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대 엔드류 젝슨- 2 of 2 : 미국왕 엔드류 1세 1829-1845
14살 어린 나이에 부모는 물론 형제까지 모두 잃고 고아가 된 사람이 인생을 어떻게 전개해 나갈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7대 대통령 ‘엔드류 젝슨’(Andrew Jackson. 1767.3.15 – 1845.6.8)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어린 고아가 커나가면서 변호사, 농장주, 노예거래상, 상원 및 하원의원, 주 대법원 판사, 육군 소장 그리고 대통령(1829-1837)에 이르는 화려한 이력을 갖게 되고 평가도 다양한 역사적 인물이 됩니다. 185 cm(6 feet 1 inch)의 훤칠한 키로 다수 국민(백인)의 뜻과 희망을 대변했던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그는 미국 서부 개척의 선봉장, 많은 노예를 소유한 남부의 상류층, 평민이 지닌 지혜를 활용한 대중주의자, 민주주의 정신을 펼친 정치가, 미국헌법주의 근간을 함양시키면서도 반대파를 짓누르고 법을 유린한 독선적 선동주의자라는 평가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불같은 성격으로 일대일 결투도 여러 번 벌여 상대를 살해하기도 한 그는 1928년부터 미국의 20달러 지폐에 흉상이 들어있어 세계인에게 익숙한 얼굴이 되었지만 이제는 미국 원주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정책을 자행한 이유로 그 모습이 곧 사라질 운명에 있습니다. 업적에 대한 다양한 평가로 칭송과 비난이 교차하는 ‘엔드류 젝슨’(이하 엔드류)에 대해 살펴봅니다.
[聞修] 드디어 대통령에 출마하는군요!
[海月] 때가 온 거야. 1819년 미국을 찾아온 경제공황으로 장군직에서 물러난 후 먼로 대통령에 의해 이듬해 신설된 후로리다 부속령 주지사 자리를 맡게 된 엔드류는 건강상 이유로 두 달 만에 사임했잖아. 그리고 몸을 추스르면서도 지지파들의 등살에 1822년에는 182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것을 약속했었지. 태내시 주 의회에서 후보자로 선출된 엔드류는 대선 켐패인을 벌이는 동안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태내시 주 몫의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해 1823년 10월에 연방 상원의원이 되었어. 상원의 ‘군사위원회’(Committee on Military Affairs) 위원장을 맡아 그동안 척졌던 사람들과 화해하며 지원군을 은연히 만들어 나갔지.
[문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했나 보죠?
[해월] 당시 민주적-공화당의 유력 주자에 ‘윌리엄 크로훠드’, ‘쟌 퀸지 에담스’, 핸리 클레이’ 그리고 ‘쟌 켈훈’등이 진을 치고 있었지. 엔드류의 측근들이 ‘엔드류 대통령 만들기’ 작전을 하나씩 전개해 나가기도 했지만 결단력이 있고 기존 당파성에서 독립적 이미지를 가진 전쟁영웅에다 1812년의 전쟁 이후 투표권이 확대된 백인남성들에게 인기를 한 몸에 갖게 된 엔드류는 단연코 선두주자로 발돋움하고 있었지. 게다가 선거에 임박해서는 민주적-공화당 당원들이 대통령후보를 항상 의회지명대회 (congressional nominating caucuses)를 거쳐 뽑는 선례를 거부하고 각주에서 지명위원회와 주 의회에서 선출하도록 결의했어. 왜 바꾸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중으로부터 인기가 있던 엔드류에게는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지. 우선 팬실베니아 주 전당대회에서 후보로 지명받게 되자 엔드류는 일약 전국적 스타가 되었어. 연달아 여섯 개 주에서 승리를 더하자 더 이상 엔드류의 대선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지.
[문수] ‘따 놓은 당상’이라더니 바로 엔드류를 보고 하는 말인 것 같네요.
