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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EAMER Jun 13. 2017

당위명제와 미적명제의 건전성에 대하여 (2)

1.행복은 그 자체만으로 내적 가치가 있다. 모든 사람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설령 행복을 원치 않는다 말하는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마조히스트도 쾌락을 위해 고통을 추구하며, 자살을 바라는 사람도 고통의 종료를 추구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 어디의 누구라도 행복을 원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러나 행복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에 관해 사람들은 의견을 달리한다. 돈과 명예를 통해 행복감에 도취되는 사람, 범죄행위를 통해 행복을 느끼는 사람, 타인의 인정과 권위를 통해 행복을 느끼는 사람 등등 사람들은 저마다의 행복을 좇는다. 그렇다면 행복이 객관적인 가치에 해당한다 해도 여기서 말하는 객관적인 가치란 결국 공허한 개념이 아닌가? 행복을 야기하는 조건들의 집합 x와 행복한 상태의 집합 y에 대한 순서쌍 (x,y)를 만족하는 상황이 존재한다면 그런 상황은 어떤 상황이며, x변항에 대입될 수 있는 원소들에서 어떤 공통분모를 발견해내는 것은 좌우간 가능한가?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방법을 통해 행복을 느끼는 이상 우리는 x의 원소가 단일한 개념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객관주의적인 견해보다는 x의 다원성을 지지하는 상대주의적 스탠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적 선과 피상적 선을 구분할 때 상대주의는 그 힘을 잃는다. 돈과 권력으로만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을 진 몰라도 진정 중요한 것, 요컨대 <원해야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면 그들은 실상 행복보다는 불행에 더 가까워진 셈이다. 피상적 선에 집착한 결과 진정 중요한 건강과 우정과 지식, 곁에 있는 사람을 소홀히 하면서 결국엔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걸어가는 자를 보라. 황금을 갈망한 미다스의 끝이 어떠했으며 관능적인 쾌락에 집착한 쥘리앵과 테레우스는 어떠했는가? 권력과 명예를 중시한 아가멤논과 클로디우스, 이아손이 맞닥뜨려야만 했던 결말은 또 어떤가? 모티머 아들러에 의하면 행복은 <피상적 선의 충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 선의 충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여기서의 행복은 결코 단일한 요소만으로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실제적 선을 이루는 요소들을 포괄하는 다양한 변수들의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다.

2.우리는 앞서 실제적 선과 피상적 선을 구분했다. 전자에 대한 판단이 참/거짓 층위에 해당한다면 후자에 대한 판단은 취향적인 사안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적 구분법에 따르면 건강 없는 부와 권력은 무용하고, 사랑 없는 관능적 쾌락에의 집착은 객관적인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일시적 행복에 대해 논하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지금 당장 마약을 통해 느끼는 짜릿함은 약효가 풀릴 때의 허무감과 맞바꾼 일시적인 쾌락일 뿐, 실제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은 아니다. 따라서 거기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모티머 아들러에 의하면 이와 같이 <옳은 갈망과 그른 갈망의 구분 없이 무분별하게 피상적 선에 대한 추구에 행복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잘못이다. 장기적 관점에서 <실제적 선>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는 아들러의 행복 개념은 결과적으로 개인의 인생 전체로 뻗어가게 된다.

만약 행복을 이루는 요소인 (것으로 생각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가치적 검토가 장기적 관점에서만 오롯이 수행될 수 있다면 행복은 <실제적 선들 중 하나>에 불과한 그 무엇은 아닐 것이다. 아들러가 말하듯 행복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최고선(summum bonum)>이 아니라, <실제적 선의 총합(totum bonum)>이다. 바로 여기서 다음과 같은 명제가 발굴된다: 만약 개인이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모든 실제적 선의 총합이 행복이라면 우리는 결코 삶의 어느 한 지점을 가리키며 여기서 행복이 달성되었다거나 어디부터 어디까지 행복이 유지되었다는 둥의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행복은 다른 모든 실제적 선과는 달리 종점이나 목적지가 없다. 건강은 육체의 모든 기능에 결함이 없거나 살아가는 데에 별다른 불편함이 없을 때 달성되며 지식이든 우정이든 사랑이든 아들러가 실제적 선이라 부르는 요소들은 모두 어느 지점에서 얻어지거나 도달될 수 있는 지점이지만 행복은 다르다.

