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제 논란을 돌아보며
아이유가 발매한 음원 제제(Zeze)로 세상이 꽤나 떠들썩하다. 문제의 발단은─적어도 내가 보기엔─바스콘셀로스의 자전적 제제 시리즈중 하나인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 대한 여러 알루젼을 담고 있는 아이유의 <Zeze>가 위 문학작품의 주인공인 말 안 듣는,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처럼 가난한 주제에 자존심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캐서린 뺨치게 강한) 다섯 살 제제를 성적 대상으로 묘사했다는 것. 물론 <Zeze>의 앨범재킷에 묘사돼있는 소년이 바지를 입지 않은 채 망사스타킹을 신고 있다거나 소위 말하는 핀업걸 포즈를 하고 있다거나 하는 부분마저 문제 삼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1) 포즈에 대한 해석은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2) 소설 속의 제제 역시 스타킹을 가지고 놀기 때문에 제제가 갖고 있는 성격에 관한 상징물로 스타킹을 채택한 것이 어떠한 문제가 되는 것인지는 불분명해 보인다. 앨범재킷 일러스트 속의 제제가 취하고 있는 포즈가 핀업걸을 연상시키므로 제제의 일러스트가 영스터 페티시를 함의한다는 논리는 다음과 같은 형식을 갖는다.
P1.q는 집합 Q={a, b, c}의 포즈를 주로 취한다.
P2.p는 {b}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P3.q가 주로 취하는 포즈의 집합 Q는 q를 상징한다.
Q1(P1,P2,P3).p가 취하고 있는 포즈는 q를 상징한다.
이 논증은 과연 타당한가? 다시 말해서, 전제 P1, P2, 그리고 P3이 참일 때 명제 Q1은 온당히, 즉 필연적으로(necessarily) 연역될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이 논증의 핵심적인 문제는 명제 P3의 건전성에 내재해있다. 이 약식논증(enthymeme)의 정당성을 긍정하기 위해 우리는 행위 혹은 포즈 {b}가 집합 Q, 그러니까 <q가 주로 취하는 포즈의 집합에서 독보적으로 발견되는 q의 속성 중 하나>라는 명제를 추가적으로 선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1) 행위 {b}가 Q의 여집합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행위라고 한다면, (2) 포즈 {b}가 갖는 의미는 따라서 Q-독립적으로도 해명될 수 있다는 의미이므로 {b}에 대한 해석의 범주는 집합 Q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Q의 여집합에 존재하는 임의의 집합 R(단 R⊂Qᶜ)의 원소에까지 확장될 수 있는 것이기에, (3) p가 취하고 있는 포즈 {b}와 집합 Q사이에 어떤 교집합적인 관계가 있을 수는 있다 해도 그 포즈는 동시에 다른 집합의 부분집합이 될 수 있다면 결론 Q3은 정당화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따라서 다음과 같은 논증을 발굴해낼 수 있다.
P1.q는 집합 Q={a, b, c}의 포즈를 주로 취한다.
P2.q가 주로 취하는 포즈의 집합 Q는 q를 상징한다.
Q1.r은 집합 R(단, R=Qᶜ∩U)={k, l, b}의 포즈를 주로 취한다.
Q2.r이 주로 취하는 포즈의 집합 R은 r을 상징한다.