[해월] 모두가 그렇게 믿었을 거야. 1824년 10월 미국 역사상 10번째 갖는 대통령선거에서 4명의 후보가 난립하는 가운데 선전을 한 엔드류가 국민투표에서 42 퍼샌트 지지표를 획득하고 선거인단 전체 261표 중 99표나 얻으면서 파란을 일으켰지. 선거인단 투표에서 경쟁자 ‘쟌 퀸지 에담스’(John Quincy Adams)는 엔드류보다 적은 84표를 얻고, ‘윌리엄 크로훠드’(William Crawford)가 41표 그리고 ‘핸리 클레이’(Henry Clay)가 37표를 얻어 131표를 얻어야 승리하는 선거에서 누구도 과반표를 얻지 못했어. 본선거에서 대통령을 결정하지 못했을 경우 선거 규정상 하원에서 ‘비상선거’ (contingent election. 번역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번역이 가능함)로 선출하도록 했기 때문에 하원으로 넘어갔고, 하원의 ‘비상선거’에는 1차 선거 최하 득표자인 핸리를 제외한 세 사람이 겨루었지. 1825년 2월 9일 치러진 하원의 ‘비상선거’에서 전체 24개 주 대표들이 각 한 표씩 행사한 표 중에 크로훠드가 4표를 얻은 가운데 엔드류가 13대 7로 퀸지에게 아깝게 패하고 말았어. 본선거에서 국민투표와 선거인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엔드류는 패배에 놀랐지만 한편 주위에 지지자들을 다수 결집하는 역량을 크게 보여주기도 했지. 한편 비상선거에 나서지 못한 클레이가 퀸지의 국무장관직 제의를 받아들여 지지표를 몰아주는 바람에 선거에 이겼다고 엔드류와 지지파들은 믿었고 이를 ‘정치야합’이라 몰아붙이기 시작했지.
[문수] 그만큼 승리했으니 앞으로 4년간 힘을 기르면서 차기를 준비했겠지요?
[해월] 엔드류는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후 의회회기가 끝나자 몇 개월 만에 상원의원직을 사임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어. 앞 편에서 살펴본 대로 퀸지는 재임기간 동안 의회의 방해와 비타협적 성품에 엘리트적 행동으로 대중에게 인기를 잃은 반면 이를 직시한 엔드류 지지자들은 그를 민중을 위한, 민중을 대변하는 지도자로 만들어 나갔지.
[문수] 1828년 대선이 궁금해지네요.
[해월] 급하기는… 퀸지가 대통령으로 근무한 1825년부터 1829년까지 4년간은 매사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아 국민들의 지지가 매우 약했고, 특히 1828년 공표한 ‘관세법’이 북부와 남부사람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선거에 부정적 영향을 많이 미쳤지. 남부사람들은 이 관세법을 ‘증오의 관세법’ (Tariff of Abomination)이라 불렀지. 한편 대선 준비를 하면서 엔드류 지지파들은 퀸지를 공격하고 그가 재선 되지 못하게 막을 방안으로 전에 몸담은 ‘민주적-공화당’을 떠나 새로운 정당, ‘민주당’ (Democratic Party)을 창당했어. 따라서 엔드류는 민주당 소속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지.
[문수] 1828년 대선 때부터 민주당이 출범한 것이네요.
[해월] 맞아. 엔드류 젝슨을 대통령으로 만든 당이 탄생한 거야. 11번째 대선은 한마디로 흑색선전에 인신공격으로 얼룩진 불행한 선거전이었어. 엔드류의 반대파들은 대선후보인 엔드류를 ‘영국창녀의 아들’(son of an English prostitute)이라거나 ‘흑백혼혈아’(mulatto)라고 모욕을 주었고, ‘인육人肉을 유통시킨 노예거래자’라고 모함했지. 탈영병을 포함해 18명의 백인남성을 무차별 살해하고, 원주민 여자들과 아이들을 의도적으로 참살했으며 전투에서 사망한 원주민의 인육을 먹었다는 끔찍한 유언비어를 무작위로 유포시켰어. 또한 ‘1차 새미놀전쟁’ 때 엔드류의 처신에 의문을 표한 연방 의원의 귀를 잘라버리겠다고 협박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리기도 했지. 가장 엔드류를 괴롭힌 것은 부인이 전 남편과 정식 이혼 전에 본인과 결혼하여 같이 살았다고 비난하는 얘기였어. 결국 이 험담을 들은 부인 러쉘이 몹시 괴로워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지. 그녀의 장례식에서 엔드류는 “그녀와 하느님은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을 용서하겠지만 나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나타내기도 했어.
[문수] 참으로 어지러운 대통령 선거를 치렀겠어요.
[해월] 11번째 대선은 1828년 10월 31일부터 12월 2일까지 진행되었는데 엔드류는 반대파의 치열한 인신공격에도 불구하고 국민투표에서 55.5 퍼센트의 지지를 획득하고 전체 261표 선거인단 투표에서도 당선권인 131표보다 훨씬 많은 178표를 얻어 83표를 얻은 퀸지를 재대결에서 완전히 누르고 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
[문수] 온갖 악성 루머와 험담을 이겨내고 당당히 승리한 엔드류가 복수의 칼을 갈지나 않았나 모르겠네요?
