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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한담] 미국의 대통령들 Ep19

8대 마틴 벤 뷰런 - 미국정치의 투출한 책사 1782 - 1862

by 김동준 David Kim

제8대 ‘마틴 벤 뷰런’(Martin Van Buren)은 그의 후임자들인 ‘헤리슨’(Harrison), ‘타일러’(Tyler), ‘폴크’ (Polk) 그리고 ‘테일러’(Taylor) 등 4명의 대통령들보다 오래 살았고, 자신이 퇴임한 후 16대 ‘에이브러헴 링컨’(Abraham Lincoln)에 이르기까지 여덟 명이나 뒤에 대통령으로 등극하는 모습을 지켜본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는 ‘민주당’ (Democratic Party)을 조직한 정치조각가였으며, “정당제도야 말로 국가의 모든 행위를 민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고 현명한 길”이라고 주장하던 미국정치의 策士였습니다. 뉴욕 주 법무장관과 상원의원, 연방 상원의원, 뉴욕 주 주지사, 연방 국무장관, 영국 대사, 그리고 부통령을 지낸 전형적 행정가이기도 합니다.

영어를 제2국어로 사용한 유일한 대통령으로 ‘내더렌즈’(the Netherlands)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애국자였습니다. 1837년 극심한 경제불황이 미국을 뒤덮었을 때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는 어렵게 경제문제를 풀어나가는 정책을 전개하였으나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해 연임에 실패했지만 반면 정부지출을 줄이고 균형예산을 고수하였고, 케나다와 맥시코와의 전쟁위기를 모면한 업적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1840년 14번째 대통령이 된 ‘후렝클린 피어스’(Franklin Pierce)가 그의 선거유세 중 자신의 이미지 선전용으로 “Martin Van Buren is OK”라는 문구를 사용했는데, ‘good’이라는 뜻의 속어인 ‘Oll Korrect’를 줄여서 사용한 ‘OK’가 전 세계 통용어가 되는데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영국이 아닌 최초의 타 유럽국가 출신 대통령이었던 ‘마틴 벤 뷰런’(이하 마틴)에 대해 같이 알아보겠습니다.


백악관 공식 초상.jpg White House Official Portrate





[鳴宰] 마틴의 선조들은 그럼 내더렌즈에서 이민 온 것인가요, 선생님?

[海月] 정확한 말이야, 명재야. ‘벤 뷰런’(van Buren)이라는 姓의 뜻은 ‘내더렌즈’(the Netherlands)어로 ‘뷰런으로부터’(from Buren)라는 의미로 ‘뷰런으로부터 온 사람’이란 말이야. ‘뷰런’이란 말도 마을 또는 도시라는 뜻으로 내더렌즈의 ‘갤더렌드’(Gelderland) 주에 있는 뷰런 ‘카운티’(County)를 뜻하지.


[명재] 마틴의 선조들은 어떤 분이셨어요?

[해월] 마틴의 미국 내 벤 뷰런 가문의 선조는 ‘커낼리스 마센 벤 뷰멀샌’(Cornelis Maessen Van Buijrmalsen. 1612-1648)으로 알려져 있어. 1612년 갤더렌드 주 ‘뷰멀샌’(Buurmalsen)이란 마을에서 태어나 살고 있었는데 1631년에 뉴욕 주(당시는 New Netherland)의 ‘랜설라스윅’(Rensselaerswyck)이라는 마을에 있는 장원(patroom) 형 농장의 내더렌즈 출신 농장주와 연결되어 농부로 3년 계약을 맺고 배에 올라 미국으로 왔지. 당시 뉴욕지역에는 1602년에 내더렌즈 정부가 아시아와의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설립한 ‘더치 東인도회사’ (Dutch East India Company)가 ‘뉴 내더렌드’(New Netherland)라는 식민지를 세우고 많은 내더렌즈 사람들이 이주해 왔어. 현재의 뉴욕 시를 그들은 ‘뉴 암스탤담’(New Amsterdam)이라고 불렀지. 나중에 영국사람들이 들어서면서 다시 영국도시의 이름을 따 ‘뉴 욕’(New York)이라고 개칭해서 불렀지. 계약기간 3년이 막 지난 1634년 8월 2일 마틴의 현조부(5대 조부) 커낼리스는 다시 내더렌즈로 돌아갔는데, 고향에 돌아간 그는 1635년 ‘카태린 마튼스’(Catelyntje Martens. 1615-1648)를 부인으로 맞은 후 1636년 8월 15일 다시 농부계약을 맺고 1637년 부인과 같이 두 번째로 뉴욕행 배에 올랐지. 항해도중인 1637년 1월 30일에 큰 아들 ‘핸드릭’ (Hendrick. 1637-1703)이 태어났고, 1637년 4월 17일 뉴 내더렌드에 도착했어.