R1(P1,Q1).포즈 {b}는 집합 Q와 집합 R의 공통분모이다.(Q∩R={b})
P3.p는 {b}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R2(P2,Q2,R1,P3).{b}의 포즈는 q를 상징할 수도, r을 상징할 수도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집합 Q와 집합 R의 공통분모에 {b}가 포함되는 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하다면, 우리는 어떤 포즈가 반드시 집합 Q에 속해야 하는 이유를 추가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이상 포즈 {b}가 반드시 q를 상징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없으며, 단지 선언 명제 R2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제제 일러스트-핀업걸 연상 논증>이 온당하다면 우리는 마찬가지로 프로이트의 정신 역학적 분석법을 통해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승마를 문란하다고 하거나 여성가족부가 과거에 그러했듯이ㅡ그것이 무엇이건 간에ㅡ길쭉한 원통형의 물건에 문란의 이름표를 붙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제제 일러스트-핀업걸 연상논증>은 앞서 귀류법에 카테고라이즈-보편화 논증을 첨가함으로서 좀 더 간편하게 분쇄될 수 있다. 가령 성관계에는 다양한 체위가 존재한다. 앉아서건 서서건 누워서건 보다 효율적으로 자손번식력을 증대시키고자 발버둥치는 불굴의 닝겐들에게 있어 불가능한 체위란 가히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모든 행위>에 문란과 관련된 어떤 표를 붙인다고 할 때 그 <모든 행위>는 논란의 대상이 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막대로 된 모든 사탕이나 아이스크림을 먹는 행위 등등은 펠라치오를 연상시킴으로 금지되어야 할 것이며 팔굽혀펴기를 하거나 스쿼트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그 어떠한 행위도 굳이 성행위와 연관 짓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므로 금지되어야 하거나 손가락질 받아 마땅할 것이다. 일러스트 속의 제제는 말하자면 그 어떤 포즈를 취하고 있어도 망사스타킹을 신고 있었다는 점에서 어떤 식으로건 비판을 받았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일러스트 속의 나무의 밑동이가 비어있었다던지 꽃이 달려있다던지 하는 다른 상징적 장치들로 인해서 어찌되었건 이런 종류의 해석은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내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제제의 앨범재킷 일러스트는 그야말로 무한 대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일러스트가 어떠어떠하다는 식으로 몰고 가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앨범재킷의 일러스트가 충분히 섹스어필로 해석될 수 있고 그것이 한국사회에서 그리고 네티즌들 사이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 자체가 해당 일러스트가 실제로 그러한 의도와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다른 해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해석의 다원성을 대변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통해 적어도 이 사안에 관해서는 해석이라고 하는 것의 내적 가치적 우월성은 없으며 단지 특정 해석의 유행만이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물론 사실관계 차원의 문제는 해석의 다원성으로도 지지될 수 없다. 합당한 반박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오히려 더더욱ㅡ사실관계를 모르는 이상ㅡ침묵하는 것이 옳다는 말을 나는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 따져 물어야 하는 것은 해석의 개연성이다. 이러한 <제제 일러스트-핀업걸 연상 논증>의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해석은 얼마나 개연성이 있는 것인가?
내가 볼 때 해석의 개연성을 묻는 것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를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즉,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그 일러스트가 섹스어필이라는 것이 도무지 무슨 문제이며 그것이 우리와 어떤 중대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어공주에도 백설 공주에도 섹스어필은 등장하며, 현재 활동중인 거의 모든 여자가수가 섹스어필을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필이면 아이유에게 비난이 쏟아져야만 하는 이유는 따라서 <섹스어필을 했기 때문>은 아니다. 섹스어필은 굳이 아이유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여가수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번 사건의 기저에 있는 핵심적인 문제를 맞닥뜨리게 된다. 아이유의 이미지에 안 맞는다는 둥 앨범재킷이 어떻다는 둥의 문제제기는 완전히 핵심을 빗나간 지적이다. 아이유가 비난받는 것은 <섹스어필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린 제제를 통해 섹스어필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린 제제를 통해 섹스어필을 한 것은 어째서 문제시 되어야만 하는가? <제제>의 가사는 확실히 제제와 밍기뉴 사이의 성관계를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유는 물론 섹시하다는 가사에 대해 <제제가 다섯 살이라는 점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제의 말괄량이 같은 짓궂지만 투명한 양면성에 대한 매력적인 성질을 표현한 것>이라 설명한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섹스를 암시하는 <Climb up me>라는 가사나 처녀성을 암시하는 듯이 보이는 <여기서 제일 어린잎을 가져가>나, 역시 성교를 암시하는 듯한 <한 번 더 닿고 싶어/여기서 매일 너를 기다려/ ...내일 밤에 또 보러 올거지> 등등의 노골적인 가사는 부인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사는 위에서 언급했듯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다. 만약 제제가 소년이거나 성인이었다면 <제제>에 대한 평은 달랐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한다. 학대당한 아이를 교활하고 더러운 음탕한 아이로 표현한 것이 문제다. 그러나 이 주장은 학대받았던 아이를 성적대상으로 표현했기에 문제라는 것인지 어린아이를 성적대상으로 표현했기에 문제라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확실한 것은 전자와 후자 모두 반론의 여지가 있다는 점이겠다. 학대받은 아이는 모두 천사 같고 착한 아이여야 하는가? 질문을 당위명제적 차원에서 사실명제적 차원으로 교체해보자. 학대받은 아이는 모두 천사 같고 착한 아이인가? 위 주장은 아이가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과 그 아이의 성격 내지 성향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바를 전제하는 듯이 보이는데 양자 간에 어떤 인과적 관계가 있는지 나로서는 알기 어렵다.
