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실재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실재한다면 그것은 현존(present)하는가? 현상(phänomenale)과 실재(realität)를 처음으로 구분한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된 객관적 실재의 실존에 관한 형이상학적 아포리아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시간동안 철학의 미해결 문제였다. 플라톤은 오감으로만, 좀 더 적확하게는 감각소여로만 지각될 수 있는 유물론적 세계의 가변성(changeableness)과 기만성(deceitfulness)를 근거로 데모크리토스나 레우키포스적인 기존의 인과적, 기계론적 세계관을 유물론적 세계와 탈유물론적 세계, 즉 경험적 세계와 이데아의 세계로 이분함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와 형상에 대한 플라톤의 구분에서 출발하는 대신 그 특유의 일원론적 모델을 통해 양자를 통합함으로서 기존의 플라톤적 이데아론을 거부했다.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과 그리스도교의 세계관을 통합한 아퀴나스나, 존재는 서로 독립되는 물질적 존재자와 정신적 존재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엄격한 이분법을 역설한 근대 이원론자 데카르트, 또는 우주가 곧 신이라 주장한 스피노자의 범신론과 같이 현상과 실재에 관한 여러 가지의 형이상학적 이론이 제시돼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종래의 형이상학 이론에는 한 가지의 변수가 배제돼 있었다. 바로 존재와 시간의 관계이다.
칸트는 이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에 대한 예리한 식견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관측자는 칸트가 지적했듯 후험적, 후천적으로 습득한 시간적, 공간적 구성물을 통해서만 세계를 지각하므로 세계는 언제나 관측자의 지각 메커니즘에 종속된다. 우리는 말하자면 감각수용기에 의해 전기화학적으로 가공된 감각소여(sense datum)만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세계에 대한 날 것 그대로의(미가공 상태의) 실체를 지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관측자가 시공간적 구성물을 통해 객관적 실재를 추론할 뿐이라면, 좌우간 현존하는 세계란 존재하는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나는 이 논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밝히고 있다: (1)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이해되는 단어로서의 현재 개념에는 문제가 있다는 점, (2) 물리적 세계의 현존성(presentness)은 회의될 여지가 있다는 점, 그러므로 (3) 세계의 현존성은 공리화 될 필요가 있다는 점, 그리고 (4) 물리적 세계의 현존을 연역할 순 없다 해도 관측자는 최소한 세계의 현존성을 귀납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1)과 (2), 그리고 (3)과 (4)에 대한 논의를 통해 나는 최종적으로 물리적 세계의 현존성에 대한 존재론적 회의론으로부터 세계의 현존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현재는 무엇인가? 과거와 미래란 무엇인가? 과거는 현재에 앞선 모든 시간대를 포괄하는 하나의 집합이다. 마찬가지로 미래는 현재의 뒤를 잇는 모든 시간대를 지칭하는 집합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는 현재에 의해 정의된다. 그렇다면 현재란 무엇인가? 현재는 보통 <지금 이 순간>으로 번역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순간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제는 과거의 시간이고 내일은 미래의 시간이다. 따라서 현재라는 것이 지칭하는 그 무엇이 좌우간 존재한다면 그것은 오늘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구체적으로 오늘 언제를 지칭하는 단어인가? 한 시간 전은 과거다. 몇 분 전도 과거에 속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 논의를 전개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현재를 찾을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현재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나는 지금 책상을 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책상>을 지금 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인가? 내가 책상을 볼 수 있는─혹은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이유는 물론 책상이 그곳에 있기 때문인 탓도 있지만 일차적으론 책상에 반사된 빛이 내 눈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지금의 책상을 보고 있다>라는 주장이 참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선 두 가지의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1) 빛의 속도가 무한해야하고, (2) 감각수용기를 통해 물체를 지각하는 과정에 소요되는 시간이 0이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하지만 빛의 속도는 유한하고 빛이 299,792.458km/s의 속도로 책상에 반사된 후 나의 눈에 도달하는 이상 내가 보는 책상과 실제 책상에는 갭(gap)이 생기게 된다. 다시 말해서 내가 보는 책상은 언제나 <책상과 나의 거리/빛의 속도>만큼의 딜레이가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나는 지금 존재하는 물체를 촉각으로 느끼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내가 만지는 모든 물체의 느낌은 감각수용기를 통해 받은 자극에서 생겨나는 전기신호가 감각뉴런을 거쳐서 뇌에 도달하기까지의 시간만큼의 딜레이가 있으므로 그 감각소여는 과거의 물체에 대한 감각소여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식으로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시각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다. 빛이 없는 방에 앉아 있는 Q라는 사람이 물리적 대상 p를 바라보는 상태에서 불을 켜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각 인과관계를 엄격하게 분리한다면 우리는 지각의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도식을 만들어 생각해볼 수 있다:
t0(불이 켜지는 시점)→t0.5(gap)→t1(대상 p에 빛이 반사되는 시점)→t1.5(gap)→t2(대상 p에 반사된 빛이 Q의 눈에 도달하는 시점)→t2.5(gap)→t3(Q가 대상 P를 지각하는 시점)
그러나 물체 p의 지각은 t3에서 종료되는 것이 아니다. 광원은 불이 켜져 있는 한 Q로 하여금 대상 p에 대한 지속적인 지각을 가능케 할 것이며 따라서 대상 p에 빛이 반사되는 시점이나 대상 p에 반사된 빛이 Q의 눈에 도달하는 시점은 사실상 불이 켜지는 순간부터 불이 꺼지는 순간까지 무한대로 갱신될 것이므로 (그리고 시간은 가산명사가 아니므로) Q가 실제로 p를 지각하는 과정을 위와 같은 도식으로 전부 풀어 쓰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그것이 설혹 가능하다 해도─편의상 지속기간(duration)과 순간(moment)을 구분 짓지 않을 때─다음과 같이 대강적으로 밖에는 정리할 수 없을 것이다.
