 있다. 이 노부부는 PCT를 처음 시작하는 하이커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트레일을 걸으며 조심해야 할 주의사항과 이 길에서 즐길 수 있는 PCT의 문화를 알려주는 트레일 엔젤이다. 장거리 하이킹 경험이 없는 하이커들은 이들 부부의 헌신이 큰 도움이 된다. 나 또한 이곳에 3일간 묵으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미국, 캐나다, 독일, 프랑스, 영국, 이스라엘, 브라질, 홍콩, 일본, 한국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기소개를 하고 어떻게 이 길을 걷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앞으로 길에서 만난다면 잘 부탁한다며 출발하기 전의 소감을 나눴다.
영어 한마디 못하는 프랑스 친구
PCT 지도, Campo - 출발지점
스콧네 집에 걸려있는 PCT 지도에서 우리의 현재 위치는 제일 아래였다. 이 길을 내일부터 걷기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순례길을 걸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긴장감이 얼굴에 서렸다. 우선 하고 싶어 오긴 했는데 과연 끝낼 수나 있을지 미지수였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기대, 설렘, 긴장과 두려움이 섞인 밤이 지나 새벽 5시가 됐다. 하이커들이 부스럭대며 하나둘씩 일어났고, 첫날의 시작인 멕시코 국경으로 향하기 위해 쌀쌀한 새벽 공기를 털어냈다.
오전 7시, 멕시코 국경 앞에 놓인 PCT 비석 앞에 섰다. 20여 명의 하이커가 차례대로 사진을 찍는다. 비석에 올라가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점프를 뛰기도 한다. 우리 앞 뒤로 다른 20여 명의 하이커들이 있다. 그렇게 4월 초-중순이 되면 매일매일 전 세계에서 온 하이커들이 비석 앞에 서서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기나긴 대장정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의 기분을 뭐라 표현해야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우리를 감쌌다. 한 발을 내밀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뿌옇게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