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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Oct 05. 2020

#58. 걷는 것이 모든 일상이 되었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PCT에는 각자의 고유한 Trail name이 있다. 트레일을 걷는 기간 동안 불려지는 이름인데 자신이 직접 지을 수도 있고, 남들이 지어줄 수도 있다. 나는 지독한 길친데 친구들은 항상 나를 보고 길치가 어떻게 저렇게 싸돌아 다닐 수 있는지 신기해하곤 했다. 그렇게 나는 첫날부터 길치와 아주 잘 어울리는 트레일 네임이 생겼다. PCT비석 앞에서 사진을 찍고 내가 당차게 걸어갔던 뱡향은 멕시코의 국경 방향이었다. 300미터 정도를 걸었을까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Hey!!!! It`s this way!!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멀리서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라며 손짓을 하고 있다. 아놔.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다시 돌아오니 웃으며 묻는다. 


너 멕시코 장벽 넘으려고?(웃음)


그들은 출발지점에 막 도착해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하이커로 보이는 누군가가 장벽을 넘으러 가는 것 같았다며 불렀다고 했다. 나는 고맙다며 한바탕 웃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엔 제대로 된 방향으로 걷는(것 같았는)데 10분쯤 지났을까 다시 또 뒤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Hey!!! Its not that way! Its this way!!


이번에는 하이커들을 픽업해주고 마을로 돌아가던 현지인 아저씨가 소리쳤다. 길을 다시 잃을 뻔했다. 아놔. 뒤에서 아까 사진을 찍던 하이커 무리가 웃으며 말을 건다.


너 길을 자주 잃는구나

응. 나 좀 심한 길치야(웃음)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PCT에 도전하던 사람들은 손수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았다. 길을 걷다가도 한참을 멈춰 서서 손가락을 짚어가며 길을 찾았다. 지금은 PCT에 관한 앱이 여럿 나와있다. 그중 '것훅(Guthook)'이라는 앱과 하프 마일(Half mile)이라는 앱이 있다. 것훅은 유로기 때문에 여러모로 편리하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앱이다. 하프 마일은 무료에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방향만 제시해주는 앱이다. PCT 초반의 사막 구간은 길이 잘 나있기 때문에 굳이 앱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아무런 앱도 깔지 않고 걸었다. 길치의 최대 문제점은 길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앞으로 간다는 점이다. 무슨 자신감인지 하여간 쓸데없는 근자감 때문에 매번 길을 잃고 또 잃는다.


그렇게 나는 PCT를 시작하자마자 1시간 내에 길을 두 번이나 잃었다. 뒤에서 따라오던 미국 하이커들이 내게 트레일 네임이 있냐고 물었다. 


아니, 아직 없어. 

그럼 우리가 하나 지어줄게, 어때? 

그래. 뭔데? 

This way(웃음)

하하하하하


그렇게 내 이름은 This way가 됐다. 길을 걸으며 만나는 하이커들과 트레일 네임을 소개할 때면 이름 안에 어떤 스토리가 들어있는지, 어쩌다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됐는지에 대해 궁금해하곤 한다. 홍콩에서 온 72살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Gps를 볼 줄 몰라 무조건 북쪽을 향해 걷는 할아버지였다. 때론 길을 잃었고, 어느샌가 멀리서 보면 절벽을 기어오르고 있던 할아버지다. 때문에 동료 하이커들이 crazy72라는 트레일 네임을 지어줬다. 그 밖에도 Fire ball, Monk, Spider bike, Moist 등이 있었다.





PCT의 첫 구간, 남캘리포니아의 사막은 황량했고 뜨거웠다. 18kg나 되는 가방의 무게는 어깨를 짓눌렀다. 처음 PCT를 걷는 대부분의 하이커들은 융통성 없이 과한 장비, 과한 음식을 챙기곤 한다. 3일 정도를 걷다 보면 필요한 게 뭔지, 필요 없는 게 뭔지 바로 알 수 있게 되는데,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은 모조리 버리거나 어딘가로 보내 놓아야 한다. 