[해월] ‘복수의 칼’이라! 글쎄. 정쟁이 극한 상태까지 가고 심적으로 매우 피폐한 상태였기 때문에 전 정부에 대한 보복성 정책이 이루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순서겠지. 1828년 12월 22일 부인을 잃은 대통령 당선인 엔드류는 주위를 정돈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어. 저택이 있는 네쉬빌에서 스팀보트를 타고 팬실베니아 주 ‘피츠버그’ (Pittsburgh)로 가서는 그곳에서 다시 수도까지 마차로 이동하는 3주간의 긴 여정 끝에 1829년 2월 11일 워싱턴에 도착해 ‘쟌 캘혼’(John C. Calhoun)을 부통령으로 하고 ‘마틴 벤 뷰랜’ (Martin Van Buren)을 국무장관으로 하는 내각을 조성했지.
[문수] 당시에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들이 모두 먼 곳에서 이동해야 했으니 배와 말이 끄는 마차를 탈 수밖에 없었겠네요. 상상이 잘 가지 않아요.
[해월] 긴 여행을 하면서 지역 주민들에게 인사하는 기회도 가졌을 거야. 지금처럼 자동차나 비행기로 이동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더 민중에 다가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을 수도 있겠지. 1829년 3월 4일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국회의사당 동쪽 현관(East Portico)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갖은 엔드류는 취임연설에서 “미국의 주권을 보호하고, 대통령의 권한 축소, 무능하고 불성실한 공무원의 축출 등 정부개혁 단행 그리고 원주민을 위한 공정한 정책 실시”등을 천명했지. ‘무능하고 불성실한 공무원의 축출’을 명시한 것을 보면 무언가 예시했다고 봐도 될 거야. 원주민을 위한 정책이 그들을 위하기는커녕 내쫓는 정책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고. 재선에 실패한 퀸지는 취임식 참석을 거부했고, 바로 연방 하원에 입성하여 엔드류에게 가시가 되었지. 엔드류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지지자들을 취임식 후에 백악관으로 초대하는 ‘open house’도 가졌어. 대통령이 백악관에 들어와도 좋다고 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일종의 난장판이 되어버렸지. 여기저기 부서지기도 하고 가구가 망가지기도 했다고 해.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취임을 축하하는 모습을 빗대어 엔드류에게 ‘무법의 왕’(King Mob)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어.
[문수] 잠 못 이루는 연방 고위직 공무원들이 많이 생겼겠는데요?
[해월] 하하! 남의 일이 아니게 느끼는 사람이 많았겠지. 제일 먼저 한 일도 그것이니까. ‘쟌 퀸지 에담스’ 행정부가 부패했다고 믿고 있는 엔드류는 곧 행정부 감사에 들어갔고 재무성에서 거액의 자금이 유출되었음을 발견했지. 해군부(Department of Navy)를 축소해 예산을 줄이고, 의회에 횡령죄를 강화하는 입법을 요구하는 한편 정부회계제도 개선을 추진했어. 행정부 감사 결과 탄생한 방법이 ‘교환근무’(rotation in office)라는 것인데, 이것은 1820년 제정된 ‘공무원임기제한법’ (Tenure of Office Act)으로 대통령에게 공무원을 새 사람으로 교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인데 엔드류는 이 법을 이용해 기존 공무원의 10%를 해고하고 그 자리에 자기 사람을 심기 시작했지. 사람을 교체해야 부패를 방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구실에 지나지 않고 그 자체가 또 다른 부패의 온상이 되었어. 선거에서 승리하면 승자가 논공행상의 일환으로 정부의 요직을 측근에게 나눠주는 소위 ‘전리물체제’(spoils system)의 시작에 불과한 거야.
[문수] 어느 나라든 새 대통령이나 수상이 들어서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제사람 넣는 일이 아닐까요? 그래야 일하기가 쉽겠지요.
[해월] 그래서 고위직은 신임이 취임하기 전에 사임하고 떠나 주는 것이 상례일 거야. 엔드류는 내각을 구성하고 일을 시작했지만 첫 2년 정도는 뜻하지 않은 일로 내각을 활용하지 못했어. 소위말하는 ‘속치마 스켄들’(petticoat affairs)이라는 사건에 휘말려 내각을 통해 정책토의나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고 비공식적인 체널(Kitchen Cabinet)을 가동해 자문을 구했지. 발단은 내각의 전쟁부 장관인 ‘쟌 이튼’(John Eaton)의 부인인 ‘마가렛’(Margaret)이 전남편이 사망하기 전부터 ‘이튼’과 관계를 가지면서 엔드류의 부인이었던 ‘러쉘’과 같이 행실이 좋지 않은 사람으로 평판이 났기 때문에 다른 장관들의 부인들이 그녀와 함께하기를 꺼리면서 장관들이 모이지도 않고 모여봤자 대화가 되지 않아 결국 해체하자는 말이 나오기까지 했어. 엔드류는 후에 할 수 없이 장관들 모두에게 사임을 요구했지. 나중에 새로 구성하긴 했지만 내각의 중요성이 ‘비공식 모임’으로 이전되어 운영되고 말았어. 한심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지만 엔드류는 마가렛을 두둔했다고 하니까 ‘초록동색’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지.
