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대 엔드류 젝슨 - 1 of 2 : 불굴의 히커리 1767 - 1824
14살 어린 나이에 부모는 물론 형제까지 모두 잃고 고아가 된 사람이 인생을 어떻게 전개해 나갈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7대 대통령 ‘엔드류 젝슨’(Andrew Jackson. 1767.3.15 – 1845.6.8)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어린 고아가 커나가면서 변호사, 농장주, 노예거래상, 상원 및 하원의원, 주 대법원 판사, 육군 소장 그리고 대통령(1829-1837)에 이르는 화려한 이력을 갖게 되고 평가도 다양한 역사적 인물이 됩니다. 185 cm(6 feet 1 inch)의 훤칠한 키로 다수 국민(백인)의 뜻과 희망을 대변했던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그는 미국 서부 개척의 선봉장, 많은 노예를 소유한 남부의 상류층, 평민이 지닌 지혜를 활용한 대중주의자, 민주주의 정신을 펼친 정치가, 미국헌법주의 근간을 함양시키면서도 반대파를 짓누르고 법을 유린한 독선적 선동주의자라는 평가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불같은 성격으로 일대일 결투도 여러 번 벌여 상대를 살해하기도 한 그는 1928년부터 미국의 20달러 지폐에 흉상이 들어있어 세계인에게 익숙한 얼굴이 되었지만 이제는 미국 원주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정책을 자행한 이유로 그 모습이 곧 사라질 운명에 있습니다. 업적에 대한 다양한 평가로 칭송과 비난이 교차하는 ‘엔드류 젝슨’(이하 엔드류)에 대해 살펴봅니다.
[聞修] 14살에 부모님을 다 여의었다면 생활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초창기 모든 면에서 어지러운 시절 미국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다고 하니 참 대단한 분이네요, 선생님.
[海月] 문수말처럼 어려운 일을 해낸 인물이지. 7대 대통령 ‘엔드류’는 1767년 3월 15일 케롤라이나 주 ‘와소’(Waxhaw) 지역에서 아버지 ‘엔드류 젝슨 시니어’(Andrew Jackson Sr. 1738-1767)와 어머니 ‘앨리자배스 허친슨’(Elizabeth Hutchinson. 1740-1781) 사이의 3남으로 태어났어. 아버지는 ‘스카틀렌드-아이리쉬’ (Scotland-Irish) 혈통으로 아일렌드의 ‘얼스터’(Ulster)에서 살다가 엔드류의 형들인 ‘휴’(Hugh. 1763-1779)와 ‘로벗’ (Robert. 1764-1791)을 데리고 부인과 함께 1765년경 식민지 미국으로 건너왔어.
[문수] 엔드류의 선조들은 영국계가 아니라 스카틀렌드계 아일렌드 사람이네요?
[해월] ‘캐네디’(Kennedy) 가문과 ‘바이든’(Biden) 가문이 아일렌드계 이민자들인데 젝슨가도 그런 셈이지. 엔드류의 선조들이 1690년에 당시 영국의 땅이었던 아일렌드에서 발발한 케토릭 對 신교도의 전쟁이자 왕위쟁탈전이었던 ‘보인강의 전투’(Battle of Boyne) 이후 스카틀렌드에서 북아일렌드로 이주했다는 기록이 있어.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엔드류의 할아버지는 ‘휴 젝슨’(Hugh Jackson)으로 1705년경 아일렌드의 ‘케릭훠거스’(Carrickgergus)라는 곳에서 태어나 직조공으로 일하고 상인으로 살다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부인과 사이에 ‘제임스’(James), ‘엔드류’ (Andrew. 부친), ‘로벗’(Robert), 그리고 ‘데이빗’(David) 등 아들 넷을 두었고, 1782년 77세를 일기로 태어난 동네에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야.
[문수] 할아버지와 삼촌들 성함 정보 이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는 거예요?
[해월] 그러게 말이야! 윗분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고 할머니가 누군지 삼촌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가족에 대해 전혀 기록이 없어. 겨우 알려진 내용은 아버지가 1738년경 ‘케릭훠거스’에서 태어나 1759년경 ‘앨리자배스 허치슨’과 결혼한 뒤 가족을 데리고 1765년경 식민지 땅 필라댈피아로 이주한 후 계속해서 남쪽으로 이동하여 사우스 케롤라이나 주의 ‘와소’라는 지역(현재의 Pleasant Grove지역)까지 내려와 정착했다고 해. 아버지는 와소에 온 지 얼마 안 된 1767년 2월, 엔드류가 태어나기 2주 전쯤 벌목사고가 나면서 29세의 나이로 사망했지. 아버지와 두 형들의 유해는 ‘Old Waxhaw Presbyterian Church Cemetery’에 안장되어 있어.
[문수] 엔드류의 어머니 앨리자배스는 어떤 분이셨어요?
[해월] 부모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는 앨리자배스는 1740년경 스카틀랜드에서 1남 6녀 중 막내딸로 태어나 아일렌드로 이주했고, 엔드류 시니어와 결혼하여 휴(Hugh. 1762-1769), 로벗(Robert. 1765-1781)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와 3남 엔드류 주니어(Andrew Jr. 1767-1845)를 낳았지. 장로교 신자로서 영국군과 싸우다 전사한 아버지로 인해 영국을 싫어했던 그녀는 슬기롭고 굿굿한 성품의 소유자로 용기와 결정력도 강했다고 해. 남편을 따라 1765년경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남편이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혼자서 아들 셋을 키웠지.