Flag_of_the_Dutch_East_India_Company.svg.png Flag of the Dutch East India Company


[명재] 예전에는 내더렌즈 상인들이 영국이나 스페인보다 더 활약이 많았다던데 일찍 미국에 진출했군요?

[해월] 17세기 유럽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팽창하는 시대였는데 세계교역 특히 아시아 에서의 교역이 상당히 수익성이 좋은 편이었어. 그래서 내더렌즈에서는 아시아와 교역을 맡을 ‘더치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1609년 영국인 선장 ‘핸리 헛슨’(Henry Hudson)으로 하여금 아시아를 향하는 루트를 개발토록 했지. 동쪽으로 가다 북극의 얼음을 만나 항해에 실패한 그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오다 만난 곳이 현재 ‘메사추새츠’ 주 앞바다에 있는 ‘케이프 캇’(Cape Cod)이었어. 그곳에서 태평양으로 진입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와 ‘댈라웨어 베이’(Delaware Bay)에 들어온 후 북상하여 뉴욕으로 올라갔지. 결국 뉴욕 주 북부 ‘트로이’(Troy)라는 곳에서 항해를 끝내고 말았어. 완전히 길을 잘못 든 것이지. 어쨌든 그가 항해한 그 뉴욕의 강이 나중에 그의 이름을 딴 ‘헛슨 강’(Hudson River)이라는 유명한 강이 되었어.


Henry Hudson and Hudson River .png Henry Hudson의 400년 전 이동 경로와 Hudson River



[명재] 뉴욕의 헛슨 강이 그곳을 항해한 유럽 선장의 이름을 딴 것이었군요?

[해월] 미국의 대부분 도시나 도로명등이 누군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잖아? 핸리가 내더렌즈로 돌아가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 1611년인데, 그 후 1614년까지 다른 사람들도 그곳을 다녀가 보고 지도를 만들면서 강의 이름과 함께 그 지역을 ‘뉴 내더렌드’(New Netherland)로 명칭을 붙였던 거야.


[명재] 그곳에 자리 잡은 현조부께서는 어떤 삶을 살으셨나요?

[해월] 뉴욕 주 수도인 ‘알바니’(Albany) 인근에 위치한 ‘랜설라스윅’(Rensselaerswyck) 장원에서 8년간 농부일을 한 마틴의 5대 조부 커낼리스는 그곳에서 네 자녀를 더 낳았어. 핸드릭 아래로 ‘마태즈’(Martes. 1638-1703. 마틴의 증조부), ‘마애스’ (Maes. 1643-1704), ‘스티진재’(Stijintje. 1644-1729 딸), 그리고 막내가 ‘토비아스’(Tobias. 1647-1662)였지. 농장일로 돈을 모아 1646년 10월 24일에는 뉴욕 멘헤튼 섬(Manhattan Island)에 조그마한 농장과 주택을 구입하기도 했어. 그러나 1648년 헛슨 강에 대홍수가 나면서 현조부 부부가 살던 곳에서 동시에 사망하고 말았지. 졸지에 고아가 된 아이들은 부모를 돕던 일꾼들이 후견인이 되어 보살폈는데 1660년대 들어 영국이 지역을 관리할 때 네 아이들은 성을 ‘벤 뷰런’(Van Buren)으로 바꾸었고, 셋째 아들은 ‘브루맨달’ (Bloomendaal. 영어로는 Bloomingdale)로 바꿔서 내더렌즈식 뉴욕이름 ‘브루밍데일’의 선조가 되었지.


[명재] 마틴의 성이 ‘벤 뷰멀샌’에서 ‘벤 뷰런’이 된 것은 어쩌면 영국의 정복에 따른 피해일 수도 있겠네요.

