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나는 A에서 미적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명제는 내가 A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이 사실일 때 참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는 A에서 미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따라서 당신은 틀렸다>라고 주장할 순 없다. A에 대한 미적 경험의 여부는 주관적인 가치판단에 의한, 취향-종속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A는 아름답다>는 명제는 어떠한가? 이 명제는 <나는 A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는 식의 판단명제적 언술이 아니다. 위 명제는ㅡ그것을 보는 주체의 감상과는 무관하게ㅡ대상 A에 대한, 혹은 A가 갖고 있거나 충족하고 있는 어떤 요소들에 대한 사실적 층위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의 객관성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는 사람, 다시 말해 주관적 취향에 불과한 사안을 다루는 것으로 보이는 미적 명제에 대한 건전성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
아퀴나스는 아름다움의 조건으로 일관성(unity), 균형(proportion) 등등을 꼽는다. (이 조건들은 일견 포스트모더니즘적 예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본질적으로 양립불가능해보이지만 만약 포스트모더니즘이 <비일관적 일관성>과 <비균형적 균형>을 추구하는 작업이라 볼 수 있다면 여기에도 아퀴나스의 정의는 적용될 수 있을 듯하다.) 그렇다면 미적명제에 대한 건전성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란 이러한 아름다움의 조건들을 보다 정확하게 검토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인가? 내가 (P)<A는 아름답다>고 할 때, 명제 (P)가 객관적으로 틀렸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그렇다면 가능한가? 모티머 아들러에 따르면 이는 충분히 가능하다. 가령 도자기 장인이 갖고 있는 미적 감각은 막 도예에 입문한 사람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도자기의 미적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것은 도자기 장인이 할 몫이지 도예입문생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아이키아 효과의 희생양이 된 우리의 도예입문생이 <내가 만든 이 도자기는 아름답다>고 주장할 때, 도자기 장인이 <그 주장은 거짓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미적명제의 건전성은 그것이 마치 전문가의 미적판단에 종속적이며 따라서 그 미적명제가 전제하고 있는 특정한 객관적 미적가치판단 역시 오직 전문가만의 전유물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엔 두 가지의 문제점이 있다: (1) 단지 전문가들이 아름답다고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실제로 특정 대상의 아름다움이 연역될 수 있는 것인지 애매하다는 점과, (2) 전문가들마저 서로 반대하는 사안에 있어서 미적명제의 진릿값을 규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미적명제를 논증적으로 변호할 수 있는 능력과 그만한 미적 감각을 겸비한 전문가들만이 미적명제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아들러는 나의 이러한 지적에 대해 충분히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아들러는 전문가들의 의견충돌을 통한 미적명제의 주관성 옹호 내지 비인지주의적 스탠스 옹호가 잘못이라고 본다. 특정한 미적명제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충돌이 있다고는 해도 그들이 논증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변호하는 한, 그것은 다투어질 수 있는, 즉 토론의 가치가 있는 문제이며, 바로 그 때문에 전문가들은 미적명제에 대한 특정한 스탠스에 합의하거나 동의하거나 반대할 수 있다. 비전문가는 취향을 표출(express)하는 것 이상으로 미적명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학적 능력이 없지만 전문가는 미적 명제를 취향적인 가치명제에서 참/거짓 층위의 사실명제적 언술로 끌어올릴 수 있는 힘이 있다. 전문가들의 의견 차이는 이러한 맥락에서 극복될 수 있는 스탠스 차이에 불과하다.
