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대 쟌 퀸지 에담스 - 2 of 2 : 노예폐지론자 1825-1848
미국의 여섯 번째 대통령 ‘쟌 퀸지 에담스’(John Quincy Adams)는 두 번째 대통령 '쟌 에담스'(John Adams. 1735-1826)의 장남이었습니다. 1767년 7월 11일 토요일 메사추새츠 주의 조용한 마을 ‘브레인트리’ (Braintree. 현재명은 Quincy임)에서 쟌 에담스와 '에비게일 스미스 에담스'(Abigail Smith Adams. 1744-1818)의 3남 3녀 자녀 중 두 번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그녀의 할아버지였던 ‘쟌 퀸지’(John Quincy) 대령이 증손자가 태어난 지 이틀 만에 돌아가시자 그를 기리는 뜻으로 그의 성을 넣어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나중에 퀸지대령의 이름은 이 증손자가 태어난 도시의 이름으로 탈바꿈되어 ‘대통령의 도시’(City of Presidents)라는 이름으로도 전해집니다.
쟌 퀸지 에담스는 변호사로서 주 상원의원, 연방 상원의원, 연방 하원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연방 국무장관(Secretary of State)을 지낸 행정가였습니다. 그는 또 미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서 내덜렌드 대사, 프러시아 대사, 러시아 대사 그리고 영국 대사 등을 역임했습니다. 소위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혁명의 세대가 지나가고 그다음세대의 선두주자로 1825년부터 4년 동안 6대 대통령으로 봉직하다 퇴임한 후 1831년 연방 하원에 입성하여 미국 최초이자 ‘엔드류 쟌슨’(Andrew Johnson) 17대 대통령과 함께 전직 대통령으로서 연방 하원의원이 되어 1848년 2월 23일 사망할 때까지 퇴임 후 쉼 없이 17년간을 국가를 위해 봉사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지금부터 ‘노예제도폐지론자’(Abolitionist)라는 별명을 달고 살던 쟌 퀸지 에담스(이하 퀸지)에 대해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진희] 헌법전서에 손을 얹고 대통령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겠다고 하는 서약이 성경책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항상 출범할 때는 단합과 협치를 외치는 모습은 다른 지도자들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은데요?
[해월] 선거 때 서로 다시는 안 볼 것 같이 공격했으니까 선거 후엔 그렇게 다독거려야 하겠지. 퀸지는 변화를 가져보려고 애썼던 것 같아. 1825년 3월 4일 금요일 영상 8도 정도의 쌀쌀하고 봄비가 내리는 날 취임식을 가진 퀸지는 선서용으로 헌법전서를 사용하는 전례를 남겼지만 그뿐 아니라 의상에도 변화를 가져와 당시 사람들이 입던 반바지 형태의 바지에서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바지를 입고, 머리도 길게 늘어트리는 스타일에서 짧게 자르는 숏커트로 바꾸고 확실히 변한 모습으로 취임식을 가졌어.
[진희] 2세 대통령이 취임하니 머리에서부터 의상까지 새로운 출발을 보였군요?
[해월]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도 있듯이 신선한 모습을 보이려는 뜻이라고 생각해. 조각을 하면서 퀸지는 전임 먼로 대통령 때의 여러 사람을 그냥 연임시키면서 ‘엔드류 젝슨’(Andrew Jackson) 장군에게는 전쟁장관을 그리고 재무장관에는 ‘윌리엄 크로훠드’(William Crawford)를 지명했는데 두 사람 모두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어. 그래도 엔드류와는 먼로 때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와서 문제가 없기를 바랐는데 ‘핸리 클레이’(Henry Clay)를 국무장관에 앉히자 엔드류가 돌변하기 시작했지.
[진희] 대통령직을 놓고 싸운 뒤이니까 이해를 할 수는 있겠어요.
[해월] 퀸지가 핸리에게 국무장관자리를 약속하고 지지를 얻어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하는 민주당의 ‘야합’ 주장에 결국은 두 사람 사이가 갈라지고 특히 두 사람의 지지파들이 각기 정파를 만들면서 정가가 갈라졌어. 182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후보들을 중심으로 젝슨파, 크로훠드파, 쟌 퀸지 에담스파 그리고 켈혼파 등으로 갈라졌지. 퀸지 지지파들은 그들을 ‘전국공화당’(National Republicans)이라 불렀고, 젝슨파들은 스스로를 ‘민주당’(Democrats)이라고 부르고 있었어. 이 시기를 미국의 정가에서는 ‘1차 정당 체제’(First Party System) 시기가 끝나고 ‘2차 정당체제’(Second Party System)로 전화되는 시점이라고 부르지.
[진희] 그럼 1차 정당체제란 언제를 말하는 것인가요?