예를 들어서 현재 주어진 변수만으로 계산을 할 때 세상에는 (a) 학대받았지만 순진한 아이와, (b) 학대받은 동시에 음탕한 아이와, (c) 학대받지 않고 순진한 아이와, (d) 학대받지 않았는데도 음탕한 아이가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학대당한 아이를 음탕하다는 식으로 표현한 것>이 잘못이라는 주장은 학대당했다는 사실관계와 음탕하다는 사실관계가 양립불가능하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전제하고 있을뿐더러─즉 (b)와 (c)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있을 뿐더러─어째서인지 <음탕하다거나 더럽다>는 표현이 학대당한 아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에 관해선 여러 가지의 답변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제제라는 소설 속 인물을 어떤 방식으로 재해석하는가는 그것이 소설 속 인물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어떤 문제가 되는 것인지 알기 힘들다. 물론 제제는 바스콘셀로스의 유년시절의 자화상이기에 바스콘셀로스에 대한 예의가 아닐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이 문제는 더더욱 수십년 전 사망한 작가 본인이 기분 상해야 할 문제이지 우리가 참견할 일은 아니다. 혹자는 아마 나의 이러한 지적에 대해 <제제는 아동 학대를 당하고 있거나 당한 적 있는 세계의 모든 아이들을 위로하는 캐릭터이므로 아이유가 한 재해석은 세계의 모든 아동폭력 피해자들을 능욕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제제가 더럽다거나 교활하다는 표현은 실제로 소설에 나오는 표현이므로 이를 문제시 해야한다면 소설 속 표현 역시 비난의 화살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논변이 온당하다면, 예컨대 『미안해, 스이카』라는 문학 작품에 출현하는 여주인공은 세상의 모든 왕따 학생들의 대변인이므로 내가 그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을 디스하는 순간 나는 모든 왕따 학생들의 대변인들을 디스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수준의 일반화이며, 이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해당한다. 내가 이 소설속 여주인공의 어떤 점을 지적한다 해서 실제로 왕따를 당하는 모 학교의 모모 군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한국어 번역본에조차 충분히 오인될 수 있게끔 묘사한 부분이 존재한다는 점 역시 지적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부드러운지 시험해보고 싶지 않니?” “어떻게?” “자, 내 가지에 올라타봐.” 나는 나무가 시키는대로 하였다. “자, 됐어. 가지를 조금씩 흔들면서 눈을 감아봐.” 나는 또 시키는대로 하였다. “제제, 어떠니? 기분이 아주 좋지? 이렇게 좋은 망아지를 타본적 있니?” ...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라임 오렌지나무를 쓰다듬으며 내려왔다. ...>(42)
위 인용문은 우리에게 프라임 돼있는 무의식적인 키워드가 <성관계>인지 <아이의 순수한 상상세계>인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독해될 수 있다. 선술했듯 소설 속에서조차 제제를 지칭하는 단어로 <더럽다>거나 심지어 <악마 같다>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제제를 <더럽다>고 표현하는 것이 새삼 문제시되어야 한다면 바스콘셀로스의 작품역시 <아동학대를 당한 아이를 악마라 표현했다>는 이유로 문제시 되는 것이 합당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유가 제제를 부정적인 프레임을 갖는 단어를 통해 묘사했다는 점으로 아이유에게 어떤 잘못을 묻는다면 그는 단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어떤 문장들과 어떤 표현들이 나오는지 읽어보지도, 관심도 갖지 않은 채 함부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일 확률이 높아 보인다.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소아성애를 옹호하거나 최소한 소아성애자의 입장에서 쓴 것으로 보이는 가사는 문제가 있는가? 로리타 컨셉은 굳이 아이유가 아니라도 많기 때문에 제제 논란의 핵심적인 문제는 아니며, 다수의 사람들이 <제제>의 가사를 읽고 이상하게 느꼈다는 주장은 가사를 다르게 받아들인 사람들 역시 있으므로 의미가 없다. 이번 <제제 논란>의 핵심은 <소아성애 옹호는 온당한가?> 하는 문제에서 기인한다. 