[문수] 20대 후반 여자가 홀로 되어 아들을 셋이나 키운다고 하니 참으로 끔찍하네요.
[해월] 왜 아니겠어. 그러니 역사가들이 ‘용기가 있는 여성’이었다고 하는 것이겠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전쟁이 벌어지자 영국을 증오한 어머니는 세 아들 모두 독립군을 돕도록 전장에 내 보냈어. 그러나 불행히도 큰 아들 휴는 군막사에서 열병에 걸려 1779년 6월에 사망하고, 둘째 아들 로벗은 엔드류와 함께 포로로 잡혔다 풀려났지만 천연두에 걸려 1781년에 사망해 모두 10대에 사망하는 슬픔을 안고 살았지. 포로로 잡혀 있을 때 영국군 장교가 군화를 닦으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둘 다 거부하는 바람에 장교가 휘두르는 칼에 맞아 왼손과 머리에 칼자국을 갖게 된 엔드류의 일화는 유명해.
[문수] 어린 나이에 영국군 칼에 맞아 상처를 갖게 되었으니 일찍부터 감정이 생겼겠네요.
[해월] 작은형 로벗도 거부하다 몽둥이찜질을 당했는데 포로교환하면서 풀려났지만 이미 천연두에 걸려 풀려난 지 이틀 만에 사망했다고 해. 엔드류에겐 그때부터 영국에 빌붙은 상류층과 정치인들을 같이 증오하는 마음이 자리를 잡게 되었을 거야. 두 아들을 잃었지만 막내의 건강을 회복시킨 앨리자배스는 마음을 굳게 다지고 사우스 케롤라이나 주 ‘찰스턴’(Charleston)에 정박해 있는 영국군 포로수용 선박에 갇혀 병을 앓고 있는 독립군 병사들을 위해 간호사로 자원해서 돌보다가 그녀 스스로 콜레라 병에 걸려 1781년 11월 41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어. 찰스턴 북쪽 표식도 없는 무덤에 당시 사망한 병사들과 함께 뭏혔다고 하니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지. 그때 엔드류의 나이가 14살이었지. 어머니가 그에게 “진실한 마음으로 친구를 사귀고, 확고한 마음으로 지켜나가라”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고 해.
[문수] 아! 그렇게 14살에 고아가 된 것이군요? 전쟁의 비극이 엔드류에게 일찍 다가왔네요. 그런데 엔드류의 출생지가 확실치 않다면서요?
[해월] 맞아! 어찌 된 일인지 엔드류와 관련된 모든 역사적 자료가 확실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어. 선조들에 대한 기록도 그렇고 본인의 출생에 대해서도 확실치 않아. 대통령과 관련된 역사이니 매우 정확한 것이 있을 법도 한데 모두가 추측성 기록뿐이야. 우선 아버지가 사망한 1767년 3월 1일(추정) 이후 만삭이 된 어머니는 두 아들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나 부유한 언니 ‘제인’(Jane Crawford. 1734-1780)의 집을 향해 길을 떠났지. 형부인 ‘제임스 크로훠드’ (James Crawford)의 농장을 향해 가던 중 해산기가 있어 3마일 정도 못 미친 곳에 있는 둘째 언니 ‘마가렛 메커니’(Margaret Hutchinson McKerny. 1736-1785)의 집으로 들어 가 엔드류를 낳았어. 이때가 3월 14일과 15일 사이였지.
[문수] 그럼 마가렛 언니집에서 출생한 사실이 있으니 별 문제가 아니잖아요?
[해월] 제인의 집과 마가렛 집의 위치가 문제야. 우선 두 언니가 살고 있던 와소 지역은 당시엔 케롤라이나 주에 속해있었는데 지금은 북과 남으로 갈라졌어. 즉, 제인이 살고 있는 집은 南 케롤라이나(South Carolina) 주에 속해있고, 마가렛의 집은 北 케롤라이나(North Carolina) 주에 편입되어 있지. 문제는 엔드류 스스로가 본인은 사우스 케롤라이나에 있는 ‘크로훠드 농장’(Crawford Plantation)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데 있어. 마가렛 언니집에서 해산한 후 세 아들과 함께 바로 큰언니 제인의 집으로 건너간 어머니가 건강이 좋지 않았던 언니를 위해 가정부생활을 하면서 지냈는데, 그곳에서 소년기를 보냈던 엔드류에게 제인 이모집이 태어난 곳으로 생각할 만큼 추억이 깊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여.
[문수] 그럼 엔드류의 출생지가 단순히 동네문제가 아니라 사우스냐 노스냐 하는 주와 관련된 것이네요!
[해월] 맞아! 비교가 좀 이상하지만 부처님의 출생지인 ‘룸비니’(Lumbini)가 인디아와 네팔 경계지역에 위치하는 바람에 서로 자국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고 있잖아. 지금 양쪽 주 정부가 각각 출생지라 하면서 기념비를 두 이모집 위치에 설치해 웃지 못할 사실이 되었어. 이 문제는 나중에 그의 정치적 입지에도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
[문수]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와 두 형마저 독립전쟁 통에 모두 잃었으니 고아가 된 엔드류의 삶이 매우 어두웠겠어요.