[해월] 그 시기는 대개 1792년부터 1824년 대통령선거 시점까지를 일컫는데, ‘알랙산더 헤밀턴’ (Alexdander Hamilton. 혼외자로 태어나 출생년도가 정확치 않음 1755/1757-1804)이 주도한 ‘연방주의당’(Federalist Party)과 ‘토마스 재퍼슨’(Thomas Jefferson)과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이 이끌던 ‘민주적-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 현 공화당의 전신이 아님) 등 양당이 정국을 대변하던 시절을 말하지. 초대 죠지는 정당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이었지만 2대 쟌은 연방주의당 출신 대통령이었고, 3대 토마스와 4대 제임스 메디슨 그리고 5대 제임스 먼로 등이 민주적- 공화당 출신 대통령들이었지. 6대인 퀸지는 시작은 부친 때문에 자연히 연방주의당에서 시작했지만 중간에 토마스의 정책을 지지하기 시작하고 재퍼슨파인 5대 제임스 먼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직을 수행하면서 완전히 ‘민주적-공화당’으로 당적을 바꿔 6대 대통령에 출마하게 된 것이야.
[진희] 그렇게 건국 초기의 양당체제가 유지되던 시절이 1차 정당체제였고 1824년 대선 이후부터 다당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 ‘2차 정당체제’의 시작이라는 말씀이시군요.
[해월] 맞아. 앞서도 말했지만 민주적-공화당계 사람들이 여러 당파로 갈라지면서 정당도 여러 개가 탄생하게 돼. 1828년 대선에 맞춰 엔드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민주당’이라 부르며 뭉치자 엔드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여러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어. 핸리 클레이를 중심으로 한 ‘전국공화당’ 사람들과 엔드류 반대파들이 ‘위그당’(Whig Party)을 형성하고, 그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엔드류가 ‘메이슨’(freemason)에 가입한 것을 이유로 ‘반 메이슨 당’ (Anti-Masonic Party)도 만들어졌어. 노예를 해방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노예폐지 자유당’ (Abolitonists Liberty Party)과 ‘자유국토당’(Free Soil Party) 등도 생겨났어. 이러한 정치구도가 소위 말하는 ‘젝슨주의 시대’ (Jacksonian Era)라 하는 1854년 초 까지 2차 정당체제 형태로 진행되었고 그 이후엔 ‘3차 정당체제’(Third Party System)로 이어져 1890년대 까지 전개되었어.
[진희] 미국의 정당사를 보면 또 다양한 역사를 살펴볼 수 있겠네요.
[해월] 나름 미국정치의 발전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을 거야. 나중에 기회 되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지. 19차 의회의 회기가 끝나고 중간선거 성격의 20차 의회의원 선거가 1826년에 돌입하자 불행히도 퀸지 지지 의원수가 상, 하 양원에서 모두 젝슨파보다 줄어들게 되어 미국 최초로 거대 야당이 형성되었어. 20차 회기가 시작된 1827년 12월 3일 현재 하원은 전체 24개 주에서 총 213명의 의석이 있었는데 여당은 100석을 갖게 되어 다수당이 되는 107석에 미치지 못했고, 야당은 113석을 얻어 다수당의 지위를 차지했지. 한편 상원도 전체 48석에 여당은 21석을 그리고 젝슨파인 야당은 27석을 얻어 다수당이 된 거야. 지금도 그렇지만 의회를 장악하지 못하면 대통령은 식물대통령이 될 수밖에 별도리가 없게 돼.
[진희] 저런! 정치란 참으로 묘하네요. 장관하나 임명한 것이 마음에 안 든다고 그렇게 돌아서다니요!
[해월] 장관도 장관 나름이지. 국무장관은 차기 대통령후계 1순위라 여겼던 시절이기 때문에 부통령을 맡은 사람도 자기에게 불리하게 되었다고 돌아섰잖아. 초당적 국가를 세우자고 외쳤던 퀸지였지만 거대야당에서 자기를 지지하던 하원의장을 하루아침에 갈아치우자 “이제 이나라는 대통령의 반대파가 의회를 좌지우지하는 나라가 되었다”라고 한탄했지. 한탄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 그가 제안했던 국내 증강 프로그렘 대부분이 의회에서 부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야.
[진희] 정파를 떠나 국가에 헌신하자고 외쳤던 퀸지에게 힘든 시간이 왔네요.
[해월] 퀸지는 그래도 꿋꿋하게 할 일을 해 나갔지. 내치를 위한 정책으로 ‘사회간접자본 증강’과 더불어 이를 관장할 ‘내무부’(Department of Interior) 설립을 제안하고, '국립대학'(National University)과 '해군사관학교'(Naval Academy) 건립, '국립천문관측소'(national astronomical observatory) 건립, '통일 측량 및 계량법'(metric system) 확립, '연방파산법'(national bankruptcy law) 제정 등도 제안했어. 그리고 수도인 워싱턴 디씨에서 남쪽 뉴 올리언즈 (New Orleans)까지 이어지는 국도도 건설하자고 제안했지. 이 모든 사업에 대한 세입원은 증세나 국채발행 보다 서부에 늘어난 토지를 매도한 자금으로 충당하자고 했어. 이런 퀸지와 핸리의 정책을 지방마다 얽혀있는 이해관계를 국가 전체 경제를 증강하는 차원으로 통합하자는 ‘미국체계’(American System)라고 부르지.