이 문제는 물론 아동에 대한 성적 대상화나 예술작품을 재해석할 수 있는 아티스트의 권리라는, 도덕과 자유의 가치적 충돌이라는 차원에서 좀 더 비중 있게 다뤄져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유는 아티스트이자 개인의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국가의 사회구성원으로서 바스콘셀로스의 작품을 재해석할 자유가 분명히 있고, 심지어 이러한 논란이 존재 가능한 것과 반대의견이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일차적으로는 표현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조명하고자 하는 논의의 맹점은 이런 뻔한 논점이 아니다. 굳이 아티스트의 자유를 정치철학적으로 연역해내지 않아도 아동에 대한 성적 대상화로 제기된 주장의 근본 전제를 논박한다면 우리는 충분히 <Zeze>에 문제가 없음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아기호증(Pedophilia) 혹은 로리타 콤플렉스(Lolita complex)로 일컬어지는 소아성애는 엄밀히 말하자면 사춘기 이전의 아이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춘기 이전의 아이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는 것은 범죄인가? 우리는 곧바로 위 정의의 애매성을 발견할 수 있다. 사춘기란 12세부터 18세까지, 2차 성징이 뚜렷해지면서 아동기에서 성인기로 발전하는 일종의 전환기라고 볼 수 있지만 처음부터 사춘기가 구체적으로 어느 연령대를 지칭하는지조차 보편적으로 합의되어 있지 않다. 세상에는 13세부터 18세까지 혹은 11세부터 14세까지가 사춘기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10세부터 20세까지가 사춘기라는 주장을 하는 학자도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소리테스 논증과 유사한 유의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된다. 사춘기의 시작지점과 종료지점이 사람마다 다르다면 누군가의 소아성애자임은 결국 성애의 대상이 되는 아이의 나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애의 대상이되는 아이의 사춘기 시작여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된다. 예컨대 만약 일곱 살의 여자아이가 환경적이거나 다른 여타의 유전적인 또는 사회경제적인 요인으로 인해 일찍 사춘기를 맞았다면, 성인이 그 여자아이를 성적으로 욕망해도 소아성애의 정의상 소아성애는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조숙한 설정>을 갖고 있는 여섯 살의 제제에게 이미 사춘기가 왔다면, 제제에 대한 성적대상화는 이미 소아성애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며, 만약 우리가 제제의 사춘기 여부를 알 수 없다면 우리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제제에 대한 성적대상화가 소아성애인지 아닌지> 역시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제제에 대한 성적대상화가 소아성애 옹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 결론이 도출된다. 제제에 대한 성적 대상화가 소아성애라면 우리는 처음부터 제제가 사춘기 이전의 소년이라는─전적으로 확답할 수 없는 사실을─전제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으므로 소아성애가 사춘기 이전의 아이에게 갖는 성적욕망에만 국한된다면 우리는 마찬가지의 이유로 제제에 대한 성적 묘사를 문제시할 수 있는 뚜렷한 근거가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혹자는 물론 제제가 사춘기 이전이므로 그런 그에 대한 19금 묘사는 소아성애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좋다. 제제가 실제로 사춘기의 소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부분이지만 일단은 제제가 사춘기 이전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사춘기 이전의 제제에게 느끼는 성적 욕망은 소아성애에 해당하는가? 앞서 살펴본 소아성애의 정의에 의하면 이 질문은 충분히 긍정될 수 있을 법하다. 그렇다면 그것이 문제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춘기 이전의 아이에게 성적욕망을 느끼는 것>이 문제라면 <사춘기 이후의 아이에게 성욕을 느끼는 것>과 심지어 <성인에게 성적욕망을 느끼는 것>은 어째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인가?