[해월] 가진 재산은 없어도 어머니의 굳센 의지가 엔드류에게 전해 졌겠지. 어렸을 땐 어머니가 엔드류에게 커서 교회목사가 되라고 하면서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보냈었어. 독해와 수학 그리고 그리스어 같은 외국어에 눈을 뜨게 되었지만 심성이 강하고 불같아서 목사직이 적합지 않았을 거야. 독립전쟁이 끝나고 혼자된 엔드류는 마구제조상 직공으로 일하기도 하고 잠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다가 17살 때인 1784년 고향인 와소를 떠나 노스 케롤라이나의 ‘솔즈배리’ (Salisbury)로 이주했어. 떠난 상황과 사연은 오리무중이지만 그곳에서 ‘스프루스 메케이’ (Spruce Macay) 변호사를 만나 법률공부를 시작했지. 나중에 ‘쟌 스톡스’ (John Stokes) 판사 밑에서 연수를 마친 엔드류는 20세가 된 1787년 9월에 노스 케롤라이나 주 변호사 자격을 획득했지. 변호사 자격을 따자 그의 친구 ‘쟌 멕네어리’(John McNairy) 태내시(Tennessee) 주 연방법원 판사가 그를 노스 케롤라이나 주 서부지구(후에 태내시 주로 편입되는 지역임) 검사로 임명되도록 힘을 써주었어.
[문수] 1787년 스무 살에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니 고아가 된 지 6년 만에 확고한 입지를 만들었네요.
[해월] 성공하는 사람의 또 하나의 선례가 이루어진 것이야. 엔드류는 임지로 가는 길목인 태내시 주 ‘존스보로’(Jonesborough)에 들렸을 때 첫 번째 흑인노예를 사들였는데 그의 나이또래의 여자노예였어. 또한 그의 됨됨이를 헐뜯던 지역 변호사 겸 주방위군 장교였던 ‘웨이스틸 에버리’(Waightstill Avery)와 운명의 첫 번째 일대일 결투(duel)도 갖게 되었지. 둘이 쏜 총알이 모두 허공을 가르면서 목숨은 건졌지만 스무 살 먹은 엔드류의 불같은 성품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사건이었어.
[문수] 법관이 되어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이 법보다 주먹을 먼저 보였으니 걱정이 앞서네요.
[해월] 그렇지? 아무리 법으로 허용된다 하더라도 총으로 맞대결하는 듀얼(duel) 싸움은 아닌 것 같아. 20살 때의 결투가 마지막이 아니라니까 더더욱 걱정이지. 어쨌든 엔드류는 1788년에는 새로운 서부개척지 ‘네쉬빌’(Nashville)이라는 마을로 자리를 옮겨 지역유력 정치인 ‘윌리엄 브런트’(William Blount)와 가까이하면서 1791년에는 ‘매로 카운티’(Mero County)의 법무책임자가 되었고 1792년에는 민병대 법무관직도 갖게 되었어. 그러면서 지역 변호사 ‘쟌 오버튼’(John Overton)과 동업으로 노스 케롤라이나 주 거주 백인들이 투매할 수 있게 1783년에 만들어 발효된 ‘토지수용법’(Land Grab Act)에 따라 ‘채로키’(Cherokee)와 ‘치커소’(Chickasaw) 원주민의 땅을 헐값에 사들였지.
[문수] 변호사와 검사 그리고 법무관으로 신분이 바뀌면서 토지소유에도 관심을 가졌나 보네요.
[해월] 땅을 갖고 싶은 것은 인간이 가진 본능 중 하나인가 봐. 가장 든든한 투자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엔드류는 땅뿐만 아니라 노예거래에도 관여했어. 태내시 주 네쉬빌로부터 '미시시피'(Mississippi) 강을 끼고 미시시피 주 ‘나채스’(Natchez)를 잇는 교역로를 통해 스페인 관할 '서부 후로리다'(West Florida)로 연결되는 중간에 있는 ‘지역 노예시장’ (interregional slave market)으로 노예를 이동시켜 판매하는 ‘노예거래상’ (slave trader)이 되었었지. 엔드류가 땅투기를 할 뿐 아니라 노예를 사고파는 사람이 된 것이야. 고아였던 아이에서 지역 정치가를 등에 업고 신분이 상승하자 1788년부터 땅을 사서 농장도 만들었으니 그곳에 농사지을 노예도 필요했겠지만, 노예를 싸게 사서 웃돈 붙여 팔아넘기는 ‘상품’(mercantile)으로서의 노예거래를 사망하기 1년 전인 1844년까지 계속했다고 해.
[문수] 땅 투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노예거래상이었다는 과거는 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요? 대통령이나 된 사람이?
