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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호 Nov 25. 2023

<소피스트적 논박에 대하여>

Aristotle

<소피스트적 논박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재홍 옮김, 아카넷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 마지막 장인 <소피스트적 논박에 대하여>는 토피카의 부록으로 쓰인 책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토피카>에서 변증법을 가르쳤고, <소피스트적 논박에 대하여>에서는 실제 쟁론적인 대화에서 나타나는 오류들의 종류, 해소 방법 등을 가르쳤다. 토피카를 읽고 나서 바로 이 책을 읽으면 내용 연계가 잘 되고 논리적 기반을 다지는 데 좋은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 쟁론적인 오류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과 그 해소 방법들과 같은 핵심적인 내용은 해제에 잘 정리되어 있으며 여기서는 독서 중 의문점이 들었던 내용들과 생각해 볼 만한 내용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본 책 10장의 주제는 ‘말(이름)’에 대해 사용된 논의와 말에 의해 표현된 ‘생각’에 대해 사용된 논의의 차이이다. 이 부분은 역자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 또는 플라톤 사후 아카데미에 있었던 논쟁을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항상 플라톤과의 관계에서는 놀라운 통찰과 논리를 보여준 아리스토텔레스답게 복잡한 추론이 10장에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 본 책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이었고, 체계적으로 내용을 정리하였음에도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에 대해 사용된 논의와 말에 의해 표현된 ‘생각’에 대해 사용된 논의의 차이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논의 중 어떤 것은 말(이름)에 대한 것, 다른 것은 생각에 대한 것으로 나눴을 때 그 두 가지가 동일하지 않다고 상정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자. 그는 두 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생각에 대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질문받은 사람, 즉 답변자가 질문받고 있다고 인정한 그 이름(명사)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이다. 곧 이것은 이름에 대한 논의이다. 반대로 ‘생각에 대해서’라는 것은 질문받은 사람, 즉 답변자가 인정한 그 이름(명사)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이다. 여기서 그는 한 가지 예시를 드는데, 만약 다의적인 말을 질문자와 답변자가 그것이 하나의 의미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 논의가 이어져 나갈 경우, 그 논변이 생각이 아닌 말(이름)에 대해 사용된 것인가? 그는 이렇게 질문의 형식으로 글을 남겼고, 판단은 독자에게 남겼다. 내 생각으로는 그의 정의에 따른다면 해당 논의는 생각에 대한 논의이고, 말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 역자는 이름뿐 아니라 생각에 대해서도 사용된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이번에는 답변자 입장에서 어떤 이름이 여러 의미를 가진다고 인식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논의들은 이름에 대해 향해진 것과 생각에 대해 향해진 것 모두 가능할 것은 자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정의에 의해 답변자가 스스로 인정한 내용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논증의 종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말에 대해 사용된 논의와 생각에 대해 사용된 논의의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든 논의를 이름에 대해 향해진 것인지, 생각에 대해 향해진 것인지를 구별하며, 다른 종류의 논의는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의성에 의존하는 추론 중 일부만이 이름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표현과 관련된 모든 논의가 이름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표현과 관련된 오류들이 단지 답변자가 인정한 의미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문제들도 있겠으나, 표현과 관련된 오류는 동명이의, 강조, 문자의 모호성, 결합과 분리 등 답변자의 태도와 무관한 것들이 존재한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이 생각에 관련된 논의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논의가 단지 2가지로 갈린다는 주장은 힘을 잃게 된다. 하지만 다의성에 의존하는 추론을 갑자기 표현과 관련된 논의로 치환하여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논리적 정합성을 의심할 만한 부분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둘을 같은 의미로 생각한 듯하다. 다의성의 예시로 수학에서의 논의를 생각해 보자. 삼각형이 여러 의미로 받아들여질 때, 삼각형에 대한 명제가 ‘2직각(180도)’이라고 결론이 났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답변자가 이를 다른 의미로 그 말을 승인했다고 해보자. 이는 생각에 대한 것인가 그렇지 않을까? 결론이 2직각이고, 답변자는 다른 의미로 삼각형의 의미를 승인했다는 것은 답변자가 질문받고 있다고 생각한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름에 대한 것일 것이다. 

