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다 그렇지 뭐
오씨티(Oregon coast trail)를 걸으며 일어난 에피소드.
1.
해변을 걷는데 게가 밀려 나와 있었다. 죽은 건지 산 건지 몰라 툭툭 쳐봤더니 움직인다. 오! 싸롸있네! 게는 우리 주변으로 사방팔방 나와있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큰 아이들이었다. 개중에는 죽어있던 것도 있었는데 등껍질이 다 파여있는 걸로 보아 갈매기들의 밥이 된 듯 보였다. 같이 걷던 친구 한 명이 오늘 밤 게를 먹자고 했다. ㅇ_ㅇ? 이걸 어떻게 먹어? 모두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물었다. 그 친구는 산악부 출신으로 오지 탐험과 무인도 같은 곳에서의 생존방법에 대해 굉장한 관심이 있는 친구였다. 본인만 믿으라며 게가 보이면 무조건 잡아 달라고 했다. 이런 게를 먹어도 되는 거야..? 식중독 걸리는 거 아니야..? 이런 우려에도 친구는 괜찮다며 자신을 보였다. 게를 하나하나 잡다 보니 11마리가 되었다. 잡은 게는 손으로 들고 갈 수 없어 가방에 매달았다. 게는 곧 주렁주렁 매달렸고 어떻게 요리할진 몰랐지만 오늘 저녁은 게 파티로 정해졌다.
게를 다 잡고 나서 문제가 생겼다. 요리를 할 도구가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우리의 스토브나 반합은 한계가 있었다. 커다란 냄비 같은 게 있어야 했다. 꽃게찜을 생각하며 눈에 불을 켜고 걷다 보니 양동이가 보였다. 유레카. 저거다! 양동이를 들고 영차영차 걸었다. 저녁이 넘흐나 기대되었다. 오늘은 트레일에서 절대 먹을 수 없는 고급 요리가 탄생할 역사적인 밤이었다. 평소처럼 모닥불을 피웠고 그 위에 양동이를 올렸다. 물을 가득 채운 후 게를 집어넣고 기다렸다. 우오오오오. 맛있을까? 긴장된 상태로 꽃게찜이 완성되길 기다렸다. 보글보글보글. 조금 기다린 후 국물을 떠먹어봤다. 우오오오오! 이런 맛이? 사진은 다소.... 열악해 보이긴 하지만 보이는 것과는 달리 최고의 게 파티 요리였다.
2.
해변 마을에 도착했다. 애들은 숙소를 잡으러 갔고 나는 어느 집 앞 길거리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백팩에 기대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어느 남자가 지나가다 말고 내 앞에 서더니 말을 건다.
- Hey, how's it going?
- Good. You?
- Not so bad
그는 이렇게 대답을 하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열 발자국쯤 더 걸어갔을까, 다시 내게 돌아오며 이렇게 말한다.
- Hey, uhm... do you have a water or money to buy a water? (야.. 엄.. 있잖아.. 너 물 가진 것 있니? 아니면 물 살 돈 있어?)
뭐지. 거지꼴인 내게 뭔가를 달라고 하는 건 아닌 것 같고(그는 말끔했다), 혹시 트레일 엔젤인가 싶어서
- uhm... why?
라고 물으니 갑자기 2달러를 꺼내 "자 여기, 물이라도 사 먹어"라고 하고 지나갔다.
^^..... 아무리 내 꼴이 말이 아니라지만... 2달러를 ^^ 적선받다니. 고마워. 덕분에 맛있는 물을 사 먹었다!^^
3.
피씨티의 가장 큰 축제 중 하나, PCT days라고 불리는 행사가 있다. 8월 말, 3일간 진행되며 미국의 내로라하는 아웃도어 매장들이 Casecade locks라는 마을에서 피씨티 하이커들을 위한 행사를 열어준다. 각종 게임과 추첨을 통해 백팩이나 트레킹 폴 같은 고가장비를 무료로 나눠주기도 하고 고장 난 장비들이 있으면 고쳐주기도 한다. 물론 자신들의 매장을 알리기 위해서 오는 이유가 크긴 하지만 덕분에 2017년 하이커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캘리포니아 사막에서 내내 같이 걷다가 헤어졌던 친구를 다시 만나기도 하고, 시에라 산맥에서 며칠간 동행했던 하이커들을 만나기도 한다. 한마디로 피씨티 하이커를 위한 축제다.
한국에선 매년 제로그램 대표를 맡으셨던 우디 대표님이 Pct days에 참가하신다. 고생하는 한국인 하이커들을 위해 트레일 엔젤로 오셔서 맛있는 요리도 해주시고, 남은 길을 끝까지 잘 마칠 수 있도록 응원을 해주신다. 더 감동인 건 2015년과 2016년에 걸었던 하이커 선배님(?)들까지도 일부러 비행기를 타고 와서 우리에게 힘이 되어준다는 것. 사실 피씨티는 한국에 많이 알려져 있는 길은 아니다. 지금까지 피씨티를 도전한 한국인의 숫자도 많지 않기에 피씨티에 도전한 하이커들끼리는 같은 길을 걸었다는 동지의식이 있다. 매년 두세 번씩 만나 모이기도 하고 피씨티를 준비하고 있는 하이커에게 정보제공을 해주기도 한다. 덕분에 우리 또한 오랜만에 한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앞선 하이커들의 경험담과 우리의 경험담을 서로 나누고 이야기 꽃을 피웠다. 같은 길을 걸은 이들과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즐겁게 흘러갔다. 오랜만에 사진을 보니 그때의 자유가 조금은, 아니 많이 그립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