1.시점 M₁: 시점 M₁의 대상 p에 대한 감각소여 C₁ 생성(=빛이 대상 p에 반사되는 시점)
2.시점 M₂: 감각소여 C₁이 Q의 시각수용기로 이동 중/시점 M₂의 대상 p에 대한 감각소여 C₂ 생성.
3.시점 M₃: 시점 M₁의 대상 p에 반사된 빛(감각소여 C₁)이 Q의 시각수용기에 도달/감각소여 C₂가 Q의 시각수용기로 이동 중/시점 M₃의 대상 p에 대한 감각소여 C₃ 생성.
4.시점 M₄: 감각소여 C₁이 Q의 시각중추로 이동 중/감각소여 C₂가 Q의 시각수용기에 도달/감각소여 C₃가 Q의 시각수용기로 이동 중/시점 M₄의 대상 p에 대한 감각소여 C₄생성.
5.시점 M₅: 감각소여 C₁이 지각됨/감각소여 C₂가 시각중추로 이동 중/감각소여 C₃가 Q의 시각수용기에 도달/감각소여 C₄가 Q의 시각수용기로 이동 중/시점 M₅의 대상 p에 대한 감각소여 C₅ 생성.
6.시점 M₆: 감각소여 C₂가 지각됨/감각소여 C₃가 시각중추로 이동 중/감각소여 C₄가 Q의 감각수용기에 도달/감각소여 C₅가 Q의 감각수용기로 이동 중/시점 M₆의 대상 p에 대한 감각소여 C₆생성.
7.시점 M₇: 감각소여 C₃가 지각됨/감각소여 C₄가 Q의 시각중추로 이동 중/감각소여 C₅가 Q의 시각수용기에 도달/감각소여 C₆가 Q의 시각수용기로 이동 중/시점 M₇의 대상 p에 대한 감각소여 C₇ 생성.
여기서 볼 수 있듯 Q는 시점 Mₙ(n≥5)에서 대상 p에 대한 감각소여 Cₙ₋₄를 얻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얻어진 감각소여는 시점 Mₙ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감각소여가 아니라 시점 Mₙ₋₄에 존재한 적있는 대상 p에 대한 감각소여이다. 즉 시점 Mₙ에 존재하는 대상 p에 대한 감각소여 Cₙ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Q는 시점 Mₙ+₄전까지 감각소여 Cₙ을 얻을 수 없다. 요컨대 시점 Mₙ에서 Q가 얻을 수 있는 감각소여는 언제나 Mₙ₋₄의 시점에 있었던 대상 p에 대한 감각소여 이므로 Q는 결코 시점 Mₙ에서 그에 대응하거나 그에 대해 시간적으로 과거인 {Cₙ, Cₙ₋₁, Cₙ₋₂, Cₙ₋₃}의 감각소여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통상적으로 말하는 <현재>라는 단어, 그러니까 <현재의 삶은 괜찮다>거나 <현재 나는 글을 쓰고 있다>는 일상적인 표현에서 의미하는 <현재>는 사실상 <과거>를 지칭하는 단어가 된다. 나는 현재 글을 쓰고 있지만 나는 기실 내가 현재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과거의 감각소여를 이제 막 의식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로써 우리는 <현재>의 기존 정의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은 현재에 대한 좁은 정의다. 현재라는 단어의 용례를 분석해볼 때 현재란 어느 정도의 과거를 포괄하는 개념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는 곧 과거이고 과거는 곧 현재인가? 현재가 지칭하는 그 무엇과 과거가 지칭하는 그 무엇의 교집합은 분명 공집합이 아니다. 허나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구분해 사용한다. 어째서인가? 아마 <얼마 되지 않은 과거>와 <오래된 과거>를 구분하기 위한 일종의 편의에 의한 합의로 보인다. 그런데 현재는 <얼마 되지 않은 과거>와 개념적으로 동치인가? 우리는 앞서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조차 과거의 순간일 수밖에 없음을 논증했다. 그 어디에서도 현재가 지칭하는 구체적인 시간대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순간은 지금으로 선언되는 바로 그 순간 과거가 된다. 하여 <지금 이 순간>마저도 과거의 집합에 포괄된다면 현재는 충분히 <얼마 되지 않은 과거>로 대체될 수 있을 듯하다.