[해월] 사실 1828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 엔드류가 노예매매를 했다는 사실을 들춰내며 선거 켐페인에 이용한 경우가 있었지. 엔드류 반대파 사람들과 나채스 지역의 유지들이 엔드류가 노예를 매매하면서 발행한 영수증들과 노예들의 이름과 가격이 적힌 목록을 진술서로 만들어 지방 언론에 보내고 폭로했어. 자신이 노예거래상이었다고 증언한 엔드류 스스로의 말로는 당시 그에 의해 거래시장으로 보내진 흑인노예들 1인당 원가가 15달러를 넘지 않았다고 하는데, 반대파들이 파헤친 거래 기록에 보면 스무 살 된 ‘켄디스’(Candis)와 열네 살 된 ‘마린다’(Malinda)를 함께 1천 달러에 팔았고, ‘훼니’(Fanny)라는 노예는 280 달러에 그리고 ‘배티’(Betty)라는 이름의 서른다섯 살 난 여자노예와 열다섯 먹은 그녀의 딸 ‘헤나’(Hannah)는 함께 550 달러에 거래되었어. 또한 ‘캐시아’(Kesssiah)라는 이름을 가진 엄마와 그녀의 세 살 된 ‘루밴’ (Ruben)과 갓난아이 ‘앨시’(Elsey) 등 세 사람은 모두 650 달러에 팔렸다고 하니 이문이 꽤 좋았던 것 같아. 엔드류는 노예상으로 상당히 많은 노예들을 사고팔았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1828년 선거에서 대통령에 무난히 당선되었지.
[문수] 출세도 하고 사업수완도 남달랐던 것 같아요. 어쨌든 20대 중반의 성인이 되어 직장도 튼튼하고 안정된 수입도 들어오니 걱정이 없어졌겠어요.
[해월] 태내시 주에 땅을 사들여 농장도 갖게 되고, 직장과 사업도 잘 펼쳐가던 엔드류가 여인도 만나게 돼. 1788년에 네쉬빌로 이주한 그는 지역의 유지였던 ‘쟌 도낼슨’(John Donelson. 1715-1785)의 미망인 ‘러쉘 스타클리 도낼슨’(Rachel Stockley Donelson. 1730-1801)의 집에서 하숙을 한 적이 있었어. 민병대 대령이자 주 하원의원이던 쟌은 버지니아에서 용광로를 운영하다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태내시 주로 건너와 새 마을을 형성하고 '네쉬빌'이라고 이름 지으며 정착한 선구자였는데 부인 러쉘과의 사이에 7남 4녀 등 11자녀를 두었었지. 그녀의 집에서 하숙을 하던 엔드류는 그중 막내딸 러쉘(Rachel. 1767.6.15 – 1828.12.22)과 사랑을 하게 되고, 1791년 은밀하게 둘만의 결혼을 한 뒤 동거에 들어갔어. 그리고 1794년 1월 18일에 정식으로 처갓집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지.
[문수] 스물일곱 살에 동갑내기와 결혼을 했으니 행복했겠네요.
[해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으니 당연히 행복했겠지. 기독교인으로 성경과 시를 즐겨 읽고 미인으로 알려진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한 엔드류는 그 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불평 없이 조용히 남편의 뒷바라지를 한 부인이 누구보다도 소중했을 거야. 그러나 이 결혼에는 엄청난 풍파가 잠재하고 있었지.
[문수] 행복한 삶을 이루는데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해월] 그 시작은 러쉘이 1785년 3월 1일에 캔터키 ‘헤롯스버그’(Harrodsburg)에 있는 농장의 주인이자 땅투매자이고 민병대 대위인 ‘루이스 로바즈’(Lewis Robards. 1758-1814)와의 결혼이었어. 열여덟 살이 채 안 된 러쉘은 남편을 잃고 혼자된 시어머니와 같이 살기 위해 캔터키 시댁으로 들어갔는데, 의처증과 바람기가 있는 루이스와의 사이가 불편해지면서 이혼을 전제로 1790년에 친정으로 돌아왔어. 남편이 법적이혼을 신청할 것으로 믿고 있던 러쉘이 새롭게 나타난 엔드류와 눈이 맞은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지. 남편이 이혼판결을 받았을 것이라 지레판단한 러쉘은 1791년경 엔드류와 함께 미시시피 주 ‘나채스’로 건너가 결혼을 하고 돌아왔어. 이 둘만의 결혼은 후에 엔드류가 고백한 내용인데 그렇게 되니까 부인 러쉘의 결혼상태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게 되었지. 즉, 부인은 현 남편과 결혼한 상태에서 새 남자와 또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말 많은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겠어? 우선 중혼을 하게 되었으니 품행이 방탕하다든가 간통을 했다든가 심지어 창녀라는 등 입에 담지 못할 험담들이 나돌게 되었고 이것이 후에 엔드류의 개인생활과 정치생활, 특히 대통령에 출마한 1824년 대선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어.
[문수] 전남편이 법적 절차를 다 밟아 이혼이 된 것으로 알고 결혼을 했다는 것은 좀 그렇네요.
[해월] 사실 18세기 당시엔 영국이나 미국이나 이혼이라는 개념이 별로 정립된 상태가 아니었어. 결혼도 정식으로 신고하고 하는 결혼이 많지 않았고 법적 이혼을 신청하는 케이스도 찾아보기 힘들었지. 엔드류가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사라졌을 것이 분명해. 비록 1793년에 전 남편이 법적이혼수속을 끝내주어서 정식으로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은 품행이 방정치 못한 사람을 ‘영부인’(First Lady)으로 맞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떠들었고, 러쉘은 1828년 선거에서 엔드류의 당선소식을 듣고 기뻐했지만 그가 취임하기 3개월 전쯤인 1828년 12월 22일에 심장마비가 발생하면서 61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말아.