[문수] 어째 시작부터 비틀거리는 느낌이 드네요. 정적에 대한 보복성 정책을 펼쳐나갈 엔드류 행정부의 정력이 어째 다른 곳으로 뻗는 것 같은데요?
[해월] 주위에 가까운 몇몇 사람들과 내각이 아닌 별도 조직을 만들어 국정을 논하고 정책을 정했다고 하니 걱정은 걱정이야. 이때 국가의 주권을 보호한다는 개념이 논해지면서 더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지. 미국이라는 국가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국가의 위협을 제거해야 하는데 주위의 다른 국가들이 너무 많은 거야. 즉 미국땅에 먼저 들어와 살고 있던 원주민들이 나름 ‘국가’(nation)를 형성하고 신생 미국을 에워싸고 있으면서 때로는 화목하게 교류도 하고 동화도 하지만 적대행위도 끊임없이 발생했었으니까. 게다가 순진한 원주민에 비해 남부 미국인(백인)들은 원주민의 땅을 자기들 땅으로 만들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주 법을 제정하기도 했지. 원주민에 대한 공정한 정책을 실시한다고 천명한 앤드류의 실제정책은 원주민의 땅을 주에서 수용하겠다는 주법을 위헌이라 하지 않고, 그들을 눈밖으로 내 쫓아 위협을 사전에 봉쇄하고 국가의 안전과 주권을 지키겠다는 것이었지. 이것의 표현이 바로 1830년 5월 28일 제정된 ‘인디언 추방법’(Indian Removal Act)이야.
[문수] 말 그래도 살벌한 법이었을 것 같네요.
[해월] 미 남부 여러 주 사람들은 노예제도를 선호하면서 농사를 짓기 위한 땅도 늘려가길 원했으니까 늘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비옥한 땅을 빼앗았으면 하고 있지. 정부에 압력을 넣기도 하고 원주민 땅이 우리 땅이라는 법도 만들었지. ‘인디언 추방법’의 실시는 명목적으로는 원주민 국가와 조약을 맺어 현재의 땅과 서부의 땅을 맞바꾸면서 그 지역으로 이주한다는 형식이었어. 그러나 이는 현재의 비옥한 땅을 뺏고 서부의 미개척된 불모지와 같은 땅을 주면서 그곳으로 내쫓겠다는 것이었을 뿐이야. 미국의 동부를 가로지르는 '미시시피 강'(Mississippi River)을 경계로 동쪽에 살고 있던 ‘채로키’(Cherokee), ‘촉타’(Choctaw), ‘치카소’(Chickasaw), ‘크릭’(Creek) 그리고 ‘새미놀’(Seminoles) 부족은 물론이고 북동쪽 뉴욕지역에 있는 ‘이러코이 연합’ (Iroquois Confederacy)의 여러 부족에게도 적용되었지.
[문수] 미시시피 강은 미국 북부 ‘미내소타’(Minnesota) 주에 있는 ‘이타스카 호수’(Lake Itasca)에서 발원하여 2,300 마일(3,680 km)을 흘러 내려와 ‘미시시피 강 삼각주’(Mississippi River Delta)를 통해 ‘맥시코 만’(Gulf of Mexico)으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잖아요? 그럼 그 강의 동쪽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인디언들을 추방한다는 말인가요?
[해월] 문수가 정확히 얘기했어. 미시시피 강 동쪽 지역이라 함은 영국이 새로운 땅 미국에 식민지 13개 주를 건설하고 후에 후로리다 지역을 점령하면서 완성시킨 미국의 땅을 말하지. 그곳에는 이미 미국의 원주민들이 1만 년 전부터 자리 잡고 살고 있었고. 알다시피 1600년대 초 영국인들이 미국땅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들을 보살펴 준 것이 바로 원주민이었잖아. 첫 추수감사절을 함께 지내면서 도착한 사람들의 반이 죽어나간 상태를 보고 위로해 주었던 사람들도 원주민들이었고. 그렇게 서로 돕기도 하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면서 200년을 살아왔는데 엔드류 시대에 와서 큰 불행이 벌어진 것이지.
