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다 그렇지 뭐
Pct 마지막 구간인 워싱턴에 들어왔다. 512 mile, 약 820km만 더 걸으면 된다. 길고 길었던 대장정이 끝날 기미가 드디어 보이기 시작했다! 워싱턴은 피씨티의 꽃이라 불리기도 하고, 헬싱턴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만큼 아름다우나 난이도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했다. 힘들어 봤자 얼마나 힘들겠어, 다 비슷하겠지 라고 생각하고 앱에 나와있는 경사도를 봤는데 마치 주식 차트에서 나온 장대양봉 마냥 빨간 오르막이 치솟아 오르고 내리고 하는 게 보였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들어가야 했다.
다른 구간들에 비해 훨씬 수월했던 오레곤 해변을 걷다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는 산행을 다시 시작하니 죽을 맛이었다. 다시금 산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물을 많이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됐고, 피씨티에 적응한 지 5개월 차에 접어들다 보니 다리 근육이 튼튼해져 하루 종일 걸어도 무리가 오지 않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한 시간에 보통 3~4킬로로 갔다면, 피씨티에서는 5~6킬로까지도 갈 정도로 빠르게 걸을 수 있었다. 워싱턴은 죽어라 고생한 만큼 황홀한 풍경을 자주 선물해주곤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고개를 힘겹게 오르는 순간 고개 밑에 보석처럼 펼쳐져있는 대자연은 우리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의 무게는 상상 이상이었지만 보상을 받는 순간 그 고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로지 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탄성만이 대자연의 공기와 맞닿았을 뿐이다.
9월 중순이 되자 비와 눈이 미친듯이 내리기 시작했다. 시간을 재촉해야 했다. 조금만 늦어져도 캐나다의 국경이 눈으로 막혀버릴 수가 있다. 힘내서 걸었지만 눈과 비는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온몸을 적셨고 쉴 새 없이 걷게 만들었다. 하루 종일 비를 맞고 걸은 날 텐트 안에서 적었던 일기가 있다. 텐트 속의 눅눅함과 꼬질꼬질한 냄새가 만들어낸 감성적인 결과물이랄까. 오그라드는 표현이 많지만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사람이 그렇게 감성적이 되지 않을 수 없더라.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어디선가 엘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추위는 점점 심해져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시시때때로 비가 눈으로 바뀌었고, 눈은 비로 바뀌었다. 쫄딱 젖은 옷가지들을 말릴 새도 없이 많은 눈비가 내렸다. 캐나다에 도착하기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 되니 마지막 시련을 겪는 듯했다. 아침도 어두웠고, 저녁도 어두웠다. 해가 가려진 날이 많아지니 걷는 내내 우울했다. 하루의 운행거리를 끝내면 바로 텐트를 설치하고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모닥불을 피울 수도 없었고 텐트 앞에 누워 친구들과 떠들 수도 없었다. 저체온증에 걸리지 않게 조심하고 몸 관리를 잘해야 했다. 텐트 안에 들어가 축축한 옷을 입고 축축하게 젖은 밥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온몸이 가렵고 찝찝했다. 공기는 눅눅했다. 팔과 다리를 벅벅 긁으며 따듯한 샤워를 하는 상상을 할 때면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나 상상은 그저 상상일 뿐, 육체의 껍데기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 들 때면 금방 현실로 돌아오곤 했다.
밤이 되면 물을 데워 날진에 넣고 침낭 속으로 집어넣었다. 발 끝으로 날진을 이리저리 만지작 거리다 보면 따듯한 온기가 침낭 내부에 꽉 차올랐다. 젖은 몸과 옷을 말리는 최소한의 방법이었다. 밖에는 세찬 비가 텐트를 마구마구 두드렸다. 혹여나 캐나다 국경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매일 밤 생각했다. 눈비가 휘몰아치는 밤들이 이어졌다. 아침이 되면 꽁꽁 얼어붙은 물방울들이 텐트 지퍼를 얼려놓았다. 쉽사리 문을 열고 밖을 나갈 수도 없었다. 얼어붙은 땅은 피칭해놓은 팩까지도 단단히 얼려놓았다. 텐트 안에선 다시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한다. 꿉꿉한 침낭 속에서 상체만 빠끔 빼고 물을 데워 커피를 만든다. 진한 블랙커피다. 눈 오는 산자락에서 뜨거운 커피와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는 건 또 다른 낭만이다.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은 온통 차가운 회색과 흰색으로 가득 차 있지만 마음은 녹아야 한다. 그래야 다시 또 하루를 뜨겁게 걸을 수 있다.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Guthook graph - https://www.halfwayanywhere.com/trails/pacific-crest-trail/app-review-guthooks-pct-gui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