[진희] 국가가 건립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출현할 만한 제안인데 거대야당에 발목을 잡혔나 보군요?
[해월] 맞아. 한국의 정치사에서 20대 대통령이 겪는 상황과 비슷한 모양새가 되었지. 대부분의 사업계획이 의회에서 부결되거나 상정 조차 하지 못하고 사라졌어. 그나마 성과를 본 것은 1824년과 1828년 사이 도로, 운하, 철도 그리고 강을 이용한 항해 등에 대한 실태조사가 ‘연방공병대’(United States Army Corps of Engineers)에 의해 진행됨과 동시에 그에 대한 수리와 신규 건설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지. 퀸지는 재직동안 이들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보수와 신규 건설을 직접 지휘했는데 주목할 만한 것으론 ‘채사픽과 오하이오 주 간 운하’(Chesapeake and Ohio Canal)의 착공이 있고, ‘책사픽과 댈라웨어 주간 운하’(Chesapeake & Delaware Canal)와 ‘루이빌과 포트렌드 간 운하’(Louisville and Portland Canal)의 건설, 오하이오 주와 인디에나 주 사이에 있는 Great Lakes와 Ohio River 연결 그리고 노스 케롤라이나 주에 있는 ‘디스멀 늪지 운하’(Dismal Swamp Canal)의 확장과 재건 등을 꼽을 수 있어. 가장 괄목할만 한 사업에는 매릴렌드 주 볼티모어 항에서 출발하여 오하이오 주까지 미국 내 최초로 승객을 실어 나르는 철로공사가 그의 재임기간에 완공되어 1830년부터 운행이 되었다는 것이야. ‘B&O’ (Baltimore and Ohio Railroad)라 불리는 이 철도사업은 증기기관차를 운행하여 승객과 화물을 동시에 이동시키는 최초의 철로로 지금은 'CSX 운송회사'(CSX Transportation) 사가 운영하는 약 1만 5백 마일이 연결된 철로로 발전했지.
[진희] 증기기관차 철로가 승객을 태우고 첫 출발하는 광경이 눈에 선하네요. 그 모습을 현장에서 본 사람들은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요. 많이 신기했을 것 같아요.
[해월] 밤을 무서워했다던 고종高宗이 1887년 덕수궁(원명은 慶運宮) 안에서 ‘덜덜불’이라 불렸던 가로등을 처음 켜고 눈이 휘둥그레진 온 궁안 사람들이 모여 구경했다고 하는데, 50년도 전에 미국에서 그와 비슷한 광경이 벌어졌겠지. '산업혁명'의 시대가 유럽과 미국을 포함해 인류에게 열리는 순간이었으니까 참 좋았을 거야. 기차선로가 놓이자 서부로 진출을 원하던 사람들은 정부가 더욱 강한 서부진출정책을 펼쳐주기를 원했지. 그 뒷면에는 원주민(Native Americans)에 대한 배려는 접고라도 백인들의 진출을 도와달라는 뜻도 담긴거야. 퀸지는 임기 초에 죠지아 주 ‘죠지 트루프’(George Troup) 주지사가 1825년 2월 지역의 ‘무스코기’(Muscogee) 원주민을 협박해 강압적으로 협약을 체결했다는 이유로 그들과 맺은 ‘인디언 스프링스 협약’(Treaty of Indian Springs)을 폐기시켰어. 그리고 1826년 1월에 새로운 협약을 체결하면서 그들에게 삶의 터전을 떠나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고 대신 그들이 살던 대부분의 지역을 조지아 정부에 매도토록 했지. 트루프 주지사는 퀸지가 맺은 새 협약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조지아 주민들에게 무스코기 인디언들을 모두 추방할 것을 선동했어. 연방정부와 조지아 주 정부가 충돌하기 직전 무스코기가 3번째 협약을 받아들이면서 무마되기는 했지만 즉각적인 원주민 추방을 선호하는 남부 사람들의 연방정부정책에 대한 반발은 심화되었다고 봐.
[진희] 원주민들이 수천 년 동안 살아오며 개척해 놓은 삶의 터전을 빼앗으려는 백인들의 악랄한 정책의 발로였겠죠. 퀸지는 대 원주민 정책면에서도 남부사람들과 척을 졌네요.