[문수]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려 하는데 그 중심에 엔드류가 있었던 거예요?
[해월] 결국 그런 모양이 되어 버렸어. 엔드류 재직동안 대거 70여 개의 조약이 원주민과 맺어졌고 7만여 명의 원주민이 실향민이 되었지. 법으로는 당연히 원주민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거주지를 미국 정부에 넘기고 정부가 정해주는 미시시피 강 서쪽의 땅으로 이주하는 얼핏 보면 정상적인 거주지 이전정책 같지만 사실은 강압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짐을 싸 강제이주하는 상황이었어. 정부정책에 반대하여 이주를 거부한 원주민들은 상당수 목숨도 버려야 했어. 결론을 보자면 자그마치 17만 평방 마일 (약 1억 9백만 에이커 = 약 1천3백3십억 평) 규모의 땅이 연방정부로 귀속되었지. 정부가 수용한 땅을 싼값에 농부들에게 팔기도 하고, 원주민 땅을 무단으로 점유한 자들에게 싸게 팔기도 했지. ‘인디언 추방법’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불모의 땅으로 강제이주하게 된 원주민들은 먼 길을 이동하면서 추위에 떨면서 풍토병에 걸려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생이별을 하기도 했는데, 그때 그들 사이에 생긴 말이 ‘눈물의 피난길’ (Trail of Tears)이란 말이고 원주민들의 한 맺힌 대 이동은 후임자인 ‘마틴 벤 뷰랜’(Martin Van Buren)에 이르러서도 계속되었어.
[문수] 말씀을 들어보니 미국정부와 인디언과의 관계정립에는 쉽게 풀 수 없는 응어리가 맺혀 너무 어려운 문제일 것 같아요.
[해월] 아마 인디언들과의 얽힌 문제를 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거야. 미국인들이 매년 11월에 축제로 즐기는 ‘추수감사절’(Thanksgiving) 시기가 오면 인디언들은 백인이 살해한 수백만명의 원주민들의 영혼을 달래고 빼앗긴 조상대대의 땅을 돌려달라고 외치며 그들만의 ‘전국추도의 날’(National Day of Mourning) 가두행진을 벌이고 있어. 미국정부가 취한 원주민들에 대한 그동안의 정책을 언제 돌아볼 기회가 있겠지만 원주민 입장에서 본다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지.
[문수] 엔드류의 1기 행정부에서 어려운 점에는 또 무엇이 있었는지요.
[해월] 그렇게 얘기하니까 어려웠던 문제가 많이 있었구나. 또 하나의 문제는 ‘관세’의 문제였지.
퀸지 행정부 마지막 해인 1828년에 수입물품에 대한 높은 관세를 부과하도록 법을 제정했었는데 사실 엔드류도 이에 찬동했었지. 관세는 정부세입의 대부분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국가운영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또 국내 생산경제를 보호하는 차원에서도 필요했었지. 북부의 제조업자들은 자국 상품의 생산과 소비가 보호되고 가격을 유지할 수 있어서 찬성했지만, 남부의 농업종사자들, 특히 면화(목화) 생산업자들은 수년 전부터 가격의 폭락이 지속되어 생활이 매우 어려운 상태에 있었는데, 비싼 수입 완제품을 써야 했으니 높은 관세를 좋아했을 리 없지. 여기에 ‘사우스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주에서는 높은 관세를 책정한 연방법이 헌법에 보장된 주의 권한을 침범하는 위헌적 행위라고 우기며 주정부에서 연방의 관세법을 ‘무효화하고 파기할 수 있다’고 하면서 소위 ‘무효화 사태’ (Nullification Crisis)를 야기했어.
[문수] 그럼 주정부가 연방법과 연방정부 정책에 반기를 든 것이네요?