[해월] 지명도 ‘뉴 내더렌드’에서 ‘뉴 욕’으로 바뀌고 ‘뉴 암스탤담’이 ‘뉴 욕’ 시로 모두 바뀐것은 영국이 내더렌즈가 식민지로 삼았던 지역을 무력으로 정복한 이후의 조치였으니까 그들이 이름까지 개명한 것은 명재 말처럼 민족성을 희석시키는 정책의 피해일 수도 있겠지. 아버지가 살았던 고향의 이름 ‘buurmalsen’은 영국식으로는 ‘뷰런 멀샌’(Bueren Malssen)인데 아마 아이들이 부르기 쉽게 ‘Van Buren’으로 정한 것 같아.


[명재] 고조부님은 어떤 분이세요?

[해월] 4대 조부로 알려진 ‘마태즈 커낼리즈 벤 뷰런’(Martes Cornelisz Van Buren)은 1640년경 ‘랜설라스윅’에서 태어나 ‘마래예 쿼캔보쉬’(Marretje Quackenbosch)와 결혼해 ‘마리아’(Maria), ‘커낼리스’ (Cornelis), ‘커낼리아’ (Cornelia), ‘피터’(Pieter. 마틴의 증조부) 그리고 ‘마탠’(Marten) 등을 낳았고, 두 번째 부인 ‘타나예 에담스’ (Tannatje Adams)와 사이엔 자식이 없었어. 그는 1703년 11월 13일 뉴욕 주 알바니 카운티(후에 컬럼비아 카운티로 바뀜) ‘킨더훅’ (Kinderhook)이란 마을에서 6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는 기록만 남아있어.


[명재] 옛 분들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기록이 없는 거예요?

[해월] 불행히도 그런 것 같아. 카운티정부의 결혼기록이나 유언기록을 통해 봐도 알려지는 것이 없어. 안타까운 일이야. 증조부 피터는 알바니 카운티 내 ‘훠트 오렌지’(Ft. Orange)라는 곳에서 1670년경 태어나 1693년 1월 15일 알바니에서 ‘아리안예 바랜츠’(Ariaantje Barents)와 결혼하여 ‘커낼리스’(Cornelis), ‘바랜트’(Barent), ‘마리예’ (Marritje), ‘토비아스’(Tobias), ‘이예’(Eytje), ‘마탠’(Marten. 마틴의 조부), ‘커낼리아’(Cornelia), ‘이프라임’(Ephraim), 그리고 ‘마리아’(Maria) 등 5남 4녀를 두었지. 증조부는 1755년 11월 24일 킨더훅에서 85세를 일기로 사망했어.


[명재] 증조부께서 자손은 많이 두셨네요. 조부는 어떤 분이세요?

[해월] 마틴의 조부 ‘마탠 벤 뷰런’(Marten Pieterse Van Buren)은 1701년 12월 28일경 알바니 카운티에서 태어나 1729년 11월 7일 ‘디르예 벤 알스틴’(Dirkje Van Alstyne)과 결혼하여 ‘에이브러헴’ (Abraham. 마틴의 부친), ‘아리안예’(Ariaantje), 그리고 ‘메리 엔’(Mary Ann)등의 자녀를 두었지. 그는 1762년경 킨더훅에서 사망했어. 조부에 대해서도 별 기록을 찾을 수 없네.


[명재] 마틴의 아버님은 그래도 18세기 분이시니 어느 정도 알려진 것이 있지 않을까요?

[해월] 앞선 대통령들에 비해 출신 나라가 달라선지 선조들에 대한 기록이 매우 빈약해. 그나마 아버지 ‘에이브러헴’에 대해서는 기록이 조금은 전해져 다행이야. 1737년 2월 27일 ‘알바니 더치 개혁교회’ (Reformed Dutch Church of Albany)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기록된 그는 킨더훅에서 농부일을 하면서 조그마한 여관과 술집을 운영했다고 해. 수년간 킨더훅 마을 서기로 일도 한 그는 알바니 카운티 민병대 제7연대에서 대위로 근무하기도 했지. 1776년경 ‘요하내스 벤 알랜’(Johannes Van Alen)의 미망인 ‘마리아 고즈’(Maria Goes. 1747-1818)와 결혼하여 ‘디르예’(Dirkje), ‘헤나’(Hannah), ‘마틴’(Martin. 8대 대통령), ‘로랜스’(Lawrence) 그리고 ‘에이브러헴’(Abraham)등 다섯 자녀를 낳았어. 미국의 독립전쟁 시 뉴욕 주 제4연대에서 전투에 참여한 부친 에이브러헴은 1817년 4월 8일 80세를 일기로 킨더훅에서 사망했어.