허나 우리는 그전에 (P1)<사회적으로 발화되는 개념으로서의 현재의 세계>와 (P2)<물리적으로 실존하는 대상으로서의 현재의 세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전자가 <얼마 되지 않은 과거>와 동치라면, 후자는 현재라는 단어가 본래 지칭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는 바로 그 <지금 이 순간>을 지칭하는 단어다. 선술한 감각소여 딜레이 문제를 통해 볼 수 있듯 우리는 언제나 과거의 세계에 대한 과거의 감각소여에만 액세스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인지적 갭을 뛰어넘어 (P2)를 지각할 수는 없다. 따라서 확실히 현존하는 것은 과거의 세계에 대한 감각소여 뿐이라는 묘한 결론이 도출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한다면 문제가 생긴다. 여기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우리는 설혹 지금 책상을 보고 있다 해도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책상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좀 더 정밀하게 말해서, 우리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책상은 과거의 책상이기 때문에 현재의 책상이 아니다>라고 밖엔 말할 수 없다. 감각소여를 통해 지각한 특정 물체나 대상이 언제나 과거의 물체나 대상이고 우리가 알 수 있는 물체의 속성도 언제나 과거의 물체에 대한 감각소여일 뿐이라면 우리가 지각하는 물리적 대상은 언제나 현재의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과거의 물리적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리적 대상 p는 있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불가지론적 진술로 교체되어야 합당하다:
(R) 물리적 대상 p가 지금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지만 대상 p는 적어도 있었다.
위 논의와 정합적으로 보이는 (R)은 그러나 괴이하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책상은 과거의 책상에 대한 감각소여로 이루어져있지만 그 책상은 동시에 지금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각각의 감각소여가 그 다음 시점의 감각소여와 관계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객관적 실재로서의 책상은 존재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단지 물리적 대상 p의 현존성을 알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에 관해 침묵해야 하는가? 우리가 알 수 있는(intelligible) 영역 내에서 가장 확실하게 현존하는 것은 분명 과거의 세계에 대한 감각소여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의 현존성을 회의할 수 있는 온당한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앞서 관측자가 시점 Mₙ에 얻을 수 있는 대상 p의 감각소여 C는 언제나 시점 Mₙ에 대해 시간적으로 과거의 대상 P에 대한 감각소여이며, 따라서 (R)<물리적 대상 p가 지금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지만 대상 p는 적어도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된 명제 (R)는 과연 건전하다고 할 수 있는가?명제 (R)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비판점이 있을 수 있다. (i) t0-t0.5-t1-t1.5-t2-t2.5-t3의 인과가 매우 빠르게 성립되기 때문에 갭과 지각의 구분(gap-perception distinction)은 부당하며, (ii)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감각소여가 언제나 과거의 물체에 대한 것이라 해도 그 사실이 필연적으로 현존하는 물체의 부재를 연역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iii) 러셀이 <철학의 문제들>에서 지적하듯이 감관에 의해 알려진다고 생각되는 보통의 대상을 본다면 “감관이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은 우리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대상에 대한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볼 수 있는 한에 있어서는 우리와 대상의 관계에 의존하는 어떤 감각소여에 대한 진리뿐"이므로 “실재하는 대상은─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직접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인식되는 것으로부터 추리되는 것”이기 때문에 (R)은 잘못이라는 비판점들이 바로 그것이다.(Russel, 14, 19)
비판 (i)은 언뜻 보기에 합리적인 지적으로 보인다. t0-t0.5-t1-t1.5-t2-t2.5-t3의 인과는 순식간에 형성되므로 관측자, 혹은 지각의 주체인 우리에게 있어서 t0은 곧 t3과 동치라 해도 무방할 만큼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제기된 (i)은 나의 핵심적인 주장을 반증하지는 못한다. Q가 시점 Mₙ에 감각소여 Cₙ을 얻을 수 없는 이유가 감각소여 Cₙ이 Q에게 지각되는 데에 갭(t0.5, t1.5, t2.5)이 있기 때문이라면 그 갭이 얼마나 짧은 시간인가 하는 문제는 관측자가 시점 Mₙ에서 그에 상응하는 감각소여 Cₙ─즉 시점 Mₙ의 대상 p에 대한 감각소여─를 결코 얻을 수 없다는 주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갭의 길이>를 문제시 하는 것이 아니라 <갭의 존재>를 문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나의 주장은 비판 (i)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다.