[해월] 예로부터 바른 일을 펼치려는 정치가는 주위의 시달림을 피할 길이 없었나 봐. 퀸지는 국내 사업도 가능한 범위 내에서 열심히 추진했지만 밖으로도 미국의 교역을 늘리려고 애썼어. 퀸지의 대외정책은 한마디로 “미국은 괴물을 쳐부수기 위해 해외로 나가지는 않겠다”였지. 대신 평화롭게 교역을 추진하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어. 유럽의 댄마크나 프러시아 그리고 중미연방공화국(Federal Republic of Central America) 등과 호혜주의 협약들을 체결하기 시작했어. 중미연방공화국은 1823년부터 1839년까지 존재했던 ‘중미연합정부’라고 불렸던 지역연합인데 여기에 참가한 국가들은 ‘코스타 리카’(Costa Rica), ‘앨 살바돌’(El Salvador), ‘과테말라’(Guatemala), ‘온두라스’(Honduras) 그리고 ‘니카라과’ (Nicaragua) 등이 있었어. 퀸지행정부는 또 하와이 왕국(Kingdom of Hawaii)과 ‘타히티 왕국’(Kingdom of Tahiti)과도 교역협정을 맺었고, 댄마크(Denmark)와 스웨덴(Sweden)과 교역협정을 맺음으로 양국의 식민지들과도 교역할 수 있는 길을 열었지. 다만 영국의 태평양 지역 속령인 ‘British West Indies’ 여러 섬나라와의 교역은 잠시 성공한듯 했지만 끝내 영국과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지 못해 큰 진전은 없었어. 그래도 퀸지의 지속적 노력으로 통상금액적으로는 상당한 진전을 볼 수 있었지.
[진희] 퀸지와 엔드류의 관계가 불편해졌다는데 1828년 대선의 상황은 어땠나요?
[해월] 엔드류는 퀸지의 임기 초 핸리 클레이의 국무장관 임명건으로 이에 불만을 품은 주위 여러 정치세력으로부터 차기 대통령에 출마할 것을 종용받기 시작했지. 국무장관에 오른 핸리의 대통령 승계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야. 그들은 조직력을 강화하고 정책적인 면보다는 엔드류 젝슨의 인기도를 강조하면서 퀸지와 행정부의 부패를 들춰내는데 열성이었지. 그럼에도 퀸지는 재선에 필요한 정치캠페인을 외면하고 ‘미국체제’ 확립을 이뤄냈다며 자만과 자신감으로 심지어 신문과 같은 언론을 활용하는 것도 거부했어. 당시 분위기가 정책대결이 아니라 인물위주로 선거캠페인을 벌이는데 퀸지는 스스로를 너무 믿었지 않았나 생각해.
[진희] 인물로 본다면 퀸지가 사실 한수 위 아닌가요?
[해월] 내가 봐도 퀸지가 출신이나 경험으로 보아 엔드류와 상대가 되지 않는 인물이긴 하지. 편견이 아니라 엔드류는 아버지가 태어나기 3주전에 사망해 어머니 밑에서 자라다 14살에 고아가 되어 힘들게 자수성가한 강한 의지의 소유자이지. 후에 군장성이 되면서 영국군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스페인이 지배하던 후로리다를 정복하면서 일약 영웅이 된 사람이야. 누구보다 많은 경력을 쌓아 온 퀸지는 그럼에도 자신이 선택한 부통령인 ‘쟌 켈혼’ 마저 상대방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할 말이 없어져요. 게다가 대선이 있던 1828년에 중요한 사건이 하나 벌어졌어. 소위 ‘1828년의 관세법’(Tariff of 1828)이라는 것이데 당시 관세는 수입물품에 대한 세금으로 정부 세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지. 관세율은 국내 산업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완성품을 생산하는 북부에서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지. 관세가 올라가면 수입원자재 가격이 오르기 때문에 북부 사업가들은 피해를 보게 되고 농산품 생산이 생업의 주종이던 남부에는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아. 그런데 1827년부터 의회를 장악한 민주당이 쟌을 공격할 방안으로 관세를 올리려고 법개정에 나섰고 결국 인상안이 통과되었는데, 쟌이 어쨌든 이 법안에 서명하면서 법으로 확정되었지. 따라서 쟌은 반대파인 남부 사람들은 물론 지지파였던 북부사람들까지 모두 잃게 되는 상황에 처해졌었어.
[진희] 그럼 전국에서 민심을 잃게 되었다는 말씀이신데 그 상태에서 선거를 치르면 결과가 보이네요.
[해월] 선거사상 처음으로 북부출신 정, 부통령 후보와 남부출신 두 명이 맞대결한 1828년의 11번째 대선에서 엔드류가 총 261명 선거인단 중 178표를 얻어 쉽게 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어. 국민투표에서도 56%에 달하는 득표를 함으로써 명실공히 미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되었다고 봐야 하지.
[진희] 대통령 아버지를 둔 사람으로 태어나 아버지 때부터 본인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외교관 생활을 해오고 대통령으로 헌신했던 사람인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재선에 실패하고 말았네요.