[문수] 아! 또 비극이 발생하네요.
[해월] 엄청난 슬픔에 잠긴 엔드류는 1829년 1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러쉘의 죽음에 내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라고 쓰면서 “꿋꿋하게 버텨보려고 애쓰지만 너무나 힘드네”라고 고백했다는 기록이 있지. 부인의 죽음이 정적들의 모함 때문이라는 엔드류의 말처럼 아마 부인이 화병으로 운명하지 않았나 해.
[문수] 대통령 당선자의 부인으로 영부인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사망한 첫 번째 인물일 것 같네요!
[해월] 안타까운 가족사이지. 어쨌든 부인과 정식 결혼한 엔드류는 1796년에 네쉬빌에 있는 640 에이커 (약 78만 평) 규모의 ‘헌터스 힐’(Hunter’s Hill) 농장을 사들였어. 그리고 당시 태내시 주내 다수당인 ‘민주적-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에 입당하고 같은 해에 태내시 주의 대의원으로 ‘헌법회의’에 참석했지. 또한 1796년에는 태내시 주가 연방에 합류하게 되어 태내시 주 출신으론 첫 연방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의회에 입성했어. 하원의원이 된 그는 영국과 체결한 ‘제이 조약’(Jay Treaty)을 성토하고, 죠지 워싱턴이 ‘민주적-공화당’ 사람들을 요직에서 배제한다고 비난하면서 죠지에 대한 의회의 ‘感謝결의안’ (Resolution of Thanks) 표결에 반대표를 던졌어. 태내시 주 안에 있는 원주민에 대한 백인들의 군사적 행동에 찬동을 표하기도 한 그는 1797년에 주 의회가 그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했지만 6개월 만에 하원의원직도 내려놓고 귀향하고 말았지.
[문수] 연방 하원의원으로 의회에 진출하자마자 강성을 표하더니 갑자기 왜 사임을 했을까요?
[해월] 글쎄? 사유에 대한 기록이 없어 설명이 궁하네! 집에 돌아온 엔드류는 1798년에 초대 주지사 ‘쟌 세비어'(John Sevier)에 의해 태내시 주 대법원 판사에 임명되었어. 그리곤 1804년까지 판사직을 유지하지. 헌데 1802년에 2대 주지사 ‘아치볼드 론’(Archibald Roane)이 그를 주 민병대 사령관인 소장에 지명하자 민병대 사령관이 선출직이었던 관계로 전임 주지사였던 세비어와 경선을 하게 되었지. 세비어는 연속 4선을 하지 못하는 주법에 의해 2년 임기인 주지사에 3선(1795-1801)을 한 후 할 수 없이 아치볼드에게 잠시 자리를 내주고 나왔다가 다시 1803년부터 1809년까지 내리 세 번 주지사를 역임해 모두 12년 동안 주지사직을 이어나간 인물이야. 자기가 임명한 엔드류 주 대법원판사와 경선하게 되자 심기가 불편해진 그는 상대방 부인의 흠을 들춰내는 등 정치추태를 보였어. 민병대 사령관직은 민병대 장교회의에서 선출하는데 동점이 나오자 주지사가 엔드류의 손을 들어주어 일단 결정이 났어. 그 후 불같은 성격의 앤드류가 자신의 부인을 험담한 세비어에게 대결을 신청했는지 이들 두 사람은 맞대결을 결정하고 또 길거리로 나와 총을 겨누었지. 다행히 서로에게 쏘지는 않고 대결을 끝냈다고 하네.
[문수] 또 맞대결을 했다니 가슴이 두근두근하네요. 그 당시에는 법보다 주먹이 정말 앞섰나 봐요.
[해월] 1803년에 세비어가 다시 주지사로 돌아오자 이듬해인 1804년 엔드류는 판사직을 사임하고 파산직전에 있는 자신으로 돌아오지. 그동안 여기저기에 땅과 현물을 투매했는데 사기를 당한 것 같아. 급기야 농장과 땅 2만 5천 에이커를 처분하고 대신 네쉬빌 인근에 420 에이커 규모의 작은 농장을 사서 주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어. 이곳이 나중에 사적지가 된 ‘허미티지’(Hermitage. 은신처라는 뜻)라고 불리는 곳이야. 이곳에서 농사에 몰두한 엔드류는 목화를 재배하여 부를 축적하기 시작해 땅도 1천 에이커 정도로 늘리고 노예도 처음에는 9명이었는데 계속 늘려나가 그의 생애동안 모두 약 300명에 달하는 노예를 소유했다고 해. 노예는 일종의 부의 상징이기도 한데, 엔드류에게 노예란 ‘최소한 인간적이고 기본적인 대우만 해주면 소유해도 괜찮은 투자 상품’ 정도였지. 최소한의 대우를 해주는 대신 도망하거나 명령에 불복하면 매우 혹독하게 관리했던 것 같아.
[문수] 공무에 시달리다 농장을 운영하면서 구애받지 않고 평화롭게 살았겠네요.