비판 (ii)는 엄밀히 말해 나의 주장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보다는,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비판 (iii)은 감각소여와 대상 p를 완전히 분리시킴으로서 <대상 p가 있다>는 명제가 <대상 p의 감각소여가 있다>는 명제로 정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대상 p에 대한 어떤 감각소여가 있었을 뿐 대상 p가 실제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므로 감각소여의 존재가 대상의 존재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선 부가적인 논증이 요구된다. 이는 외려 (R)을 반증하기 보다는 강화하는 지적이다. 혹자는 존재-지각 갭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은 또 다른 비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존재와 지각 사이의 갭의 존재를 통한 존재론적 회의론을 전개하고자 한다면 그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a) 그는 관측자가 지각함에 따라 물질적 존재자가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이 세계가 관측자에 독립적인 세계라면─혹은 객관적 실재가 관측자의 지각여부와는 무관하게 존재한다면─이 세계는 관측자가 없어도 그 자체만으로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관측자가 물질적 존재자를 지각하는 내적과정에 시간적 딜레이가 있다는 사실은 문제되지 않는다. 세계는 지각을 통해 연역되는 것이 아니므로 세계의 현존성을 정당화하고자하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그것은 공리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b) 갭의 존재를 통해 세계의 현존성의 불분명함을 밝힐 수 있다곤 해도 관측자는 현존한다. 아무리 모든 관측자가 과거의 세계에 대한 감각소여에만 액세스할 수 있다 해도 그 감각소여를 수용하는 관측자는 감각소여를 수용하기 위해서 일단 존재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한 감각소여가 어떤 시간대의 물질적 존재자에 관한 감각소여라는 것과는 별개로 그것이 좌우간 지각된다면, 그 감각소여를 지각한 관측자의 현존성은 자체적으로 연역된다. 그리고 관측자가 현존한다는 사실이 연역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현존하는 물질적 대상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주장이 논박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비판 (b)는 제법 강력한 비판으로 보인다. 허나 감각소여가 의식된다고 해서 관측자의 현존성이 연역될 수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빛이 우리의 눈에 도달할 때 갭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감각수용기가 시각자료를 받아들여 두뇌로 전달한 후 후두엽에서의 프로세싱을 통해 우리가 그 시각자료를 지각/인식하는 데에는 또 다른 갭이 존재한다. 즉, 과거의 사물에 대한 감각소여를 통해 사물의 현존성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사물을 보는 관측자의 현존성 역시 파악 불가능하다. 눈에 있는 감각뉴런, 즉 감각수용기가 지금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감각수용기의 작동 내지 활성화를 근거로 들 수 있는데 우리가 감각수용기의 작동을 파악/의식하는 것은 언제나 그 작동이 끝난 후이므로 우리가 의식하는 감각수용기의 활성화는 언제나 과거의 활성화로 국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각수용기가 뇌로 보내는 전기신호를 받는 뉴런은 어떠한가? 두뇌에 감각수용기의 신호가 보내지면 –70mV의 전위차(electrical potential difference)를 갖는 축색돌기막은 자극을 받아 Na⁺ 이온채널을 열고 K⁺ 이온채널을 닫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에 따른 탈분극화 현상을 통해 축색돌기막의 전위차가 특정 역치(threshold)를 뛰어넘는 순간 발생하는 전기 자극을 통해 물체를 지각하는 것인가? 감각수용기에서 활동전압으로 치환된 외부자극은 구심성 신경섬유를 거쳐 반사활동으로 전개되며, 시상(thalamus)과 대뇌피질에 전달된 후 감각을 야기한다.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감각의 분규, 발생부위의 국재(localization), 또는 감각의 강도 등을 식별(discrimination)하고, 더 나아가서 여러 가지 감각을 통합하여 지각(perception)을 형성”하는 것이다.(Neurophysiology, 1997) 즉 사물을 지각한다고 할 때 그것은 감각수용기로부터 트랜스덕트된 전기신호가 두뇌에 도착하는 순간에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뇌의 특정 영역을 통해 그 신호를 프로세싱한 후에서야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물체를 관측하는 순간마저도 뉴런과 총체적인 뇌를 이루는 뉴런들이, 그리고 더 나아가 뇌 자체마저도 현존하는지에 관해 장담할 수 없다. 우리가 의식하는 것은 과거의 감각소여를 처리하는 과거의 두뇌활동 뿐이다.