[해월] 그렇지! 그런데 사태를 뒤에서 조성하고 부추긴 사람이 다름 아닌 엔드류 행정부의 부통령인 ‘쟌 켈훈’(John C. Calhoun)이었던 거야. 사우스 케롤라이나 주 출신인 쟌 부통령은 “주정부가 연방정부 법을 위헌적이라고 판단하면 해당 주에서는 이를 폐기할 수 있다”는 이론을 주장하고 나섰지. 부통령이 대들고 나서니 엔드류는 마지못해 1832년 7월 1일에 관세율을 약간 낮춘 새 법을 만들었고 주에서 받아들이기를 희망했어. 1832년에 새 관세법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우스 케롤라이나 주 사람들은 1828년 법과 함께 모두 위헌적 법률이라고 선언하고 ‘폐기 조례’(Ordinance of Nullification)를 제정하여 1833년 2월 1일부터 주에서 시행키로 했지. 동시에 연방정부가 무력으로 시행코자 할 때를 대비해 군을 동원하도록 조치하고 나섰어. 더불어 쟌은 엔드류 정책에 효율적으로 대항하려면 상원이 더 나은 장소라 생각하고 부통령 직을 사임한 후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하여 상원에 진출했지.
[문수] 무슨 내란이라도 날 기세네요!
[해월] 그래서 엔드류는 이 사우스 케롤라이나 사태에 ‘반란과 반역’(insurrection and treason)이라는 말로 대처했어. 미합중국이 깨지는 것을 강하게 우려하면서 강온양면 작전을 편 엔드류는 일면 연방군을 동원해 무력으로라도 시행할 듯 1833년 3월에 ‘강압법’(Force Bill)을 제정하는 한편 뒤로는 반대파와 협상을 진행하여 ‘합의안’(Compromise Tariff of 1833)을 만들었어. 관세율을 상당히 내린 이 합의안을 사우스 케롤라이나 주에서 받아들이면서 관세사태는 일단락되었지만 ‘강압법’ 만큼은 위헌법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고, 주 정부 자존심을 끝까지 세우기도 했어.
[문수] 역시 국가운영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또 다른 사건은 없었나요?
[해월] 있지! 제임스 메디슨 정부에서 승인했던 ‘2차 중앙은행’(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 허가 연장을 거부한 사건이 있어. 1812년 영국과의 전쟁이 끝난 후 경제재건을 위해 다시 세운 중앙은행이 정부자금을 보관하고 정부부채 등을 관리하기는 하지만 영리법인으로 운영되면서 주주들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지. 그런 중앙은행이 소수에 의해 운영되는 제4의 금권(money power) 집단이라고 본 엔드류는 중앙은행이 농민과 근로노동자 등 진정한 민중을 위하지 않는다면서 의회에서 허가연장법이 통과되었지만 1832년 7월 10일 이에 거부권을 행사했어. 금융기관으로부터 융자를 받아 땅투기를 했던 엔드류가 1804년에 와서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렀을 때 곤욕을 치렀던 과거를 회상하며 화폐경제보다 금본위경제를 선호하여 일종의 복수를 한 것 같다고 해. 결국 오판한 것이지만 말이야.
[문수] 원주민들에게 그 많은 원한을 사고 정책시행에 어려움을 겪는 엔드류가 재선에서 힘들지 않았을까요?
[해월] 반대당인 ‘국민공화당’(National Republican Party)과 ‘반메이슨당’(Anti-Masonic Party) 후보들은 문수가 지적한 대로 엔드류의 지지도 하락을 예상했지만, 1832년 11월 2일부터 12월 5일까지 벌어진 12번째 대선의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엔드류와 마틴 벤 뷰런 후보팀의 압도적 승리로 나왔어. 288명의 선거인단이 구성되어 145표가 당선권인데 엔드류는 219표를 얻고 국민투표에서도 55퍼센트에 달하는 지지표를 얻었지. 북부와 서부 그리고 남부에서 그의 정책으로 혜택을 보면서 골고루 지지를 획득한 거야.
[문수] 엔드류가 승리하면서 민주당의 지지도도 많이 올랐겠네요?
[해월] 민주당은 대통령을 배출했고 그 지지도가 높아졌지만 상대적으로 패배한 정당들의 결속을 가져왔어. 주위 소수 정당들이 ‘위그당’(Whig Party)으로 뭉쳐 결합했지. 또한 압도적 지지는 절대권력을 창출하는 법.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시키겠다고 한 앤드류의 공약은 점점 사라지고 1833년에 들어서 대통령령으로 정부자금을 중앙은행에서 관리하는 제도를 없애버렸어. 중앙은행을 없애고 대신 주정부 허가를 받은 지방은행으로 자금을 이전한 거야. 이를 반대하는 현직과 후임 재무장관을 모두 해고하는 무리수도 두었지. 영국왕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만든 영국의 위그당을 본떠 만든 미국 위그당 사람들은 바로 엔드류를 ‘미국왕 엔드류 1세’(King Andrew the First)라 부르며 그의 폭정을 비난하고, 1834년에는 상원에서 그가 재무성 권한을 부정하게 박탈하고 의회의 승인 없이 장관을 해고한 것을 이유로 ‘불신임’(censure) 안을 상정하여 통과시켰고 그가 새로 임명한 재무장관에 대한 인준도 거부했지.