[해월] 웬걸! 엔드류의 세 번째 맞대결 소식이 들린 것은 1806년 5월 30일이야. 경주마를 소유했던 엔드류가 경마장에서 같이 경주를 하게 된 ‘어윈 대위’(Captain Erwin)의 말에 문제가 생겨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경마가 취소되었어. 그렇게 되면 수입을 올리지 못하니 경마장 규칙으로 어윈으로부터 벌금조로 800 달러를 받게 되었지. 이 벌금의 지불문제로 서로 심하게 말다툼을 하게 되었는데, 어윈의 사위인 ‘찰스 딕킨슨’ (Charles Dickinson) 변호사가 끼어들면서 더 크게 번지게 된 거야. 어윈은 엔드류를 “겁쟁이”라고 하고 “모호한 말로 남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불렀지. 그러면서 지방 신문인 '네쉬빌 리뷰’(Nashville Review)에 글을 올려 엔드류를 “쓸모없는 무뢰한으로 비겁한 사람”이라고 비방하면서 부인까지 들먹였어. 왜 그렇게 까지 해야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부인에 대한 험담까지 하니 엔드류가 참을 수 없었던지 결국 이들의 언쟁은 맞대결로 이어지고 말았어. 듀얼을 불법화한 태내시 주법 때문에 이웃 캔터키 주로 옮겨 벌어진 맞대결에서 코인 던지기로 찰스가 먼저 발포를 했고 엔드류는 총알에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지. 규칙에 따라 가만히 서서 엔드류가 쏘기를 기다렸던 찰스는 가슴에 총알이 관통해 과도한 출혈로 사망하고 말았어. 총알이 심장에 너무 가까이 박혀 수술을 못하게 된 엔드류는 평생 총알을 가슴에 담고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어.
[문수] 저런 일이! 참 모를 일이네요! 개인의 일로 총상을 입는 싸움을 하던 분이 대통령까지 이르다니요!
[해월] 인명을 살해하기까지 했으니 불명예스럽지. 엔드류의 숙명적 삶은 그때부터 시작이야. 군인으로서의 전투가 시작되었거든! 45세가 되던 1812년 6월 18일 당시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 대통령이 영국과의 전쟁을 선포하자 태내시 주 민병대 사령관인 그는 즉각 자원병을 모집했지. 미국군이 북서부 전선에서 연전연패를 하자 1813년 1월 그에게 남쪽 ‘뉴 올리언즈’(New Orleans)로 출정해서 영국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어. 2,000 명의 자원병을 모집한 엔드류는 곧 병력을 인솔해 네쉬빌을 떠나 미시시피 주 ‘나채스’에 이르렀는데, 정작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쟁부 장관 ‘쟌 암스트롱’ (John Armstrong)으로부터 더 이상 자원병의 도움이 필요치 않으니 가지고 있는 전투물자를 현지 사령관인 ‘제임스 윌킨슨’ (James Wilkinson) 장군에게 넘기고 해산하라는 명령서가 날아왔지. 윌킨슨 사령관은 1806년에 엔드류가 어떤 사건으로 반역자로 체포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에게 모든 것을 인계하고 해산하라는 전쟁부 장관의 명을 받은 엔드류는 2천 명에 달하는 자원군대 해산은커녕 그 모두를 이끌고 네쉬빌로 돌아왔어. 이때부터 그에게 ‘히커리’(Hickory)라는 별명이 생겼어. 후에 ‘Old Hickory’라고 바뀐 이 별명은 그의 성품이 히커리 나무와 같이 강직하고 굽힐 줄 모른다는 뜻이지.
[문수] 2천 명이나 되는 대군이 출동했는데 더 이상 필요 없으니 해산하라는 명령은 무슨 경우인가요?
[해월] 전쟁부 장관의 말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니? 그런데 네쉬빌로 돌아온 앤드류는 우연히 부하장교가 휘하 군인과 말다툼을 하는데 끼어들었다가 어깨에 총알이 박히는 사고를 당했어. 이 사고로 박힌 총알은 대통령 시절에 제거했지만 항상 사고가 떠나지 않는 것이 불안해.
[문수] 그래도 이번에는 맞대결이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조마조마해요.
[해월] 하하! 걱정을 많이 해주니 문제가 없겠구나! 어깨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인데 1813년 9월 태내시 주 3대 주지사 ‘윌리 브런트’(Willie Blount)가 ‘밈스 요새’(Fort Mims)에서 민병대 250여 명과 시민을 학살한 ‘래드 스틱스’(Red Sticks)라는 원주민 부족에게 보복공격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어. 엔드류는 ‘쇼니’ (Shawnee) 부족과 함께 영국군을 도와 전투에 참여해 아군을 학살한 래드 스틱스 부족을 상대로 11월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1814년 초에는 미국 정규군까지 합세하면서 부족장의 항복을 받아내고 부족을 완전히 섬멸하고 말았지.
[문수] ‘올드 히커리’ 엔드류에게 걸리면 살아남지 못해요!!!
[해월] 승전고를 올린 엔드류는 1814년 6월 8일에 미국 정부로부터 정식 미국 육군준장으로 발령받았고, 10일 후에는 ‘명예’ 육군소장으로 진급되면서 태내시, 루이지에나, 미시시피 부속령과 ‘머스코기 크릭 원주민 연합’(Muscogee Creek Confederacy)을 총괄하는 제7 지구군 사령관(Command of 7th Military District)이 되었어. 엔드류는 정식 군 사령관이 되자 곧바로 이 지역에 있는 원주민들과 ‘젝슨 요새 협약’(Treaty of Fort Jackson)을 체결하여 일대의 토지 2천3백만 에이커 (약 258억 5천2백만 평. 대한민국 땅의 95% 규모)를 미국정부에 강제 헌납토록 만들었지. 물론 하자가 없는 협약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고, 당시 제임스 메디슨 대통령도 승인한 내용이야.