아마 (R)에 대한 가장 강력한 지적은 다름 아닌 세계의 현존성에 대한 공리의 필요성(necessity)과 정합성(coherence)에서 제기될 수 있을 듯이 보인다. 비판 (a)는 물론 이 세계가 관측자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가정을 하고 있으며 나는 현재 세계의 현존성이 공리로 취급되어선 안 된다는 점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공리라는 것이 자세히 보면 텅 비어있는 전제에 다름 아닌가 하는 점을 지적하고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므로 이 지적은 핀트가 벗어나있다. 허나 그와는 별개로 세계의 현존성에 대한 전제가 필요하다는 점이 부정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이제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우리는 과거의 대상에 대한 감각소여만 알 수 있고 따라서 우리가 물질적 대상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추리는 과거의 대상의 존재에 대한 추리이기 때문에 어떠한 것에 대한 추리도 현존하는 그 무엇에 대한 추리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예컨대 우리가 보는 태양은 8분 전의 태양이므로 지금의 태양이 이미 폭발해 사라졌다 해도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는 거꾸로 말해서 어떠한 것이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없었지만 그 대상은 현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서 우리는:
(R’) 감각소여를 통해 과거에 어떠한 것이 존재했는지 알 수 있지만, 그 어떠한 것도 지금 존재하는지 알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우리는 감각소여를 통해 어떠한 것이 부재했는지, 혹은 어떠한 대상의 감각소여가 부재했는지는 알 수 있지만, 그 어떠한 것도 지금 부재하는지 알 수 없다.
는 다소 괴이한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감관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대상 p가 현존하는지 알 수 없다면 대상 p와 동일하게 물리적 속성을 갖는 모든 것, 요컨대 우주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모든 물질적 대상 역시 그것이 현재 존재하는지 비존재 하는지─좀 더 정확히 말해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알 수 없기 때문이다. (R’)에 따르면 우리는 현재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지금 무언가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허나 이 결론은 역시 묘하다. 단지 모든 감각소여가 과거의 세계에 대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지금 당장 눈앞에 유니콘이 안 보인다고 유니콘이 없다는 확답을 할 수 없고 지금 당장 눈앞에 책상이 보인다고 책상이 있다는 확답을 할 수조차 없다는 스탠스는 분명 비생산적으로 보인다. 이는 어떻게 논박될 수 있는가? 인과율에 따르면 모든 결과 y는 원인 x를 수반한다. 즉 원인 없는 결과는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물체는 어떤 동인이 없는데도 다음 순간 비존재 할 수 없으며 어떤 동인이 없는데도 다음 순간 갑자기 생겨날 수 없다. 내가 앉아있던 의자가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의자가 다음 순간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안심한 채 앉아 있을 수 있다.
허나 우리는 이미 근거 없는 인과율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고 있지 않은가? 돌을 던지면 땅에 떨어진다는 명제는 물리적 사실이지만 그것은 분석적 참, 말하자면 필연적 참은 아니다. 만약 전지전능한 라플라스의 악마가 존재할 수도 있다면 우리는 물체를 던져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경우를 상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믿는 이유는 평생 만유인력의 법칙을 몸소 경험해왔기 때문이지 만유인력의 법칙이 없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은 아니다. 허공에 던진 물체가 반드시 다음 순간 떨어져야만 하는 논리적인 이유는 없듯이 눈앞에 있는 물체가 다음 순간 있어야만 하는 논리적인 이유, 내일의 태양이 떠야만 하는 논리적 이유, 유니콘이 다음 순간 없어야만 하는 논리적인 이유 따위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과율을 공리화(axiomatize)한다 해도 원인이 되는 모든 요소들에 대한 앎이 주어지지는 않았다면 우리는 마찬가지로 결과가 되는 어떤 요소들에 무엇이 있으리라는 확답 또한 할 수 없다. 우리는 요컨대 현재 무언가가 없다거나 있다는 것을 확언할 수 없다. 인과율이 참이라 해서 원인이 되는 모든 요소들을 알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닌 탓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우리는 결국 (R’)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나 (R’)이 참이라고 한다면 학문체계는 물론이고 일상적인 생활마저도 할 수 없게 된다. 우리 모두는 처음부터 우리가 맞닥뜨리는 모든 물리적 대상들이 현존하고 있다는 가정을 세우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책상, 내가 쓰는 펜은 내가 그것의 현존성을 전제할 때만 사용가능하다. 