[명재] 마틴의 아버지께서 마을일도 보고 민병대와 미육군에 복무하면서 애국자 대열에 있었네요.

[해월]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대열에 속하지 않은 세대였지만 애국적 측면에서는 그에 못지않은 모습을 보인거지. 마틴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여관과 술집에 들락거리면서 많은 사람들을 접촉하고 다양하게 관계를 갖게 되어 후에 정치적 조직에 활용하게 되었어. 동네에 있는 학교와 인근 ‘크레버렉’(Claverack)에 있는 ‘워싱턴 세미네리’(Washington Seminary)를 다니면서 라틴어 등을 공부하다가 14살 때인 1796년에 변호사 ‘피터 실배스터’(Peter Silvester)와 그의 아들 ‘후렌시스’(Francis)가 운영하는 법률회사에 수습생으로 들어갔어. 그곳에서 법률공부를 하는 동안 의복과 말투, 몸가짐, 행동 등도 유심히 관찰하고 따라 하면서 변호사와 정치인으로서의 모습을 익혀가기 시작했지. 아버지가 가입한 ‘민주-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을 지지하던 마틴은 정당선택에 있어 피터와 견해차가 생겨 민주-공화당과 관련이 있는 뉴욕 시의 ‘윌리엄 벤 내스’(William P. Van Ness)에게로 가 수습을 계속했어. 그곳에서 윌리엄의 소개로 토마스 재퍼슨 행정부의 부통령을 지낸 ‘에런 버’(Aaron Burr)를 만나게 되었고, 뉴욕주 정치행태의 흐름과 파벌 간의 싸움을 볼 수 있었지.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획득한 1803년에 고향인 킨더훅으로 돌아왔어.


[명재] 마틴이 21살에 민주-공화당 거두 에런 버를 만나고 변호사 자격까지 획득했으니 일찍부터 정계진출 준비를 했다고 보이네요.

[해월] 그렇지? 고향으로 돌아온 마틴은 이복형 ‘제임스 벤 알랜’(James Van Alen)과 같이 법률회사를 차리고 변호사일을 하면서 1807년 2월 21일에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친척 동생 ‘헤나 호즈’(Hannah Hoes. 1783.3.8 – 1819.2.5)와 결혼했어. 마틴과 같이 집에서는 더치(내더렌즈)어를 사용한 그녀는 영어에 ‘더치’(Dutch) 억양이 심했다고 해. 이들 두 사람은 여섯 아이를 두었는데 그들 중 넷만 성인이 되었지. ‘에이브러헴’(Abraham. 1807-1873), ‘쟌’(John. 1810-1866), ‘마틴 주니어’(Martin Jr. 1812-1855), 그리고 ‘스미스 탐슨’(Smith Thompson. 1817-1876) 등이야. 불행히도 부인 헤나는 결핵병에 걸쳐 얼마 살지 못하고 킨더훅에서 35세에 사망하고 말았어. 마틴은 그 후 재혼하지 않고 싱글로 살아갔지. 누가 아이들을 키웠는지 기록이 없어 궁금해.


Hannah_van_buren.jpg Hannah Hoes Van Buren


[명재] 독신으로 1862년까지 4자녀를 키우면서 43년을 혼자 살았다니 고생을 많이 했을 텐데 그동안 정부일과 대통령일까지 해 냈다고 생각하니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이 드네요.

[해월] 그 대단한 삶을 살은 마틴이 살아간 과정을 살펴보는 게 오늘의 일이지. 마틴이 정치에 관심을 둔 것은 18세 때부터야. 1801년에 민주-공화당 전당대회에 참가해 그를 지원해 주었던 ‘쟌 피터 벤 내스’(John Peter Van Ness)를 위하여 쟌의 뉴욕주 제6지구 보궐선거 지명운동을 했고, 킨더훅에 돌아온 이후로는 ‘에런 버’( Aaron Burr) 파와 결별하고, 대신 뉴욕 주 주지사를 지냈던 ‘드윗 크린턴’(DeWitt Clinton)과 ‘데니얼 탐킨스’ (Daniel D. Tompkins) 계열에 합류해 뉴욕 주 컬럼비아 카운티 대리법원 판사에 임명되기도 했어. 1808년엔 정치적 발판을 넓히기 위해 컬럼비아 카운티 내에 속하는 ‘헛슨’(Hudson)으로 가족과 함께 이사를 했지.