2.그러나 이 말은 <취향>을 <열등한 취향>과 <우월한 취향>으로 이분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가령 클래식 음악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이 베토벤 3번의 지루함을 이유로 베토벤 협주곡 3번의 가치를 무시하는 반면 베토벤 전문가들과 연주가들은 베토벤 3번을 높게 평가한다면, 우리는 모티머 아들러의 견해에 따라 전자를 열등한(즉 설득력 없는) 취향으로, 후자를 우월한(즉 설득력 있는) 취향으로 간주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들러는 이에 대해 두 가지의 답을 제시한다. (1) 대상에 대한 미적 판단은 주관적인 취향에 대한 판단이기도 하지만 그 판단은 때때로 어느 정도의 객관적인 진실을 함의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2) 특정 대상에 부여된 미적가치는 주관적이 아니라 객관적이라는 것이다. (2)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을 위해 아들러는 다음과 같은 일종의 귀류법을 제시한다. 만약 특정한 예술 작품의 미적가치가 판단주체의 주관적인 견해에 종속적이라면 열등한 취향과 우월한 취향은 결코 구분될 수 없을 것이고, 양자가 구분될 수 없다면 그것은 특정 작품에 대한 전문가의 견해와 비전문가의 견해에 하등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다섯 살 아이가 말하는 <베토벤은 구려>라는 말과 카라얀이 말하는 <베토벤은 굉장하지>라는 평가는 동등한 무게를 갖는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특정 작품이 갖는 내적 우수성의 정도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케이팝스타에 나간다면 나는 내 목소리를 저평가하는 심사위원들에게 <시끄러워. 내 목소리의 가치는 내가 정한다!> 따위의 말을 지껄이며 나의 주장이 전문가들의 주장과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전문가의 견해와 비전문가의 견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그것은 미적 가치의 위계를 구분 짓는 모든 시도들, 요컨대 문학작품과 시, 음악과 춤, 그림, 노래, 패션, 음식 등등에 대한 모든 종류의 전문적인 평가를 무효화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제프 버넷이 브루노 마스보다 노래를 잘한다던지 정준하가 에미넴보다 랩을 잘한다던지 내가 일주일 전쯤 끄적인 시가 엘리엇의 시보다 훌륭하다던지-하는 주장이 헛소리가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이다.
3.나는 한 때 음악도였던 사람으로서 미적명제의 객관성에 대한 아들러의 논증에 설득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제프 버넷이 브루노 마스보다 노래를 못하고 정준하가 에미넴보다 랩을 못한다는 것은 사실관계다. 제프 버넷은 발성부터 엉망이고 정준하는 애초에 프로 래퍼가 아니기 때문이다. 박자와 음정이 엉망인 차이코프스키를 훌륭하다고 할 수 없듯이 미적명제에는 일말의 객관성이 존재한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예술계를 뒤엎을 때만 가능하다. 아름다움과 좀 더 우수한 것이 존재불가능하다면 술취한 동네아저씨의 흥얼거림과 이소라의 노래는 완전히 동일한 무게의 가치를 갖거나 둘 다 가치가 없으며 마찬가지로 내 필력과 카뮈의 필력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좀 더 나아가서 도덕적 유비논증을 사용해보면 <카뮈의 필력은 나의 필력과 별다른 차이가 없으므로 사람들은 카뮈를 좋아하는 것만큼 나의 글을 좋아해야한다!>는 식의 헛소리도 정당화된다. 우수성에 객관적인 척도가 존재할 수 없다면 이 모든 주장은 참이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아들러의 지적이다.
물론, 여기엔 분명한 바운더리의 문제가 있다. 그레이와 자이언티 중 누가 더 노래를 잘 부르는지, 비와이와 씨잼중 누가 랩을 더 잘하는지, 베토벤과 스트라빈스키중 어느 쪽이 더 뛰어난 작곡가인지, 골웨이의 프로코피에프 해석과 최나경의 프로코피에프 해석중 어느 쪽이 탁월한지 하는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애매성의 문제가 존재한다 해서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애매한 경우가 있으므로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의견에는 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미끄러운 경사면 오류(slippery slope)>에 불과하다. 즉, 위 예시는 오히려 비슷한 가치를 갖고 있는 무엇에서 더 우수한 쪽을 골라야하는 상황에서의 미적 명제의 객관성을 어떻게 판가름해야할지-하는 지점에서 그치는 문제일 뿐, 상반되는 가치를 갖는 무엇ㅡ예컨대 내가 끄적인 졸라맨 그림과 피카소의 그림ㅡ에서 더 우수한 쪽을 골라야하는 상황에서의 판단이 애매하다는 점을 보여주진 않는다.
그러나 모티머 아들러도 인정하듯 미적명제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이 절대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은 그로테스크한 현대음악 이를테면 진은숙의 곡이나 쉐이퍼나 쇤베르크나 쇼스타코비치 같은 사람들의 곡에서 아무런 아름다움도 찾아볼 수 없거나 최소한 그 진가를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설령 모든 전문가들이 특정 현대 음악의 우수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말이다. 가령 나는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삐에로>를 좋아하고 진은숙의 피아노협주곡이나 리게티의 곡들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그로테스크한 곡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작품들에 대해 공부해본다면 이 곡들에서 일말의 매력을 알아볼지도 모르겠지만 이 역시 미적 판단의 주관성을 극복해낼 수는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아들러는 미적가치 그 자체와 아름다움을 구분한다. 즉, 기괴한 현대곡들은 아름답지 않을 순 있어도 미적 가치는 존재한다. 예술에 있어서 전문가란 바로 이 미적가치를 설득력 있게 논증하거나 논증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대중과 전문가의 의견 차이는 해소될 수 있다. 미적가치가 없어도 누군가는 내 목소리를 좋아할 수 있듯이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해 각기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지 몰라도 미적 가치의 객관성에 대해선 어느 정도의 합의를 볼 수 있다. 때문에, 미적명제는 이제 객관적 층위와 주관적 층위로 구분된다. 전자에 당위성이 존재한다면 후자에는 당위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제프 버넷이 브루노 마스보다 노래를 못 부른다는 것에─그것은 사실관계이므로─동의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프버넷보다 브루노 마스의 노래를 더 좋아해야할 이유는 없다. 전자는 미적가치 내지 미적 우수성에 관한 객관적인 층위의 사안이며 후자는 호오(好惡)나 취향에 관한 주관적인 층위의 사안이다.
