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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EAMER Jun 13. 2017

Guten Morgen, 21

시계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날아다니는 경비행기가 모기처럼 앵앵이며 고막을 진동시킨다. 저주파를 발산하는 무거운 트럭 엔진소리와 그에 대조적인 새들의 지저귐이 공기를 채운다. 얇은 눈꺼풀 사이로 스며드는 어슴푸레한 빛이 광수용체를 자극한다. 손가락은 비로소 이불의 부드러운 감촉을 자각한다. 일출과 함께 밀려드는 두통이 혼탁한 정신을 꼬집는다. 소인족들에게 몸이 묶인 채 공격당하는 듯한 느낌에 반사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나는 의식의 활동을 멈추기 위해 눈을 가리고 시교차상핵의 피드백 시스템을 막는다. 그럼에도 아침이 다가왔다는 진실은 광수용체에 의해 누설되고 만다. 전기자극을 받은 두뇌가 잠에 취해있는 의식체계를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위해 신경전달물질을 내보내는 느낌이 들자 나는 비협조적인 시상하부에 나지막한 불평을 토로한다.

잠에서 깨는 것은 고통이다. 마취가 풀리는 고통이자 무감각이 감각으로 대체되는 그런 고통이다. 간밤 사이 이불과 침대를 잇는 접착제가 돼버린 몸을 뜯어내기 위해선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그마저도 잠에서 깨는 고통보다는 덜하다. 만취 상태의 의식이 나를 질질 끌고 간다. 나는 데카르트와 쇼펜하우어와 몽테뉴를 생각한다. 세기의 잠만보들. 잠에서 깨는 고통을 이해한 게으른 위인들!

도플러 효과를 생각하며 경비행기의 위치를 그려본다. 앵앵거리는 소리는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멀고먼 동쪽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 하늘색 소리는 이내 사그라든다, 누군가가 스피커의 볼륨을 서서히 낮추고 있다 해도 믿을만한 속도로. 되도록 천천히 감각을 곱씹는다. 감각을 이루는 성분 하나하나의 맛을 음미하듯 모든 감각소여를 얇게 썰어 지각한다. 소리가 가시적인 사인곡선이 되고 촉감이 모종의 미시적인 전기화학적 스티뮬러스가 될 때까지 곱씹다보면 나른함이 몰려온다. 무거운 추를 발목에 매고 영겁의 나락으로 추락해가는 아득한 느낌이 관능적으로 손짓한다. 무의식으로 뻗어있는 무감각적 세계로의 초대다. 고막을 진동시키고 달팽이관을 흔들던 사인곡선은 이제 까마득한 일차원의 점으로 사라진다. 나는 더 이상 경비행기를 지각할 수 없다. 지각할 수 없을 만큼 멀리 가버렸거나, 지각하지 못할 만큼 잠에 취해버렸거나.

이미 감겨있는 눈을 감고 사라져버린 비행기 동체의 자취를 뒤적인다. 문득 잊어버린 꿈 하나가 떠오른다. 무의식상으로 용해된 얼마 전의 꿈인지 오래전 망각해버린 꿈의 일부인지는 알 수 없으니, 단지 떠오르는 이미지들의 윤곽에만 집중한다. 스쳐가는 꿈의 이미지들에는 불타 사라져가는 사진이 주는 애틋함이 있다. 닿을 듯 말듯 조각난 꿈의 기억이 자아내는 어떤 종류의 상실감이 있다. 그래,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잊혀진 꿈들이 있다. 조심스러운 생각의 손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바스락거리며 숨어버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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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위에 생각을 쌓고 생각 위에 생각을 쌓아올린다. 생각에 깔려있는 듯한 느낌이 의식을 질식시킨다. 나는 생각과 생각을 잇는 공백이다. 나는 생각을 하는 생각이다. 감각수용기가 달린, 하나의 추상적 집적물에 불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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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세계와 잠을 구분 짓는 경계선에 도달한 의식은 생각의 자유를 박탈당한다. 잠은 고통을 담보한다. 잠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나른함은 잠으로부터 빠져나오는 피곤함을 지불한 결과다. 피곤함의 피곤함에 찌든 사람들이 아늑한 잠의 동굴을 찾는 것, 지칠줄 모르는 위대한 영혼들마저도 저 소리 없는 무의지의 세상으로 떠나는 것은 잠인 것과 잠 아닌 것 사이에 망각의 강 레테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잠으로의 초대는 말하자면 망각으로의 초대다. 기억을 상실하는 황홀감과 기억을 되찾는 추상적 불쾌감이 혼재하는. 어쩌면 잠에서 깨는 고통은 감각의 기억에 대한 고통뿐만 아니라 의식-있음의 기억과 기억-있음의 기억에 대한 고통이 섞인 그 무엇일지 모른다.

벌써 깨어난 지 384초가 흘렀다. 첫 번째 소수의 7제곱에 3을 곱한 값이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케도니아의 스타게이로스에서 탄생한 해이다. 초침세기를 중단하면 아마 그대로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지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나는 달콤한 불안감을 천천히 녹여 삼킨다. 무아지경의 손가락들이 이불의 푹신한 가장자리를 애무한다. 감겨 있는 시야의 여백 사이로 글자 조각들이 떠오른다. 고양이를 쓰다듬듯이 느긋하게 움직이는 언어기호들이다. 글자들은 어느새 발을 질질 끌며 걷는 노인이 되어있다. 주름으로 덮인 노인의 이미지가 불분명하게 흔들리다 이내 어두운 여백 속으로 사라진다. 들리지 않는 노인의 흥얼거림이 귓가를 간지럽히자 손가락 끝에선 햇빛이 느껴진다. 나는 눈을 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오늘의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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