DSM-IV-TR에서도 소아성애를 정신병으로 분류하고 있기는 하지만 DSM-IV-TR은 <아동에 대한 성적욕구 때문에 아동에 대한 성적 환상을 주기적으로 체험하며 스트레스 및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초래하는 상황>을 병적인 소아성애로 분류하고 있다. 즉, <아동에 대한 성욕>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P에 대한 강한 성적욕구 때문에 P에 대한 성적 환상을 반복적으로 체험하며 스트레스 및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초래하는 것>이라는 기본 형식에서, P는 굳이 <아동>이 아니라 <젊은 여성>, <젊은 남성>, <청소년>, <성인>, <노인> 등등 그 어떠한 집단으로 상정되어도 정상적인 상황에 불편을 야기하는 부적응성(Maladaptive)에 해당되는 이상 예외없이 정신병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동일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 P는 그 어떠한 것이 되어도 문제가 되기 때문에 정신병으로서의 소아성애가 문제인 이유는 <그것이 여러 일상적 부적응성을 동반하기 때문>이지 <성욕의 대상이 아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러므로 정신병으로서의 소아성애는 <모든 소아성애>가 아니라 <일부의 소아성애>라 보는 것이 합당하다. DSM-IV-TR은 아동에 대한 성적 욕구 그 자체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다.
이를 보자면 사회에 만연해 있는 소아성애공포증은 소아를 겁탈한 범법자들이 병적인 성도착증을 갖고 있었기에 소아성애에 관해 나타난 부정적인 프레임의 결과물이라 보는 것이 합당하다. 모든 아동성범죄자가 소아성애자는 아니듯 모든 소아성애자가 아동성범죄자는 아니다. 범죄를 저지르지도, 그럴 생각도 없는 소아성애자들의 모임인 Virtuous Pedophiles가 좋은 반례다. 이 때문에 성소수자들은 그토록 수호하면서 소아성애에는 열불을 내는 일종의 대중적 위선에 나는 불만이 많다. 문제는 강간이지 소아성애가 아니다. 강간은─앞서 고찰한 정신병으로서의 소아성애와 마찬가지로─그 대상이 아동이건 청년이건 성인이건 상대의 합의없는 성교라는 점에서 동일한 위법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아성애를 문제시 할 경우 그것은 마찬가지로 이성애와 동성애를 문제시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i) <성욕>은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육체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는 것이고, (ii) 태어날 때부터 아이를 좋아했다는 소아성애자들이 있으며, (iii) DSM-IV-TR이 긍정하는 것과 같은 부적응성에도 해당하지 않는 소아성애자들이 있으므로, (iv) 그리고 선술했듯 <정신병으로서의 소아성애>는 <모든 소아성애의 집합>에 대한 하위차원의 진부분집합이며 후자가 일반이자 전자가 특수이므로 <성욕>과 <정신병>과 <강간>은 전부 서로 구분되는, 인과적으로 완전히 무관한 변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많고 많은 동성애자중 동성을 강간하는 동성애자 범법자가 있고 많고 많은 이성애자 중 이성을 겁탈하는 이성애자 범법자가 있는 것처럼 많고 많은 소아성애자중 소아를 강간하는 소아성애자가 있는 것이다. 즉 여기서 모든 소아성애자들이 곧 소아강간범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현재 주어진 정의상으로도 부당하며 <어떤 소아강간범은 소아성애자들이다>는 명제에 대한 후건 긍정의 오류일뿐더러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까지의 논의를 통해 소아성애는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이라는 결론을 귀류법과 유비논증을 통해 연역할 수 있었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보자. 만약 소아성애가 가치중립적인 개념이라면 마찬가지로 소아성애 옹호가 어떤 문제가 되는 것인지 나는 도통 알기 힘들다. 이제까지 내가 주장한 논리전개가 연역적, 정합적으로 온당하다면 소아성애 옹호는 이성애 옹호라거나 동성애 옹호와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하여 아이유의 <Zeze>가 가정폭력과 아동학대와 소아성애를 장려했다는 주장을 하고 싶다면 2015년 10월 23일의 앨범 발매일부터 지금까지 가정폭력 발생 빈도율과 아동학대 발생 빈도율과 아동 성폭행 발생 빈도율이 사회 전반적으로 몇 퍼센트 증가했으며 아이유가 제제를 성적대상으로 재해석했다는 바가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아동 성폭행의 발생빈도율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쳤는가에 관한─그것이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면 