세계의 현존성에 대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해도 우리는 우리와 대화하는 타인이 마치 현재 존재한다는 듯이 행동하며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이 현재 존재한다는 가정을 내려두고 음식을 입으로 가져간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현재를 가정하거나 과거의 감각소여를 토대로 현재를 추리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형식과학과 응용과학 역시 세계의 현존성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 예컨대 자연과학의 탐구대상과 자연주의적 방법론은 세계의 존재를 전제하며 형식과학과 사회과학은 아무리 추상적인 주제를 다룬다 할지라도 좌우간 세계의 존재를 전제할 때만 가능한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를 보자면 세계의 현존성은 편의를 위해 공리화 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은 세계의 현존성 그 자체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는 스탠스를 그럴싸하게 표현한 데 다름 아니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1) 눈을 감았다 떠도 귀를 막았다 떼도 세상은 여전히 존재한다. 시각, 촉각, 후각, 청각, 미각을 전부 차단하고 몇 시간을 버텨도 어찌되었든 세상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다. 유년 시절부터 쌓아온 대상영속성(object permanence)이 있기 때문이다. 즉 과거의 감각소여를 토대로 내리는 현재에 대한 우리의 추리는 비교적 정확한 편이며 이는 고정적으로 보이는 여러 물리법칙들에 의해 추가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 (2) 또한 우리에게는 세계의 현존성을 부정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R’)은 우리가 세계의 현존성을 회의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주지만 세계의 현존성을 부정할 근거까지 제공해주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현존성을 수용할 때 수반되는 장점이 그 반대의 상황에서의 장점보다 크기 때문에, 그리고 세계의 현존성을 부정할 만한 뚜렷한 근거가 있지도 않으므로─즉 인지적 갭이 있다곤 해도 매우 짧을뿐더러 세계의 현존성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갖고 있는 다른 믿음체계에 정합적이므로─그것은 하나의 공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세계의 현존성에 대한 공리화는 말하자면 필요성(necessity)과 정합성(coherency), 그리고 도구성(instrumentality)을 갖는다. 현존하는 세계에 대한 공리화(axiomatization)는 공허(vacuous)하거나 불필요한 작업이 아니라는 의미다. 결국 세계의 현존성은 세계-내-존재자의 입장에서 연역이나 정당화의 대상보다는 요청되는 것에 가깝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문제는 이것이다: 세계의 현존성에 대한 공리화 외에 세계의 현존성을 규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우리는 정말 (R‘) 따라 현재에 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인가? 나는 모든 감각소여가 과거의 대상에 대한 감각소여라는 사실을 통해 우리가 현재의 물질적인 세계에 관해서는 어떠한 앎도 가질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했지만, 이는 존재의 현존성 귀납가능성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유클리드 평면에 놓인 다음과 같은 직각사다리꼴의 방을 생각해보자.
Figure 1에서 포인트 A, B, C, D는 각각 관측자 A, 관측자 B, 관측자 C, 그리고 관측자 D를 의미한다. L은 불빛, p는 불빛 아래에 놓여있는 임의의 대상을 의미한다. 이때 불을 켠다면 그 불은 대상 p를 반사한 후 각자 α→A, β→B, γ→C, δ→D의 경로를 통해 관측자에게 도달할 것이다. 대상 p로부터 관측자까지의 거리는 δ>β>α>γ의 순으로 하락한다. 대상으로 부터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빛이 관측자에 도달하는 기간은 더 오래 걸리므로 멀리 떨어져있는 관측자일수록 상대적으로 더 오래된 과거의 감각소여를 갖게 된다. 즉 대상 p를 반사한 빛은 γ-α-β-δ의 순으로 관측자에게 도착한다. 따라서 관측자 C는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대상 p를 지각할 것이고 관측자 D는 가장 늦게 대상 p를 지각할 것이므로 이들은 상대적으로 과거 혹은 미래의 감각소여를 얻을 수 있다. 이번엔 이를 좀 더 일반화해서 생각해보자.
Figure 2는 일종의 열린 우주를 나타내며 L은 강한 빛을 내는 항성이다. <1, 2, 3, ...>은 각각의 관측자에게 붙여진 이름이며 모든 관측자가 L의 빛을 응시하는 중이다. 정수는 무한하므로 무한하게 많은 관측자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추가적으로 1번 관측자는 L에서 1광초(light second) 떨어진 거리에, 2번 관측자는 L에서 2광초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n번 관측자는 L에서 n광초 떨어진 거리에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n번 관측자는 n초 과거의 L을 지각하게 될 것이고 n값이 상승할수록 관측자는 상대적으로 더 과거의 L에 대한 감각소여를 얻게 될 것이다. 이제 L에 대해 생각해보자. 매우 큰 항성인 L에게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매초마다 색깔이 빨강에서 파랑으로, 파랑에서 빨강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1번 관측자와 2번 관측자는 언제나 서로 다른 색깔의 L을 지각하겠지만 1번 관측자와 3번 관측자는 언제나 서로 같은 색깔의 L을 지각할 것이다. 즉 m을 0-포괄적 양의 정수로 정의할 때 1+2m번 관측자(홀수 관측자)는 언제나 서로 동일한 색깔의 L을 지각할 것이며 2m번 관측자(짝수 관측자)는 언제나 홀수 관측자와는 다른 색의 빛을 띠는 L을 지각할 것이다.