4.물론, 모티머 아들러는 미적명제의 객관적 층위/주관적 층위 구분에 대해서만 말할뿐 미적명제의 당위에 대해선 오히려 침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보자면 나는 모티머가 말하는 선에 대한 명제의 당위성에 회의적인 반면 아들러가 부정하는 미적명제의 당위성에 대해 긍정적인 스탠스를 갖고 있다. 아들러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설계된 성당 중 어느 쪽의 미적가치가 우수한지 결코 알 수 없으며 그것은 양자가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ㅡ즉 다른 기준점을 요하는ㅡ크리테리아에 의해서만 온당히 평가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아들러의 지적에 동의하지만 이 사실이 미적 명제의 당위성을 부정하는 데에 충분한 논거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아들러의 주장에 따르면 상이한 카테고리에 속하는 예술작품의 객관적 우열을 판가름 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특정 카테고리 내에 속하는 예술작품의 객관적 우열을 판가름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과 고딕 양식 건물의 우열을 정할 순 없지만 <고딕 양식 건물이라면 조건 x, y, z를 충족해야만 한다>는 식의 주장은 여전히 할 수 있다. 그 조건은 이를테면 얇은 벽두께와 큰 창문이랄지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와 가느다란 석재기둥을 통해 넓힌 내부 공간 등등이다. 우리는 요컨대 <고딕 양식건물의 조건>을 상정함으로써ㅡ플라톤의 설명과 유사한 맥락에서ㅡ이상적인 고딕 건물의 조건에 가장 부합한 고딕건물이 가장 우수한 고딕 건물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클래식과 재즈는 구분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클래식 내에 모차르트를 연주하는 옳은 방식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작곡가가 포르테를 연주하라고 지시해놓은 부분에서 피아노를 연주한다면 그것은 잘못 연주한 것이며 안단테를 프레스티시모로 바꿔 연주하는 것 또한 잘못이다. 그렇다면 클래식을 재즈로 편곡하는 크로스오버 아티스트는 어떠한가? 거기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애초에 재즈는 클래식과는 아예 다른 장르ㅡ즉 클래식과는 다른 기준점을 요하는 장르ㅡ이기에 모차르트의 재즈편곡 버전을 고전 음악적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만약 이것이 문제되는 경우가 있다면, 멋대로 모차르트를 해석하는 사람이 본인은 클래식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다. 모차르트 재즈편곡 버전은 클래식이 아니라 재즈다. 즉 도를 넘은 해석의 파격성은 그것이 특정 장르에 메타적인 접근일 때만 허용되는 것이지 해당 장르 내에서 허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적명제의 당위성은 장르-종속적이다. 쇼팽 콩쿨에서의 쇼팽을 거슈윈같이 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지만 재즈 페스티벌에서라면 그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만약 여기까지의 논의가 합당하다면 장르 내에서의 <미적명제의 상대적 다원성 옹호>는 장르를 파괴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미적명제의 당위성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는 아들러의 스탠스가 근본적으로 예술을 부정할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문학평론, 음악평론, 영화평론 등등을 포괄하는 모든 종류의 예술평론에 모종의 가치명제가 전제될 수 없다면 예술계 전체는 무너지는 탓이다. 훌륭한 그림과 볼품없는 그림이 구분되지 않는다면 미대는 무용하며 훌륭한 연주와 형편없는 연주가 구분되지 않는다면 음대는 불필요하고 예술을 주제로하는 모든 오디션 프로그램은 무의미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술은 미적명제의 가치적 우열을 인정하는 지점에서만ㅡ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적명제를 논증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지점에서만ㅡ시작될 수 있다. 만약 미적명제의 가치적 우열이 예술의 필요조건이라면, 우리는 예술을 위해 미적명제의 객관성에 대해 침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