[해월] 퀸지와 엔드류간 사이가 많이 벌어지고 상대방을 비방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 엔드류에 대한 감정이 매우 상했던지 퀸지는 그가 남긴 일기장에 그의 모교인 하버드대학교에서 엔드류에게 명예학위를 수여하기로 하고 그를 초대하자 “하바드와 같은 명문 상아탑이 문법에 맞는 글 하나 쓰지 못하고 자기 이름조차 바르게 쓰지 못하는 야만인에게 학위를 준다니 참혹하게 생각하며 도저히 참석할 수가 없다”라고 혐오에 찬 글을 남겼다는 거야. 퀸지는 아버지 쟌이 그랬던 것처럼 후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은 대통령 5명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어.
[진희] 저런!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네요. 45대 트럼프 대통령이 뒤를 이은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았을 때 보기가 참 안 좋았잖아요.
[해월] 그러게 말이야. 부득이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패배를 불인정하며 의도적이라 보이기 때문에 더 안타깝지. 퀸지는 대통령 선거에서 실패하고 이듬해 4월에 큰 아들 죠지가 28세의 나이로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정계를 완전히 은퇴할까도 생각했었지만 젝슨행정부의 정책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고 인재등용에 ‘엽관제’ (spoiled system)를 활용하는가 하면 가장 친하던 친구가 횡령죄를 뒤집어쓰자 마음을 바꾸어 63세가 되던 1830년 하원의원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지. 현재까지 미국 역사상 전직 대통령이 의회에 진출한 경우가 두 번밖에 없는데 그 첫 번째 경우가 된 것이야. 그것도 연거푸 아홉번이나 당선되면서 그가 사망한 1848년까지 장장 17년 동안 하원의원 생활을 했어.
[진희]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매우 건강한 상태였나 보죠? 63세면 그리 젊은 편은 아니었을 텐데요. 대통령 직을 수행한 것은 겨우 4년인데 퇴임 후 장장 17년 동안을 의회의원 생활을 했다면 여러 후임 대통령을 대하면서 정치생활을 전개한 것이 훨씬 많아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했을 것 같네요, 선생님.
[해월] 사실이야. 일단 퀸지 집안 분들이 대체로 장수한 편이었잖아. 아버지 쟌도 90세까지 사셨던걸 보면 오히려 퀸지는 10년 일찍 사망한 셈이지. 퀸지는 1831년에 의원이 되자 정당도 ‘국민공화당’에서 제3의 정당인 ‘반메이슨당’(Anti-Masonic Party. 반엔드류를 표하는 당임)으로 옮기고, 하원의 ‘통상 및 제조 위원회’(Committee on Commerce and Manufactures) 위원장을 맡아 관세법을 둘러싼 ‘무효화 위기’ (nullification crisis) 사태의 중심에 서게 되었지. 사실 젝슨파인 하원의장이 퀸지를 관세법을 다루는 위원회 위원장으로 앉힌 것은 퀸지가 서명한 관세법의 인상안으로 주정부와 논쟁을 벌이게 만들 계책이었어. 연방관세율이 높다고 주장하는 ‘사우스 케롤라이나’ 주 등 남부세력이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것을 기회삼아 주정부가 연방법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며 부당하게 영향력을 발휘하려는 시도였는데, 결국 세율을 상당히 감축시키는 법이 1832년 통과되었고 또 1833년에도 관세인하 안이 법으로 통과되어 낮은 율로 재조정되기에 이르렀지. 물론 남부주들에게 유리하도록 부당하게 바꾸어진 내용이었어. 퀸지로서는 불가항력적이었지. 그 이후 퀸지는 잠시 마음을 바꿔 1833년에 메사추새츠 주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는데 2위 성적을 내고 과반수득표자가 없어 2차 투표로 가게 되자 사의를 표했던 적이 있고, 1835년엔 상원에 출마하려다 실패하면서 더 이상 다른 선출직에 출마하지 않고 끝까지 하원의원 일을 하게 되었어.
[진희] 하원의원 일만 해도 국가에 봉사하는 의미는 충분할 텐데요.
[해월] 그러게 말이야. 183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2차 정당체계’(second party system)로 퀸지가 소속한 ‘반메이슨당’과 ‘국민공화당’ 그리고 앤드류 잭슨의 반대파들이 모두 모여 ‘위그당’(Whig Party)으로 결합하고 그에 맞서는 민주당 등 크게 두개의 당으로 재편되었지. 오랜 민주당 정권에 맞서 강력한 권력을 가진 대통령체제를 반대하고 의회주의를 주장했던 위그당은 드디어 9대, 10대, 12대 그리고 13대 대통령을 배출하게 돼. 퀸지는 1836년에 13번째 대선이 치러질 때 위그당의 대통령 후보 출마자들을 모두 혐오한 나머지 후보로 나서지 않았어. 민주당의 '마틴 밴 뷰랜'(Martin Van Buren. 1782-1862)에 대적해 위그당에서는 '윌리엄 헤리슨'(William Henry Harrison), '휴 와이트'(Hugh L. White), '데니얼 웹스터'(Daniel Webster), 그리고 '윌리 멩검' (Willie P. Mangum) 등 네 사람이나 출마했어. 결과는 명약관화했지. 결국 8대 대통령으로 뉴욕 주 출신 민주당 후보 ‘마틴 벤 뷰랜’이 선거인단 294표 중 170표를 얻어 선출되었지. 퀸지와 마틴은 정적이었지만 재임기간 동안 서로 정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냈어.