여기까지의 가정에 따르면 n번 관측자는 n초 과거의 L을 지각하게 되기 때문에 결코 n-1초 과거의 L이나 n-m초(단, n-m>0) 과거의 L을 지각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n-m번 관측자가 n-m초 과거의 L을 지각하리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다시 말해 n-1번 관측자는 n번 관측자가 볼 수 없는 n-1초전의 L을 볼 수 있고 n-2번 관측자는 n-1번 관측자가 볼 수 없는 n-2초전의 L을 볼 수 있다. n-2초전의 감각소여는 n-1초전의 감각소여에 대해 시간적으로 앞서는 탓이다. 그렇기에 n번 관측자가 n-1초전까지 L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다 해도 n-1번 관측자는 n-1초전까지 L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n번 관측자가 n-m초전의 L의 존재를 확답하지 못한다 해도 n-m번 관측자는 n-m초전의 L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서 한 가지의 재밌는 가정을 덧붙여보자. 1번 관측자를 제외한 모든 관측자들(n₁, n₂, n₃번 관측자 등등) 옆에는 빛의 속도를 뛰어넘는 통신이 가능한 텔레비전이 있는데 이 무한대의 텔레비전들은 각각 {n₁-1, n₂-1 n₃-1, ...}번 관측자가 보고 있는 장면을 딜레이 없이 그대로 전송해준다. 그러므로 n번 관측자는 n-m초전의 L의 감각소여에 결코 액세스할 수 없다 해도 n-m번 관측자가 목격하는 L을 토대로 n-m초전까지의 L의 존재를 귀납할 수 있다. n-m초전의 L이 존재한다면 n-m+1초전의 L도 존재할 것이고 n-m+2초전의 L도 존재할 것이며, 임의의 양의 정수 k(단, m>k)에 대해, n-m+k초전의 L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1+2m번 관측자와 2m번 관측자는 매초마다 1초 후의 L의 색깔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1번 관측자와 L사이에 무수히 많은 또 다른 (0과 1사이의 모든 유리수를 이름으로 갖는) 관측자들을 상정함으로써─q를 0과 1사이에 존재하는 임의의 유리수라고 할 때─1번 관측자가 1초전의 L에 대한 감각소여만을 얻을 수 있다 해도 1-q초전의 L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는 1-q≈0초전의 L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되며 0과 1사이의 유리수는 무한하므로 1-q가 아무리 작다한들 그보다 더 작은 수를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을 인간의 감각수용기에까지 확장시킬 수 있으며 이는 빛을 매개로 가능한 시각기관뿐만이 아니라 후각기관, 미각기관, 청각기관과 촉각기관에도 전부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다. 우리는 즉 원리적으로 세계의 현존성에 최대한 점근해갈 수 있으며 갭의 길이가 0에 수렴해 현존하는 세계의 감각소여를 따라잡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세계의 현존성을 귀납하는 데엔 충분한 어마어마하게 많은 데이터가 수집될 수 있는 것이다. 허나 나는 앞서 <갭의 길이가 짧다는 것>보다는 <갭이 좌우간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시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자: 갭의 길이가 10의 -100승초라면 어떤가? 10의 -∞승이라면?
갭의 길이를 끊임없이 줄여나갈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과거의 세계에 대한 과거의 감각소여에서 현존하는 세계로 끊임없이 점근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갭이 아무리 짧더라도 그보다 더 짧은 갭을 생각해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10을 무한대로 쪼개면 사실상 0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세계의 현존성 그 자체에 대한 회의는 반드시 <갭의 길이가 줄어들면서 특정 임계치를 지나는 어느 지점>부터 불필요하거나 무의미한 작업으로 전락하게 될 수밖에 없다. 앞서 도출해낸 언명 (R)과 (R’)은 바로 이 지점에서 부정될 수 있다. <물리적 대상 p가 지금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는 표현에서 사용된 <지금>이라는 부사는 마치 <지금>과 <지금 아닌 것>을 엄밀히 구분 지을 수 있다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앞서 살펴봤듯 양자의 경계는 불분명할뿐더러 갭의 길이가 10의 -∞승이라면 그러한 갭이 있는 상태에서 지각하게 되는 물리적 세계와 아무런 갭도 없는 상태에서 지각하게 되는 물리적 세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불명확해진다.