3.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약물복용을 통한 몇 시간의 쾌락과 찰나에 불과한 오르가즘의 쾌락이 그야말로 일시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실제적 선에서 탈락되어야 한다면, 마약을 통해 영겁의 쾌락을 맛볼 수 있는 경우는 어떠한가? 아들러는 여기서 논점 선취의 오류를 범하는 듯하다. 무한대의 쾌락을 선사하는 쾌락기계가 존재한다면 그 쾌락기계를 통해 느끼는 영겁의 쾌락은 행복인가, 아니라면 적어도 실제적 선에 해당하는 것인가? 실제적 선의 가치적 기준점이 장기적 관점에서의 공리주의적 손익으로 계산되는 그 무엇에 불과하거나 혹은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환원될 수 있다면 <실제적 선>과 <피상적 선>의 구분은 위와 같은 사고실험에서 그 의미를 잃는다.

4.그러나 객관적 의미로서의 선이 없다면 그 어떠한 국가도 <각 사회구성원들의 행복 증진과 공익을 위한다>는 주장은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아들러는 이 사실을 이를테면 선의 객관성을 연역해내기 위한 귀류법의 전제로 사용한다. 모든 선이 기준점-종속적인 상대주의적 개념으로 전락한다면 <공익>은 내적 모순을 갖고 있는 공허한 용어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ㅡ홉스가 말한 것과 마찬가지의 맥락에서ㅡ공익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하고 여기서 말하는 공익이 각 사회구성원들의 행복증진과 안녕을 의미한다면 국가야말로 어떤 객관적인 가치로서의 선 개념을 전제해야만 온전히 기능할 수 있는 기관이 아닌가? 써얼이 지적하듯 경찰과 군대는 범죄를 막기 위한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status function을 갖는 집단이며 이들은 민주국가에서의 사회구성원들의 행복증진 및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해 존재한다.


국가는 요컨대 객관적인 가치로서의 선을 상정해야만 존재 가능하며, 이렇게 세워진 국가에는 선 개념에 반대하거나 선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구성원을 추방하거나 사살할 권리가 부여된다. 그런데 우리는 국가가 이러한 객관적인 선 개념과 사회구성원들의 행복증진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ㅡ가령 살인범이나 강간범들ㅡ을 처벌하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이러한 것을 당연히 여긴다는 것은 우리 역시 국가의 선 개념이 객관적이라는 데에 이미 동의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우리 자신의 선 개념에 당위성과 보편성을 부여해 그것에 부합하지 않는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는 사회구성원들을 억압하는 활동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객관적인 가치로서의 선은 분명 존재하는 것 같다. 무고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타인의 행복을 무시하는 것이므로 지양돼야 한다. 우리 모두가 행복을 원한다면, 그리고 우리 모두가 동등한 인격체라면 타인이 우리의 행복을 침해할 자유가 없듯 우리 역시 타인의 행복을 침해할 자유는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비인지주의적 반실재론적 명제는 부정된다. 이러한 스탠스의 연장선에 있는 보편적 이기주의는 롤즈가 지적하듯 규범윤리의 가능성을 부정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규범윤리 이론의 하나로 간주될 수 없다.


물론, 여기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국가가 시민의 공익을 위한 거시적인 사회집단이라 해도 이때 말하는 공익은 각 사회구성원들의 가치관을 전부 반영한 어떤 이상향의 이룩이 아니라 각 사회구성원들이 최대한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민주국가를 이끌어가는 정부는 일종의 국가정책기관으로서 행복한 삶의 최소 조건인 사회질서와 안녕 등등을 제공할 의무가 있으며 시민들은 그러한 혜택을 받는 조건으로 세금을 낸다. 때문에 국가는 실제적 선이 무엇인지,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일말의 가치관도 전제하고 있지 않으며, 단지 각 사회구성원들이 행복을 찾아 나서기 위한 최소한의 환경을 제공할 뿐이다. 즉, 범법행위 근절을 통한 사회질서 도모나 사회복지를 통한 총체적인 사회적 안녕도모는 사회구성원들의 <행복한 삶>에 해가될 수 있는 요소를 없애거나 적어도 그 가능성이 0에 수렴하게끔 일조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회질서와 치안유지 등등의 요소가 충족된다 해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아들러의 지적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각 사회구성원들의 행복증진과 공익도모>라는 민주국가의 존재목적은 기실 <각 사회구성원들의 공익과 행복증진에 해가될 수 있는 요소를 최소한도로 줄임으로써 국익을 창출하고 사회구성원들의 행복한 삶을 위한 최적의 환경을 조성하는 것>으로 교정돼야 옳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실제적 선 개념이 상대적이라도 <공익>이라는 개념은 흔들리지 않는다. 행복한 삶을 위해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환경이 있을지는 몰라도 행복한 삶을 위한 충분조건은 여전히 상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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