첫날부터 나는 여유 있게 걸었다. 가방이 무겁기도 했고, 물을 몇 리터나 가지고 다녀야 하는지 감이 안 왔다. 조금 걸어본 후에 결정하기로 하고 여유롭게 걷자고 생각했다. 다른 하이커들은 재빨리 앞서 나갔다. 나는 느긋하게 걷다가 점심시간이 되자 커다란 바위 밑 그늘에 앉아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트레일에서 먹는 첫 식사였다. 지나가는 이는 없었고, 사방이 고요했다. 새소리와 부글부글 라면 끓는 소리만 났다. 신라면 특유의 매운 냄새가 퍼졌다. 라면을 먹고 바위 그늘에 누우니 잠이 솔솔 왔다. 잠깐 자고 일어나려 했는데 3시간이 지나있었다. 오후 5시였다. 망했다. 너무 많이 쉬었다. 짐을 빠르게 싸고 다시 걸었다. 해가 지고 있어 정오보다는 훨씬 선선했다. 걷기 딱 좋은 날씨였다.


열심히 3시간을 더 걸었다. 밤 8시가 되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져 그만 걷기로 했다. 주위는 온통 컴컴했다. 첩첩산중에 나 홀로 똑 떨어져 있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여. 그냥 아무 데나 텐트를 치고 자면 되는 건가? 위험하고 아니고를 따지기엔 몸이 너무 고단했다. 모르겠고 그냥 빨리 자고 싶어 텐트를 쳤다. 텐트 치는 법을 미리 연습해왔는데 잘 되질 않았다. 어두워서 뭐가 뭔지 보이지도 않았다. 겨우겨우 텐트를 완성했지만 밥을 먹을 힘도, 더러운 먼지를 씻어낼 힘도 없었다. 심지어 양치도 하지 않고 바로 누웠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당분간은 적응기간이 필요하리라. 적응하면 그래도 좀 낫겠지,라고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야생에서의 첫날이 그렇게 흘러갔다.


오전 5시에 알람을 맞춰놓고 잤다. 5시에 눈을 떴지만 침낭 속에 꾸물거리느라 그 안에서 10분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잠깐 지퍼를 내리고 팔과 얼굴을 내밀어봤다. 아직은 적응되지 않은 차가운 새벽 공기가 텐트 안에 감돈다. 아직 일어날 시간은 아니구나, 침낭 지퍼를 닫고 머리와 팔을 다시 집어넣는다. 그렇게 20분을 꾸물거리다 30분이 돼서야 침낭 밖으로 기어 나온다. 알은 온몸에 배겨있다. 새로 산 신발을 신고 산행을 하니 발 뒤꿈치에 물집이 생겼다. 근육을 움직일 때마다 끼익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전날 양치를 하지 않았으니 찝찝하기 그지없다. 양치부터 하고 요리를 했다. 메뉴는 멕시칸 라이스였다. 그런대로 먹을만했다. 텐트 안은 아직 춥다. 하지만 일어나야 한다. 짐을 다시 싸야 하고, 다시 걸어야 한다.  







일상은 피시티를 시작한 이후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텐트와 침낭을 집어넣고, 아침을 먹기 위해 가스와 버너를 꺼내 물을 데우고 라면을 끓인다. 때가 잔뜩 낀 손으로 국물 한 방울 남김없이 먹어 치우고 어제저녁에 물을 얼마나 챙겼었는지, 다음 물을 뜰 수 있는 장소까지 몇 리터가 남았는지 계산한다. 그리고 짐을 주섬주섬 싼 후에 다시 걷기 시작한다. 걷는 것이 모든 일상이 되었다.


하루 10시간을 걷고 나면 4-5리터의 물과 음식들을 포함한 가방의 무게 때문에 어깨가 부서질 듯 아프다. 다리는 후들후들 떨린다. 그러고 나서 캠프 사이트에 도착하면, 어떤 날은 피곤하고 지친 몸으로 저녁을 먹고, 일기를 쓴 후에 바로 잠이 든다. 어떤 날은 같이 걷는 친구들과 함께 캠프 파이어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옹기종기 모여 캄캄한 밤하늘 아래, 저녁을 만들어 서로 나눠먹기도 한다. 더 이상 밤늦게 누군가와 카톡을 하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Sns를 뒤적거리지 못한다.


걷다 보면 힘들 때가 정말 많지만 광활한 자연과 웅장히 버티고 서있는 산맥들에 경이로움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가만히 멈춰 서서 앞에 펼쳐진 대자연을 멍하니 바라본다. 대자연 앞에 선 한없이 작은 존재의 연약함을 느낀다. 점점 이 길에 적응을 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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