[진희] 그럼 마틴 재직 시에는 퀸지와 별 문제가 없었겠네요.
[해월] 그랬지. 단 한 가지 ‘택사스 공화국’(Republic of Texas) 상황이 있었지만 퀸지가 강력하게 택사스를 미국 주로 편입하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에 남부 주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강력히 밀어붙이지 못한 것 같아. 맥시코로부터 독립에 성공한 택사스 사람들이 공화국을 세우고 노예소유를 허락하면서 남부사람들이 미국의 주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반면 노예 주 확장을 반대하던 퀸지가 이를 허락지 않았지.
[진희] 퀸지가 의원활동을 활발히 하는 모습이네요.
[해월] 맞아! 의회에서 그가 가진 영향력이 대단했었어. 1840년에 가진 14번째 대선에서 위그당이 승리하고 상, 하원도 모두 장악하는 이변이 벌어졌지. 오랜만에 민주당 아성을 무너트렸는데 아쉽게도 9대 대통령에 당선된 ‘윌리엄 헤리슨’(William Henry Harrison)이 취임 1개월 만에 감기기운으로 인한 폐렴을 앓다 사망하면서 부통령인 ‘쟌 타일러’(John Tyler)가 직을 승계하여 10대 대통령에 취임했어. 문제는 쟌이 비록 위그당 소속이었지만 퀸지를 포함한 핸리 클레이 등과 같은 당 지도자들과는 달리 남부 출신인 데다 재퍼슨파 성향을 지녀 당시의 사회발전을 표방하는 ‘미국체제’를 거부하는 입장이었어. 퀸지는 이런 그를 ‘재퍼슨파가 주름잡는 노예보존주의 버지니아의 대리인’이라고 혹평했지. 쟌이 위그당이 추진하는 ‘중앙정부은행’ (national bank) 설립 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자 위그당 의원들이 들고일어나 그를 당에서 축출하고 퀸지를 탄핵추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했어. 현직 대통령이 소속당의 뜻을 저버리는 행위를 취하자 퀸지는 탄핵이 정당하다고 보고 그에 대한 혹독한 보고서를 작성해 탄핵절차를 밟으려 했는데, 위그당 내에서 그에 대한 탄핵안이 상원에서 통과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중단되고 말았지.
[진희] 퀸지가 험한 일까지 맡았었네요?
[해월] 진희 말대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라는 문제는 험한 일이 확실하지. 지도자의 길은 역시 험난한 길일 수밖에 없는 거야. ‘쟌 타일러’ 행정부 임기말에 다시 택사스를 연방으로 흡수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뜻밖에도 상원에서 부결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 문제가 1844년 15차 대통령 선거에 가장 큰 이슈가 되었었지. 민주당에선 택사스 편입을 반대하는 마틴 대신 엔드류 젝슨의 신봉자 ‘제임스 폴크’를 후보로 내세웠어. 선거결과 민주당의 ‘제임스 폴크’(James K. Polk. 1795-1849)가 퀸지의 오랜 친구 ‘핸리 클레이’를 누르고 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어. 여기에는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제3의 정당인 ‘Liberty Party’가 대통령후보를 내보내면서 위그당 핸리의 표를 잠식했기 때문이라고 봐. 선거 후 쟌은 임기가 끝나기 직전 재차 택사스 주 편입안을 의회에 상정했는데 퀸지는 택사스를 주로 편입하면 노예를 인정하게 되고 맥시코와의 전쟁에 돌입할 수도 있게 된다고 극구 반대했지. 퀸지와 위그당 의원 전원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택사스의 미국편입 조약이 양원을 통과해 결국 미연방에 노예승인 주로 1845년에 편입되었어.
[진희] 그럼 퀸지는 하원의원이 된 이래 5명의 대통령과 씨름을 하는 셈이네요?
[해월] 2년마다 선출하는 하원의원직을 17년이나 유지했으니 질기게 당선도 되었지만 여러 명의 대통령을 만날 수밖에 없었겠지. 제임스 폴크를 하원에서 동료의원으로 같이 일을 했을 때부터 무척이나 싫어했어. 퀸지는 제임스를 또 하나의 노예신봉 남부 민주당원으로 치부했지. 퀸지가 바란 것 중 하나는 북부의 ‘오래곤 컨트리’(Oregon Country) 전체를 미국령으로 합병하고자 했는데 제임스는 서부의 켈리포니아에 관심이 있어 오래곤 컨트리는 그곳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영국과 북위 49도 지점에서 양분하는 협정을 체결해 버렸어. 그러니 퀸지가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지.