마찬가지로 아이유가 아무리 가정폭력과 아동학대와 소아성애 범죄를 장려했다 해도 그것은 아무런 실제적인 사회적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므로 따라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므로─구체적인 통계자료를 제시해야 할 것이며 그러한 통계자료가 실제로 있다면 <Zeze 발매>라는 독립변수 x가 <아동성폭행>이라는 종속변수 y에 어떻게 그리고 얼마만큼의 인과적 영향을 미쳤으며 제 3의 변수 아포리아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변수를 염두에 둔 후 제제발매라는 변수 단 하나가 사회경제적으로 미친 전반적인 영향을 명확하게 분석해서 각 원인과 결과가 양자 간에 인과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아니라면 단지 상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 뿐인지 사회과학적으로 엄밀히 규명한 후에야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제제>의 소아성애 옹호가 곧 소아성애로 인한 범죄발생 확률 증가에 기여한다는 주장은 논박되었으며, 만약 이 주장이 신빙성있다면 마찬가지로 이성애 옹호는 이성애로 인한 범죄 발생 빈도를 상승시킬 수 있고 동성애 옹호는 동성애로 인한 범죄발생빈도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잘못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유비논증을 사용해보자면─이성애를 다루고 있는 모든 미디어 매체는 전부 문제가 있거나 금지해야 한다는 결론 역시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고 사랑을 다루는 모든 매체는 거의 언제나 사랑을 옹호하는 방식으로 시청자를 암시하게 되기 때문에, 그리고 이 세상에서 표면적으로건 상징적으로건 이성애 옹호가 빠져있는 미디어 매체는 거의 없으므로 사랑이나 로맨스나, 남녀 간이나 동성 간이나 좌우간 사랑을 다루는 모든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노래 등등을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미디어 매체는 그와 관련된 범죄를 야기할 수 있으므로 금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이유의 <제제>가 소아성애 옹호적이라는 주장은 재고되어야 하고, 그것이 실제로 소아성애 옹호적이라 해도 그것이 어째서 문제시 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부가적인 정당화가 필요하며, 설령 <제제>가 실제로 문제시 된다 해도─그것이 타인에게 무고한 피해를 끼치지는 않는다는 한에서─아이유는 민주국가의 시민이자 사회구성원으로서 바스콘셀로스의 작품을 재해석할 권리가 있는 엄연한 아티스트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Zeze>가 아무리 선정적이라지만 이제까지 이보다 선정적인 노래는 수없이 많이 발표되었으며 <Zeze>가 <강간옹호>나 <소아범죄 옹호>가 아닌 <합의 하의 성관계>를 다루는 만큼 그것이 어떤 문제가 되는지 알기 어렵다. 만약 소설 속의 제제가 가정폭력 뿐만 아니라 성적학대를 당했다면 문제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고, 만약 그러하다면 <제제 논란>은 다른 층위의 도덕적인 문제로 연결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제제는 어디까지나 가정폭력 만을 당했고, 밍기뉴와 노는 장면은 충분히 19금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으므로 <Zeze>를 특별히 문제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마찬가지로 <제제>의 앨범재킷에 관해 아이유는 해명할 필요가 있지만 역으로 볼 때 아이유가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기 전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추측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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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받을 만한 사안도 아닌데 비난받는 아이유가 안쓰러워보여서 써보았다. 민주사회에서는 누구나 상대에게 돌을 던질 자유가 있지만 자유가 있다는 것은 그만한 책임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로티우스나 아리스토텔레스나 홉스와 플라톤이 공화정치체제를 그렇게 반대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돌을 던지려면 이유를 확실히 알고 던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