[문수] 중앙은행을 없애고 재무성 자금을 주정부로 뺀다면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해월]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혼란이 오겠지. 엔드류행정부는 연방자금을 정부정책에 우호적인 주정부 산하 은행들에 나누어 입금시켰어. 그러자 주에서 허가받은 은행들의 수가 갑자기 늘어나고 투자대상과 방식도 바뀌었지. 주로 토지개발과 토지투기 그리고 주정부 공공사업 등에 투자되었어. 동시에 연방정부에서는 국가부채를 줄이기 위해 원주민들로부터 빼앗은 토지를 다량으로 매도했는데 엔드류 재직 시 매도한 서부지역 토지의 규모가 ‘오클라호마’(Oklahoma) 주 정도의 규모로 약 6천3백만 에이커에 달하는 공공용지가 팔려나갔지. 정부가 1836년 발표한 대통령령에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는 서부지역 토지매입 시 지불방식을 금 또는 은으로 정한 령이고 둘째는 동부소재 은행의 정부예금을 서부은행으로 이전하라는 령이었어. 동부은행들이 보유하던 금과 은, 그리고 자금이 서부은행들로 이전되면서, 당시 동부은행들이 금과 은으로 갚아야 할 영국은행에 대한 부채상환이 불가능하게 되었지. 이로서 1837년에 금융위기가 몰아닥쳤고 1841년까지 미국경제가 불황에 빠지게 되었어.
[문수] 무리하게 밀어붙인 경제정책으로 경제위기라는 상황이 전개되었네요.
[해월] 경제를 살리는 문제는 어느 행정부에서도 만만치 않은 문제일 거야. 엔드류 행정부의 대외정책에는 그 점을 감안한 면이 많아. 두 번째 임기인 1833년부터 1837년 3월 4일까지 동아시아국가 중 처음으로 ‘시암’(Siam. 태국)과 통상협정을 체결하고, 영국, 스페인, 러시아 그리고 ‘오토만 제국’(Ottoman Empire. 터키) 등과도 무역협정에 합의를 보았지. 자국 상선이 외국에 의해 나포되고 물품들이 노략질당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상대국들에서 보상금을 받아내도록 여러 방안을 동원해 노력한 결과 댄마크, 포르투걸, 스페인 그리고 프랑스로부터 보상을 받아내는데 성공도 했어. 한편 미국민이 1823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맥시코의 영토인 택사스로 상당수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맥시코로부터 독립하겠다고 1836년 설립한 ‘택사스 공화국’ (Republic of Texas)에 대한 승인을 노예문제로 미루다가 퇴임 하루 전에 승인하면서 향후 맥시코와의 전쟁의 빌미를 만들기도 했어.
[문수] 엔드류 정권 때 미국민들이 두 개의 공화국을 설립하는 역사가 있었네요.
[해월] 택사스공화국은 처음부터 자진해서 미국의 영토가 되기를 원했던 곳이야. 재임 중인 1836년 6월 15일에 ‘알칸소’ (Arkansas)가 25번째로 연방에 편입되었고, ‘미시건’(Michigan)이 1837년 1월 26일에 26번째로 연방에 가입되었지. 영토를 넓힌 엔드류는 1837년 ‘법원법’(Judiciary Act)을 제정하여 대법원 법관수를 7인에서 9인으로 늘렸고, 새로운 서부 주들을 염두에 두고 연방순회법원수도 9개 법원으로 두 곳을 더 늘렸어.
[문수] 처음에 받은 인상으로는 대통령으로서 어려움을 많이 겪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많은 일과 업적을 남긴 대통령이 되었네요, 선생님.
[해월] 그러게. 아닌 게 아니라 엔드류는 인상뿐만 아니라 성품도 사실 불같은 성격에다 폭력적인 데가 있어. 그래서 상대방이 위협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지. 그런데 그는 그런 성품을 전략적으로 활용해서 원하는 것을 얻곤 했어. 연방 상원의원이었을 땐 상당히 점잖고 사려가 깊은 사람인양 처신했지만 매사를 개인감정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아 곧잘 말다툼이나 대결로 이어졌지. 그러면서 자존심이 강해 어려움이 닥쳤을 때 이겨내는 힘도 발휘했고 목표가 정해지면 밀고 나가는 성품이라 장점이 되기도 했어. 극과 극을 보이는 터라 정적들이 그의 정치적 통찰력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범하게 만들기도 했어. 좌충우돌하는 성품이라 연방하원과 상원의원직을 오래 하지 못한 것 같아.