  또한, 하나의 이름이 여러 의미가 있으나, 답변자는 그것을 깨닫지도,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다면, 당연히 생각에 대한 논의가 될 것이다. 또는 질문을 할 때 이를 구별하여, 답변자가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그 의미에 대해서 계속해서 논의해 나가는 것은 여전히 생각에 대한 논의일 것이다. 하지만 다의성에 관한 논의는 여전히 이름과 관련된 논의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다의성에 관한 논의에 대해 생각에 대한 논의와 이름에 대한 논의가 겹치기 때문에 생각에 대해 향해진 어떤 특정한 논의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는 자기모순이다. 앞서 표현에 관련된 오류들을 근거로 삼아서 다의성에 의존하는 추론 중 일부만이 이름에 의존한다고 증명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의성에 의존하는 추론과 다의성에 관한 추론은 문자 그대로 보았을 때는 다른 것처럼 보이나, 실질적으로 그는 두 내용을 같게 두었다고 생각한다. 두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예시를 통해 단지 답변자의 태도만이 다를 뿐이지, 그것의 핵심인 다의성 자체는 두 경우에서 모두 존재한다. 모순을 회피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본래 의도했던 논리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먼저,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 주장했던 내용, 즉 다의성에 관한 논의들 중 일부만이 이름에 의존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생각에 대한 논의가 이름에 의존하는 논의들에 정확히 겹치고, 차이가 없는지를 보여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보여주지 못했고, 이를 의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음으로, 다의성에 관한 논의는 이름에 관련된 논의 중 하나가 맞는다면, 그리고 그 논의가 전부 예시처럼 생각에 대한 논의라고도 볼 수 있다면 그의 최초 주장은 성립하며 이것이 아마 그가 의도한 논리일 것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처음 그가 다의성에 관한 논의에서 진행한 내용과 맞지 않는다. 그는 다의성에 의존하는 추론을 2개로 나눌 수 없으며, 그중에는 문장의 모호성, 결합과 같은 제3의 논의들도 있다고 하였다는 논리를 펼쳤는데, 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만약 다의성이 아닌 ‘표현에 관한 논의’들에 대해서 그가 논증했기 때문에 첫 번째 논리가 부정합적이라고 지적한다면, 그가 펼친 다의성에 관한 논의에 대한 최초의 논의는 전부 부정될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이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그를 구한다고 해도, 논리의 완전함은 크게 떨어진다. 왜냐하면 그는 다의성에 관한 논의를 이름과 관련된 논의라고 단지 삼각형 예시 하나를 통해서 일방적으로 독자들에게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다의성에 관한 추론이 생각에 대한 논의라고도 엄밀하게 증명하지 못했으며, 단지 예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증명했을 뿐이다. 만약 그의 주장이 고대 그리스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사실이 아니라면 논리적 엄밀함은 크게 떨어질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지적들은 나의 독해 문제이거나 혹은 역자의 실수로 인해 발생한 오류였을 수 있으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나 큰 오류를 저질렀다는 것이 충격적이어서 따로 분석해 보았다.

  다음으로 간단한 소피스트적인 논의를 소개하려 한다. 역자의 글을 간접인용 하면, Q. ‘너는 내가 물으려 하는 것을 알고 있느냐?’ A. ‘모릅니다’ Q. 당신은 덕이 좋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느냐? A. ‘예’ Q. 그런데 내가 물어보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따라서 너는 내가 물어보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으로 질문의 대상이 될 것과 덕이 좋음이라는 사실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밝히면서 이 소피스트적 논의를 반박한다. 그 근본 원리는 다음과 같다. “어떤 사물에 부수하는 것에 대해서 참인 속성이 그 사물 자체에 대해서도 역시 참이라는 것은 반드시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 단지 구별할 수 없고 실체(본질)에서 하나인 사물들에 대해서만 동일한 모든 속성이 속하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즉 내가 물으려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덕이 좋음이라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누군가가 물으려 하는 것은 당연히 덕이 좋음이라는 사실과 다르다. 다만 이 둘이 같아 보이는 것은 내가 물으려 하는 것이 단지 부수적으로, 덕이 좋음이라는 사실이었다는 것이다. 부수적으로 어떤 것에 속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속하는 것을 혼동하여 나타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소피스트적 논의들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 중 이 책은 사실 그에게 학문적인 의미로서는 큰 지분을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쟁론적인 대화와 추론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는 학문적 추론에 대한 내용을 중요시하였고, 그 내용을 담은 분석론 전서, 분석론 후서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학계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내용은 토피카에서 나타난 변증법적 추론이라 볼 수 있다. 통념에 기반한 변증법적 추론은 단순한 토론뿐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하지만 학문적 방법론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이 책이 아직도 높이 평가받는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궤변을 통해 사람들을 속이고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는 소피스트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소피스트들의 궤변에 대한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오르가논을 전체적으로 읽으면서 매우 아쉬운 점은 분석론 전서와 후서가 <아리스토텔레스 선집>이라는 책에 발췌역으로 담겨 있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주장하거나 논박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절대로 간단하고 짧은 논증으로 끝내지 않고, 그 배경부터 시작하여 자기 뜻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 전개와 해당하는 오류 지적, 그리고 자신의 논증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논리적 구조를 세운다. 그리고 이러한 수없이 많은 논리적 연결고리의 향연을 통해 독자들이 그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오르가논의 핵심이자, 학문적 추론이라는 인류사에서 매우 중요한 논리학 내용을 아직도 발췌역을 통해 그의 긴 논리적 연결고리 없이 핵심 부분만 짧게 볼 수 있다는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르가논의 나머지 책들은 분명 아리스토텔레스 본인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초석이 되는 중요한 내용들이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공부하지 않더라도 논리적인 역량을 키우는 데 큰 양분이 될 내용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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