[문수] 와! 거의 한국땅 규모에 달하는 지역을 한 순간에 미국땅으로 넘기다니요?! 보통사람은 아니지요?
[해월] 오늘의 미국이 존재하기까지 여러 사건이 있고 인물이 존재했었으니 그냥 된 것은 아니겠지. 엔드류는 1814년 8월에 군을 알라베마 주의 ‘모빌’(Mobile)로 이동시키지. 이 지역과 후로리다를 통치하는 스페인의 총독이 지난번 전투에서 ‘Red Sticks’에게 무기를 제공한 것을 빌미로 후로리다를 공격하여 점령할 의도였어. 예상대로 스페인 총독이 영국군에게 도움을 청했지. 엔드류는 영국군을 ‘보여 요새’(Fort Bowyer)에서 물리치고, 11월 7일에는 ‘팬사콜라 전투’(Battle of Pensacola)에서 스페인군과 영국군을 항복시켜 영국군을 철수시켰어. 그 후 영국군이 뉴 올리언즈로 침공할 계획이라는 첩보를 얻은 엔드류는 즉시 전열을 정비한 후 뉴 올리언즈로 군대를 이동하는 한편 주위의 흑인노예와 원주민들에게 백인군인과 같은 급료를 주기로 하고 병력을 증강하면서 전투준비를 했지. 정보대로 1만의 영국군 병사가 뉴 올리언즈로 진입하자 미리 준비한 이점을 살려 1815년 1월 8일 벌어진 전투에서 영국군을 괴멸시키고 말아. 2천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영국군은 퇴각했는데 때맞춰 1815년 2월 영국과의 전쟁을 끝내는 ‘갠트 조약’ (Treaty of Ghent)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
[문수] 드디어 영국과의 두 번째 전쟁(War of 1812)이 끝나는군요.
[해월] 엔드류는 뉴 올리언즈에서의 전투(Battle of New Orleans)를 승리로 이끌면서 일약 미국의 영웅으로 다시 태어났어. 1815년 2월 27일 의회에서는 ‘의회감사결의안’(Thanks of Congress)을 채택했고 또 ‘의회골드매달’ (Congressional Gold Medal)까지 안겨주었어. 기쁨이 충만한 엔드류는 1816년에서 1820년 사이 그의 관할 내 원주민 부족들과 5개의 조약(당시 원주민과의 조약이란 현재 그들이 살고 있는 미동부와 중남부의 땅을 미국에 넘기고 중서부 미개척지로 이주하는 합의문을 뜻함)을 더 맺으면서 수천만 에이커를 미국의 영토로 귀속시켰지. 그리고 곧 남부 최종 목적지인 후로리다로 눈을 돌렸어.
[문수] 후로리다는 스페인 땅이라면서요? 스페인과 전쟁을 하는 것인가요?
[해월] 스페인이 점령한 땅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스페인과 전쟁을 치러야겠지. 여기서 말하는 ‘후로리다’ 라 함은 스페인이 1513년부터 점령하여 250년간 통치해 온 현재의 후로리다 주 지역과 서부의 루이지에나, 미시시피 그리고 '알라베마'(Alabama) 주 일부가 포함된 프랑스령까지 포함하는 지역이야. 1763년 영국과 프랑스 및 스페인 등이 참여한 ‘7년 전쟁’(Seven Years' War. 1756-1763)이 끝나면서 이들 지역이 영국에 넘겨지고, 영국은 영토가 너무 방대해 이를 서부와 동부로 나누게 되었어. 동쪽에 있는 ‘아팔라치콜라 강’ (Apalachicola River)을 경계로 동부 후로리다는 ‘세인트 오거스틴’(St. Augustine)에 수도를 정해 통치하고, 서부 후로리다는 ‘팬사콜라’(Pensacola)를 수도로 정해 통치했지. 따라서 후로리다는 영국의 미국 내 13개 식민지 주와는 별도의 지역이었어. 그 후 20년이 지난 1783년에 미국의 독립전쟁이 영국의 패배로 끝났지만 영국은 이 두 개의 후로리다를 미국에 넘기지 않고 다시 스페인에 돌려줬어. 1800년에 스페인이 프랑스의 나폴래옹의 압력으로 맺은 비밀협정으로 옛 루이지에나 땅을 돌려주었는데 1803년에 프랑스가 이 땅을 미국에 팔았잖아. 재퍼슨이 사들인 이 땅은 중부의 땅과 루이지에나와 뉴 올리언스 땅이었지. 그러나 미국은 이때 ‘퍼디도 강’(Perdido River) 서부에서 ‘미시시피 강’에 이르는 '서 후로리다'까지도 샀다고 주장하면서 스페인과 경계에 대해 분쟁을 야기시켰지.
[문수] 서부 후로리다라고 하는 지역이 한동안 영국, 미국,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 등의 각축장이었군요?