[문수] 그런 성품의 소유자는 척을 지는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요.
[해월] 왜 아니겠어. 지장과 덕장에 비해 용장은 항상 비상시를 대비해야 하는 스트레스가 생기겠지. 좋은 예로 엔드류에게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벌어진 사건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1833년 5월 6일에 벌어진 폭행사건이야. 엔드류가 횡령죄로 해군에서 해직시킨 ‘로벗 렌돌프’(Robert B. Randolph)라는 해군장교가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해 코피가 나게 한 사건이었지. 하극상치곤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웬일인지 엔드류는 그에게 죄를 묻지 않았어.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은 1835년 1월 30일 벌어진 암살시도 사건인데 영국에서 온 주택도장공이었던 ‘리차드 로랜스’(Richard Lawrence)가 미국에 와 무직자가 된 것을 비관해서인지 의회건물에서 나오는 엔드류를 기다렸다가 권총을 쏜 사건이야. 권총을 꺼내 쐈지만 불발되자 다른 권총을 꺼내 또 쐈는데 그 역시 불발되었어. 천운으로 목숨을 건진 엔드류는 다른 이들이 나타나 리차드를 제압할 때까지 그와 싸웠어. 리차드는 정신병을 이유로 무죄가 되었고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는데, 이 두 사건은 미국 대통령에게 발생한 최초의 사건으로 시사하는 바가 많지.
[문수] 하마터면 암살되는 첫 번째 대통령이 될 뻔했네요. 정적의 공격이 시작된 느낌이네요. 그렇지만 미국에 민주당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새로운 정당정치를 이끌었으니 정치발전에 많이 기여했지 않나요.
[해월] 맞는 말이야. 그의 통치이념에 대해 ‘에이브러헴 링컨’(Abraham Lincoln)이나 ‘후렝클린 루즈밸트’ (Franklin Roosevelt)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등은 헌법을 지키는 대통령이라든가 특권층이 아닌 일반국민을 보호하려 애썼던 대통령이었다는 등 그를 칭송하기도 하지. 그는 말년에 네쉬빌에서 어머니와 부인이 독실했던 기독교 신자였던 것을 감안, ‘First Presbyterian Church’의 신자가 되기도 했어. 그러나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 임기 중 그의 모습을 20달러 지폐에서 지우기로 결정함으로써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의 곁을 떠나겠지. 1837년 3월 4일 임기를 마치고 자택인 허미티지에서 지내던 엔드류는 1845년 6월 8일 오랫동안 부종과 결핵으로 병을 앓다가 심장마비로 78년 생애를 마감했어. “나를 위해 울지 마라. 모두 천국에서 만나기를 희망한다 – 모두 천국에서, 흑인이든 백인이든.”(Do not cry; I hope to meet you all in Heaven – Yes, all in Heaven, white and black)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는 그는 지금은 미국정부의 사적지가 된 ‘Hermitage’ 저택 묘지에 부인 러쉘과 함께 안장되어 있지.
[문수] 엔드류의 부인이 대통령 취임 직전에 사망했는데 혹시 그들 사이에 자식이 있었나요?
[해월] 이들 부부가 정식으로 결혼하여 부부가 된 것이 1794년 1월이니까 부인이 사망한 1828년 12월까지 근 35년을 같이 살았건만 둘 사이엔 자식이 없었어. 그래서 부인의 남동생 ‘새번 도낼슨’ (Severn Donelson. 1773-1818)의 일곱 아들 중 네 번째 아들을 1809년에 양자로 입양해 ‘엔드류 젝슨 주니어’ (Andrew Jackson Jr. 1808-1865)라고 부르면서 양아들로 두었지. 엔드류 주니어는 1831년 11월 24일 필라댈피아에서 ‘세라 요크’(Sarah Yorke. 1805-1887)와 결혼하여 4남 1녀를 두었어. 엔드류 주니어는 56년 생애동안 평범한 삶을 살다가 허미티지에서 사망했지. 세라는 결혼하고 엔드류 저택 ‘허미티지’에서 살다가 1834년에 화재가 나는 바람에 백악관으로 거쳐를 옮긴 후에는 백악관 안주인 대행역을 담당하기도 했어. 엔드류의 임기가 끝난 후에는 다시 허미티지로 옮겨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고 사망 후엔 허미티지 가족묘에 남편과 함께 안장되어 있어.
* 엔드류 젝슨 제7대 미국 대통령의 서명을 감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