[명재] 변호사가 되면 그렇게 할 일이 많이 생기나 봐요. 정치욕심도 생기고 일할 기회도 생기나 보죠?

[해월] 우선 변호사 자격을 가지면 지적이나 사회적으로 지도자 입장에 서게 되니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거지. 마틴은 영국과 ‘1812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벌어진 뉴욕 주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뉴욕 주 상원의원이 되었고,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메디슨행정부를 적극 지지하면서 뉴욕 주 민병대 재조직 활동에 발 벗고 나서기도 했지. 그의 노력이 인정받아 1815년에 뉴욕 주 법무장관에 선출되어 ‘헛슨’을 떠나 주 수도인 ‘알바니’(Albany)로 다시 이사했어. 그곳에서 뉴욕 주 변호사 ‘밴자민 버틀러’(Benjamin Butler)와 함께 파트너가 되어 법률회사를 설립했지. 1816년에는 뉴욕 주 상원의원에 재선 되어 상원의원과 법무장관이라는 두 가지 직책을 동시에 수행했어.


[명재] 뉴욕 주에서는 그 보다 유명한 사람은 없었겠어요. 상원의원에다 법무장관을 겸직했으니 주지사보다 더 인기가 있지 않았겠어요?

[해월] 게다가 당시 뉴욕 주 이슈였던 ‘이어리 호수’(Lake Erie)와 뉴욕의 ‘헛슨 강’(Hudson River)을 통해 대서양으로 나가는 ‘이어리 운하’(Erie Canal) 건설이 뉴욕 주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그가 정적이 된 ‘드윗 크린턴’ 주지사가 지지하던 운하건설에 동참하면서 오히려 ‘반크린턴’ 파(‘사슴꼬리’(Bucktails)라는 별명을 가진 정파)로부터 대단한 지지를 얻어 그들의 리더가 되었지. 마틴은 그들과 강력한 정치조직인 ‘알바니 평의회’(Albany Regency)를 조직하여 뉴욕 주 민주-공화당의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세력으로 발전했어. 1820년 대선에선 뉴욕 주 민주-공화당 대표가 되더니 1821년에는 뉴욕 주에서 모든 백인에게 선거권을 주자는 법개정에 앞장섰지.


[명재] 마틴이 1821년 즈음에는 뉴욕 주 최강 정치인으로 발돋움한 것 같은 모습이네요.

[해월] 뉴욕 주에서 유망한 정당의 대표가 된 마틴은 드디어 전국적 인물로 도약하기 시작했어. 1821년 뉴욕 주에서 그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했거든. 훌륭한 웅변가는 아니지만 상원에서 수시로 법안설명등을 하면서 지명도가 높아지고, 당시 재무장관인 ‘윌리엄 크로훠드’(William H. Crawford)와 가까이 지냈는데, 그가 1824년 대선에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적극적으로 지원했지. 윌리엄을 위시해 ‘쟌 퀸지 에담스’(John Quincy Adams), ‘엔드류 젝슨’(Andrew Jackson), 그리고 ‘핸리 클레이’(Henry Clay)가 출마한 대선에서 퀸지가 어렵사리 승리했어. 퀸지가 당선 후 ‘국내보강’(internal improvement)이라는 정책을 펼치자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에 반대하고 나선 마틴은 4년 후를 기약한 엔드류 젝슨을 지지하며 그의 1828년 대선을 준비했지. 이때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법 제정하는 의원으로서 열심히 살아가는 마틴에게 ‘작은 마술사’(Little Magician)라는 별명이 주어지기고 했지.


[명재] 마틴이 연방정부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네요.

[해월] 그런데 그에게도 또 변화가 왔지. 1828년에 뉴욕 주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거야. 자신의 선거운동과 젝슨의 대통령선거 운동을 동시에 펼쳤는데 모두 당선되었지. 젝슨은 퀸지를 누르고 6대 대통령에 쉽게 당선되고, 자신은 제9대 뉴욕 주지사에 당선된 거야. 1829년 1월 1일부터 임기를 시작한 마틴은 곧 젝슨의 내각에 국무장관직을 받아 입각하면서 주지사 업무를 시작한 지 46일 만에 떠났지만 짧은 시간 동안 나중에 ‘은행예금보험’(FDIC)의 전초가 되는 ‘은행안전기금법’(Bank Safety Fund Law)을 주의회에서 통과시키는 성과를 이루었지.