우리는 요컨대 <물리적 대상 p는 있었다>는 명제와 <물리적 대상 p는 지금 있다>는 명제의 시간적 간극을 좁혀갈수록 기어코 양자의 시제를 결정하기 어려워지는 지점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양자의 시제의 결정-불분명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지금과 지금 아닌 것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 따라서 세계의 현존이 어느 지점부터 시작되고 어느 지점에서 끝나는지 역시 모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세계의 현존이 어느 지점부터 시작되는지 알 수 없으므로 세계의 현존성을 파악할 수 없다는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세계의 현존을 회의하기 위해선 좌우간 세계가 현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이 어느 지점부터 시작되는지 규정해야 하는데, 이러한 세계의 현존성-회의에 대한 유일한 근거로 제시된 인지적 갭이 사라진다는 가정 하에서조차(그러니까 갭의 길이가 0에 수렴하는 경우에서조차) 세계의 현존성을 확답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애초에 <갭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세계의 현존성-회의에 대한 근거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갭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우리는 여전히 세계의 현존성을 의심할 수 있다. 그리고 세계의 현존성에 대한 회의 근거가 인지적 갭의 존재에 독립적이라면 우리는 굳이 갭의 존재를 이유로 세계의 현존성을 의심할 이유도 없다는 결론을 연역할 수 있다. 외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갭의 존재 그 자체는 세계의 현존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아무런 논증적 타격도 입히지 못한다.
결국 (1) 시간을 천문학적인 단위로 쪼개면서까지 현존하는 세계에 시간적으로 점근해간다 해도, (2) 우리는 현존하는 세계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현재와 과거를 엄격하게 구분 짓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현존하는 세계가 어느 지점부터 시작하고 어느 지점에서 끝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1초전은 과거이고 1초 후는 미래이지만 1초전과 1초 후의 간극을 무한대로 늘려 봐도 우리는 도무지 현재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즉 세계의 현존성에 대한 귀납이 가능하다는 것 이상으로, 세계의 현존성에 대한 귀납을 통해 세계의 현존성에 대한 문제 자체를 소거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회의하는 세계의 현존성이 과거의 세계와 미래의 세계 사이에서도 찾아질 수 없다면, 우리는 현재의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정의내림으로서 현재의 세계를 개념적으로 발굴해내거나 현재라는 개념 그 자체를 거부하고 과거의 감각소여로 이루어진 세계를 곧 현재의 세계로 간주하는 수밖에는 없다.
우리는 여기까지의 논의를 통해 객관적 실재와 지각 사이에 놓여있는 인지적 갭을 근거로 물리적 세계의 현존성이 회의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살펴보았고 이러한 존재론적 회의론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여러 비판들을 검토해보았다. 우리는 또한 물리적 세계에 대한 감각소여가 언제나 과거의 감각소여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과거의 물리적 세계에 대한 과거의 감각소여와 현존하는 물리적 세계에 대한 현재의 감각소여를 구분하는 것조차 어려워 보이는 상황이 원리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세계와 지각 사이에 놓여있는 갭의 문제를 해결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계의 현존성이 충분히 귀납될 수 있음을, 그리고 그것을 만족스럽게 귀납하는 것이 불가능해야만 하는 이유 또한 없다는 점을 규명했으며 세계의 현존성-회의에 대한 마땅한 근거가 없음을 보임으로서 문제 그 자체를 소거했다.
물리적 세계의 현존성, 즉 기계론적, 인과적인 시공간의 집합적 총체로서의 세계의 현존성은 만족스럽게 공리화될 수 있다. 또한 세계는 이와 별개로 귀납될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다음 순간이 존재한다는 무수히 많은 증거들이 주어져 있으며 지금도 그 증거들을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세계는 존재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 인지적 갭을 이유로 세계의 현존성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회의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지금 존재한다는 사실은, 객관적 실재와 그 실재에 대한 지각 사이에 놓여있는 인지적 갭의 존재만으로 부정될 수는 없다. 세계의 현존성을 부정하고자 한다면 세계의 현존성에 대한 귀납과 공리화를 번복할 수 있을만한 강력한 논거와 정당화가 필요할 텐데 그러한 작업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며 설혹 가능하다 해도 세계의 현존성에 대한 공리화의 필요성과 정합성, 그리고 도구성을 고려할 때 큰 의미가 있는 발견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세계의 현존에 대한 회의가 가능하다고는 해도, 우리는 모쪼록 그 회의가능성과는 별개로 아직까지 이 세계에 존재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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