[진희] 서부개척 시대에 대통령과 의회지도자 간의 반목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을텐데요.
[해월] 당연하지. 제임스는 서부의 커다란 지역인 켈리포니아를 맥시코로부터 사들이려 했는데 안 그래도 택사스를 빼앗긴 맥시코가 이를 승낙할 이유가 없었겠지. 매입협상이 틀어지자 제임스는 전쟁의 꼬투리를 잡기 시작했어. 남부에 있는 ‘리오 그란대’(Rio Grande) 강을 택사스를 합병한 미국과 맥시코 사이의 국경선이라 선포하면서 맥시코가 국경을 넘어 미국을 침공하도록 유도하여 이를 이유로 전쟁을 선포할 것을 의회에 요청하고 나섰지. 자세한 것은 ‘11대 제임스 포크’ 편에 가서 살펴보겠지만 1846년 초 하원에서 전쟁선포 안이 174대 14표로 가결되었을 때 부결표를 던진 사람 중에 하나가 퀸지였지. 끝내 전쟁에 돌입하게 된거야. 더 자세한 것은 '11대 제임스 폴크' 편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진희] 싸움의 사나이 퀸지가 하원의원으로 마지막 미국에 남긴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선생님?
[해월] 마지막이라기보다 크게 관심을 가질만한 일이 두 가지 있지. 하나는 노예폐지 문제인데 이 문제는 미국을 둘로 나누는 심각한 문제였잖아. 퀸지는 항상 “노예와 전쟁은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청산해야 할 과제”라고 했지. “흑인(negro)을 개(dog)처럼 취급할 수는 없다”며 인간윤리의 원칙을 해하는 노예제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어. 1836년에 이르러 수도 지역에서 계속하여 노예제도 철폐를 주장하는 시민들의 청원이 올라오자 이를 막기 위해 남부지역 출신 민주당 및 위그당 의원들이 연방하원에서 아예 청원이 들어오면 폐기하거나 토론을 지연시키는 규칙(gag rule)까지 만들어 방해했어. 퀸지를 포함한 북부출신 위그당 의원들은 적극 항의를 했지. 민의를 대변하는 의회에서 청원할 권리를 무시하거나 입법 토론을 막는 조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니까.
[진희] 의회에선 특정 안건 토론을 방해하는 규칙을 만들 수도 있군요! 역시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곳이네요.
[해월] 정당한 논리를 벗어난 행위는 언젠가 심판을 받게 되겠지. 1841년에는 대법원에서 흑인노예 선원들을 상대로 한 소송 사건인 ‘United States v. Amistad’ 재판이 열린 적이 있어. 스페인 선박인 ‘Amistad’호에 승선한 흑인노예 선원들이 대우에 항의해 폭동을 일으키며 선박을 장악한 사건이었지. 폭동을 진압하고 흑인노예들을 체포한 상태에서 열린 2월 24일의 공판에 주위 노예해방논자들의 요구로 노예대변인으로 참석해서 장장 4시간 동안 노예들의 권리에 대해 열변을 토한 결과 소송을 승리로 이끌고 흑인노예들을 석방하여 그들 나라로 보내주었어. 퀸지는 이같이 노예문제에 맞서 끝까지 싸워 마침내 1844년에는 의회의 통제규칙인 gag rule을 8년 만에 폐지시키는 쾌거를 달성하기도 했어.
[진희] 역시 불굴의 사나이 면모를 잃지 않았군요.
[해월] 또 하나는 ‘스미소니언 연구소/재단’(Smithsonian Institution)와 관련된 일이야. 알다시피 스미소니언은 워싱턴 디씨(Washington, D.C.)에 있는 여러 박물관으로 유명한데 그 시작은 바로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스미손’ (James Smithson. 1765-1829)의 유언으로부터 시작하지. 1829년 제임스 스미손이 사망하면서 재산모두를 조카에게 남겼는데 조카가 자식 없이 사망하자 그 재산이 미국정부로 넘겨지도록 한 유언에 따라 당시 엔드류 젝슨이 이를 인지하고 의회에 통보했지. 의회에서 스미손의 기부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1835년 당시 미국으로 건너온 자금이 약 50만 달러(현 가치 약 2,000만 달러)였어. 퀸지는 국립과학교육기관 건립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스미손의 유언인 “인류의 지식증대와 보급을 위한 기관설립”(Establishment for the increase and diffusion of Knowledge among men) 준비자금으로 미래 ‘스미소니언 연구소’ 설립을 의회차원에서 적극 추진했지. 그런데 정부가 이 자금을 부실한 주정부채권에 투자했다가 부도가 나면서 공중분해되었어. 이에 퀸지가 나서서 1836년 7월 1일 의회가 해외 기부헌금을 국가가 신념으로 약속을 이행하는 법을 채택토록 하는 한편 정부자금으로 원금과 이자를 확보토록 하고, 1846년에 와서 의회가 ‘스미소니언 연구소’를 건립하는 법을 제정하도록 이끌었지.