[명재] 주지사에 당선된 사람이 연방정부 국무장관에 입각하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였었나봐요?

[해월] 전에도 봤지만 초기 미국정치 상황에서 차기 대통령으로서의 국무장관의 입지가 부통령보다 더 나았던 것 같아. 젝슨이 요청하기도 했지만 바로 주지사직을 사직한 마틴은 국무장관으로서 프랑스와 보상문제 타결을 보았고, 영국과는 영국의 서부인디스 식민지들과 교역을 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으며, 오토만 제국(Ottoman Empire. 현재의 터키)으로부터는 미국상선들의 북해진입 허가를 받아냈지. 한동안 내각 안에서 분열이 일어나는 사건으로 계획적으로 1831년에 국무장관직을 사임한 마틴은 젝슨의 두터운 신임으로 소위 ‘주방내각’ (Kitchen Cabinet)이라는 비공식 모임에서 중요한 자문역할을 했어.


[명재] 주방내각에서 '주방장'을 했나요?

[해월] 주방장?! 그럴싸하네! 그만큼 젝슨의 신뢰가 컸었지. 그래서 그해 8월에 젝슨은 상원의 휴회가 시작되자 마틴을 영국대사로 발령 냈어. 상원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절차를 피해 서지. 그러나 그다음 해 2월 개회된 상원에서 마틴때문에 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했던 ‘쟌 켈혼’(John Calhoun)의 방해로 대사직 임명이 부결되었어. 켈혼의 '마틴 말살 노력'은 결국 역풍을 맞게 되고 오히려 마틴의 지지도가 높아졌지. 1832년 5월 개최된 민주당 전국 전당대회에서 젝슨의 지지와 ‘알바니 평의회’ 조직의 후원으로 젝슨의 부통령 러닝 메이트로 지명되었고 1832년 벌어진 12번째 대선에서 ‘2차 연방중앙은행’(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 설치 반대를 주장하여 대승리를 가져왔지.


[명재] 국무장관에서 대통령 턱밑인 부통령으로 변신했네요.

[해월] 마틴은 1824년 대선에서 본인이 지지하던 엔드류 젝슨이 패배하자 무너져가는 소속당 민주-공화당의 잔여 젝슨지지자들을 규합하고 전국 각주에 지지세력을 조직하기 시작했지. ‘보통 사람’(common man)을 위하고 개인의 권리와 주정부의 자주권을 주장하면서 중앙은행과 고관세 정책을 반대한다는 기치하에 1828년 1월 민주당(Democratic Party)을 창립했어. 젝슨은 1828년 11번째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출마했고 당당하게 선출되었지. 그렇게 의기투합된 두 사람이었으니 젝슨 임기 8년간 뜻하는 일들을 함께 이루었고 8년을 마친 젝슨은 그가 가장 신뢰하는 동지 마틴을 차기 대통령으로 세우려고 노력했어. 결국 1835년 개최된 민주당 전국당대회에서 마틴은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되었고, 젝슨이 지원한 캔터키 출신 하원의원 ‘리처드 쟌슨’(Richard M. Johnson)을 부통령후보로 하여 1836년 대선체제로 들어갔지.


[명재] 드디어 마틴이 대통령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네요.

[해월] 한편 민주당과 맞대결하는 정당은 젝슨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인 ‘위그당’(Whig Party)으로 결속력이 부족한 상태였고 단일후보를 내지 못하고 태내시 주 ‘휴 와이트’(Hugh Lawson White), ‘메사추새츠 주 ‘데니얼 웹스터’(Daniel Webster) 그리고 인디에나 주 ‘윌리엄 헤리슨’(William Henry Harrison)등 세 후보가 출마했지. 마틴은 국민투표에서 50.8 퍼샌트의 지지와 선거인단 294표 중 170표를 얻어 8대 대통령으로 쉽사리 당선되었어. 부통령 후보 쟌슨은 선거인단 지지표 과반수를 얻지 못해 상원에서 ‘잠정투표’ (contingent vote)를 통해서 당선되었지. <참고로 대선에서 선거인단 과반수 득표를 못할 경우 대통령은 하원에서 부통령은 상원에서 잠정투표를 통해 선출함> 1836년의 13번째 대선을 치르면서 미국의 정치체계는 1792년부터 1824년까지 이어졌던 ‘연방주의당과 ‘민주-공화당’ 체제의 ‘1차 정당체제’ 이후 다시 한번 ‘민주당’과 ‘위그당’ 양당이 형성된 ‘2차 정당체제’(Second Party System)를 확실하게 갖추게 되었지.