[해월] 영국과의 전쟁 중에 이 지역으로 많은 미국인과 영국인들이 이주해 들어왔는데 그들이 스페인의 통치를 거부하며 새로운 국가를 세웠어. 정치인 '필몬 토마스'(Philemon Thomas. 1763-1847)의 지휘아래 지역 총독을 체포하는 무장봉기를 일으켜 1810년 6월 ‘西 후로리다 공화국’(Republic of West Florida)으로 국명을 정하고 ‘세인트 후렌시스빌’ (St. Francisville)을 수도로 정한 이들 폭도들은 국가의 형태를 갖추었지만 제임스 메디슨 대통령의 명령으로 미군이 진입하면서 두 달 반 만에 점령당하고 미국정부는 그렇게 원하던 이 지역을 루이지에나 주에 편입시키고 말아.
[문수] 후로리다가 본래의 영국식민지 일부가 아니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네요?
[해월] 그렇게 서부 후로리다를 접수한 미국은 동부 후로리다 마저 접수하기 위한 작전을 짜기 시작했지. 우선 엔드류는 동, 서부 경계인 아팔라치콜라 강변에 영국군이 전쟁 중 임시로 설치한 요새인 ‘프로스팩트 블러프’(Prospect Bluff)부터 공격하기로 했지. 일명 ‘니그로 요새’(Negro Fort)라고도 하는 이곳은 수천 명에 달하는 영국군과 지지자들, 도망 나온 노예들과 원주민 등이 모여 살며 노예들의 도피처가 되고 미국인에 위협적 존재가 되어 있던 곳이야. 1816년 7월 엔드류 휘하 ‘던칸 크린취’(Duncan Clinch) 대령이 이끄는 미군이 진입해 섬멸해 버리고 요새를 없애버렸지. 동부 후로리다 진입로를 활짝 열어 제켜버린 거야.
[문수] 동부 후로리다는 현재의 후로리다 주라고 하셨는데 그럼 상당히 늦게 미국땅이 된 거네요.
[해월] 맞아. 1817년 12월 전쟁부 장관 ‘쟌 캘혼’(John C. Calhoun)이 ‘제1차 새미놀 전쟁’(First Seminole War)을 선포하면서 후로리다를 완전히 점령하게 되는 신호탄을 쏴 올렸어. 여러 원주민 부족으로 구성된 새미놀은 후로리다에 살면서 미국 남부의 백인들과 지속적인 분쟁을 일으켜 왔는데 미국정부는 이 새미놀을 상대로 엔드류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새미놀을 굴복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엔드류는 최선의 정복은 후로리다 자체를 점령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제임스 먼로 대통령에게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후로리다를 점령하는 것이 최선이며 60일 안에 달성하겠다”는 편지를 보냈어.
[문수] 미국인을 괴롭히는 원주민을 공격하라 했는데 후로리다 자체를 점령하겠다고 장담하는 건 왠지 불안한데요?
[해월] 후로리다를 점령하려면 그 지역을 통치하는 스페인과 맞서야 하잖아. 결국 엔드류는 스페인군 요새를 공격하여 팬사콜라를 점령하고, 1818년 5월에 가서는 저항하는 새미놀과 스페인군을 완전 무력화 시켰어. 이때 새미놀을 돕던 두 명의 영국인을 체포하여 약식 재판 후 처형해 버리는 바람에 영국과의 문제를 만들기도 했지. 점령한 스페인 영토는 곧 반환했지만 허락 없이 스페인 군과의 전투를 벌이고 영국인을 처형한 엔드류가 무사할리가 없었지. 전쟁부 장관 캘혼은 미국이 스페인에게 전쟁을 선포한 적이 없다며 위헌적 행위를 한 그를 처벌하길 원했지만 1819년 2월 의회에서 그를 무죄방면했고, 다행히 스페인과 후로리다 매입협상을 벌이고 있던 국무장관 ‘쟌 퀸지 에담스’(John Quincy Adams)는 끝내 후로리다 매입을 마무리진 ‘에담스-오니스 협약’(Adams-Onis Treaty)을 체결하는 성과를 거두었어. 미국에 유리하니까 위법 행위를 자행했어도 눈감아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지.
[문수] 와! 드디어 미국의 영토가 북부 메인(Maine)에서 남부 후로리다 부속령으로 연결되는 역사가 이루어졌네요. '토마스 재퍼슨'(Thomas Jefferson) 대통령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에나 매입’을 통해 중부의 광대한 지역을 사들이고 이제 남북으로 뻥 뚫린 동부를 완성했으니 미국이 영토면에서도 거대한 나라가 된 모습이어요.
[해월] 영토는 거대해져 가는데 경제가 받쳐주지 못한 것이 안타깝지. 정부는 군대를 줄여 예산을 절약하고 엔드류는 장군직을 물러나게 되었어. 먼로 대통령은 미안했던지 1821년에 그를 후로리다 부속령의 주지사로 발령 냈지만 두 달 만에 지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허미티지’(Hermitage) 저택으로 돌아갔지. 집에서 건강을 회복하는 동안에도 일은 계속되었어. 그가 몸담고 있는 ‘Freemason’의 태내시 지부의 ‘그랜드 마스터’ (Grand Master)가 되었고, 태내시 정부가 치카소 원주민땅을 매입하는 작업을 도왔어. 주위사람들과 땅을 투매해 ‘멤피스’(Memphis)라는 마을을 건립하기도 했지. 동시에 지지자들과 함께 182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