[진희] 훌륭한 정치인의 신념으로 후대까지 이르는 바른 이념과 혜택을 창출하네요.
[해월] 훌륭한 정치인이라도 나이를 먹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을 당하는지 1846년 78세의 퀸지에게 뇌졸중 (stroke)이 찾아왔어. 퀸지는 비록 쓰려졌지만 몇 개월 동안 요양을 잘해 1847년 2월 13일 거의 완쾌된 모습으로 하원에 출근했고 임석한 의원들이 기립박수로 그를 환영했지. 그러다 1848년 2월 21일 하원에서 맥시코와의 전쟁에서 승전고를 울린 장군들에게 ‘명예장군도’(honorary swords)를 수여하는 안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많은 의원들이 찬성했지만 그 전쟁이 부당한 전쟁으로 전쟁자체를 반대했던 퀸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합니다!”(No!)라고 외쳤지. 외침과 동시에 급성 ‘뇌출혈’(cerebral hemorrhage)이 오면서 다시 쓰러지고 말았어. 2년 전 뇌졸중을 다행히 회복한 후 계속 의원일을 지속했었는데 다시 쓰러진 거야. 의회 내 하원의장 사무실에서 가료 중이던 그는 이틀 후인 2월 23일 오후 7시 20분 부인과 '에이브러헴 링컨'(Abraham Lincoln) 등 여러 하원의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80세를 일기로 운명하고 말았지. 그의 유해는 임시로 '의회묘지'(Congressional Cemetery)에 뭏혔다가 후에 메사추새츠 주 퀸지시에 있는 가족묘로 이장되었었는데 막내아들 챨스가 어머니 루이사 마저 1852년에 사망하자 ‘United First Parish Church’에 있는 조부모를 모신 묘지 옆으로 가족묘를 넓혀 새롭게 안치했어.
[진희] 2대 대통령을 지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들이 6대 대통령을 역임한 첫 부자 대통령의 역사에 기왕이면 손자까지 대통령을 이었다면 더욱더 역사에 남을 가문이 되었을 텐데요.
[해월] 더 바랄 수 없는 가문의 영광이겠지만 그 이상은 허락이 되지 않았던 것 같아. 앞에서도 잠시 살펴봤지만 퀸지 부부에겐 3남 1녀라는 자식이 있었지. 우선 막내였던 딸 ‘루이사’(Louisa)는 1811년에 태어났으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그 이듬해 사망했어. 첫아들 죠지(1801-1829)는 알코올중독에 시달리다 28살이던 1829년에 타고 가던 여객선박에서 추락사했고, 둘째 아들 ‘쟌 2세’(John Adams II. 1803-1834)는 아버지 퀸지가 소유하던 제분소를 운영하면서 사업가로 성장하고 있었는데 역시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일찍 사망하고 말았어. 막내아들인 ‘찰스 에담스 시니어’(Charles Francis Adams Sr. 1807-1886)만 성인이 되도록 살아남았는데, 한동안 북부출신 위그당 지도자로 노예제도 반대에 앞장섰었지. 1842년에는 메사추새츠 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848년 12번째 대통령 선거에는 Free Soil Party의 창당맴버가 되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마틴의 러닝메이트 부통령으로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시기도 했지.
[진희] 아! 1848년 선거에 승리했더라면 세 번의 대통령을 배출한 가문이 될 수도 있었겠네요.
[해월] 에담스 가문에서는 그때가 마지막 기회였을 거야. 1854년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긴 찰스는 1858년에 연방하원으로 선출되었고 1860년에 재선에 성공했어. 1860년 선거에서 에이브러헴 링컨이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찰스는 에이브에 의해 남북전쟁 당시 영국대사로 임명되어 1861년 5월 16일부터 1868년 5월 13일까지 7년간 근무하면서 영국이 남부연합(Confederacy)을 인정하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담당했지. 1876년에는 민주당 소속으로 메사추새츠 주 주지사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어. 찰스는 1844년 조카와 함께 미국을 여행하면서 일리노이 주 ‘노부’(Nauvoo) 시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몰몬교’(the Church of Jesus Christ and the Latter Day Saints) 창시자인 ‘조샙 스미스’(Joseph Smith. 1805-1844)를 만나 그에게서 그의 첫 부인 ‘애마 스미스’(Emma Hale Smith. 1804-1879)가 소유했던 ‘몰몬교 성서’(Book of Mormon)를 받았다고 해. 성서는 현재 ‘Adams National Historical Park’에 소장되어 있는데 당시 찰스는 그에 대한 인상을 적은 일기장에 조셉을 ‘야바위 창시자’(mountebank apostle)라고 표현해 별로 좋은 인상을 갖지 못했던 것 같아.
6대 대통령 쟌 퀸지 에담스의 공식 서명입니다. 그는 매사를 확실히 하려 했고, 아버지 성품을 닮아 쉽게 뜻을 꺾지 않으려고 애썼던 사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