ElectoralCollege1836.svg.png 1836년 대통령 선거 결과


[명재] 내더렌즈 이민자의 후손이 미국의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니 기대가 크네요. 영국사람들의 통치만 받아오다가 신선한 바람이 있었을 것 같아요.

[해월] 1837년 3월 4일 8대 대통령에 취임한 마틴이 신선한 정치적 바람을 불러오리라 기대도 하고 바래기도 했을 텐데 결과는 매우 실망스럽기만 하지. 우선 마틴은 재선에 실패한 세 번째 대통령으로 기록되었으니 그가 지내온 1837년부터 1841년까지 4년간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거야. 정치에 실패한 정치인에 대한 국민의 심판은 냉정한 것이거든. 인기라는 것이 참으로 허무한 것이라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신기루야!


[명재] 선생님 말씀은 마틴의 임기 중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일이 없었다는 거네요.

[해월] 어느 행정부나 정책수행이 쉽지 않겠지만 마틴행정부도 한마디로 난제의 연속이었어. 처음 내각을 구성할 때 마틴은 엔드류 내각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여 전임자의 정책을 이어나가고, 민주당이 누렸던 지지도를 올려보려 했으나 다른 당과 여러 지역에서 반발이 터져 나왔고 심지어 민주당 내에서까지 목맨 소리가 나왔지. 엔드류의 내각이 남부 쪽을 포함한 여러 지역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던 관계로 지역안배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남부에서 세력을 넓혀가고 있던 위그당을 견제하기에 좋았지. 논공행상을 해 자파를 집어넣어야 권한을 강화한다는 주위의 얘기도 있었지만 마틴은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했었지. 다만 마틴은 엔드류가 즐겨 쓰던 비공식 모임을 없고 공식 각료모임을 정상화시켜 부서장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면서 각 부서의 업무에 적극 개입하고 중재도 하면서 내각 내 화합을 이끌어가기도 했었어.


[명재]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국정에 임하고 있는데 무슨 문제가 발생했을까요?

[해월] 대통령의 개방 토론 방식으로 장관들에게 참여의식이 생기고 그저 한 부서의 장이 아니라 조직의 기능에 참여한다는 소속감도 생기기 시작했지.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앞서도 말했지만 마틴이 임기를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소위 ‘1837년의 공황’(Panic of 1837)이라는 금융위기가 미국경제를 휘감은 것이야. 엔드류 젝슨의 경제정책을 설명할 때도 봤었지만 그는 1836년에 정부소유 토지매입 대금을 금 또는 은으로 지불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대통령령인 ‘Specie Circular’를 발령했었잖아. 그리고 연방중앙은행 재인가를 거부한 엔드류가 중앙은행에 있던 정부자금을 대신 주정부가 인가를 내준 주 은행들로 옮겨버렸지.


[명재] 대통령령이 어떤 효과를 가져왔나요?

[해월] 원주민으로부터 빼앗은 광범위한 토지를 일반에게 매매하자 수많은 투기꾼들이 달려들어 매입했어. 1834년과 1836년 사이 토지매입이 다섯 배로 늘어났지. 중앙은행이 없어진다고 하니 지방은행들이 힘을 얻어 주별로 화폐를 발행했는데 알다시피 그 화폐들은 가치 등락이 너무 심한 연화(soft currency)들이었어. 투기꾼들이 그 연화로 토지를 매입하자 엔드류행정부에서는 가치 없는 연화보다 금과 은으로 대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한 것이고, 지방 은행에서는 연화로 금 또는 은을 교환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금과 은이 바닥나기 시작했어. 그러면서 연방 통화인 경화(hard currency)도 동이 나기 시작했지. 1837년 5월 10일 뉴욕의 주요 은행들이 바로 이 경화의 보유액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자 시중에 도는 연화를 금 또는 은으로 교환해 주던 것을 중단해 버렸고 곧이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던 거야.


[명재] 통화정책을 주관했던 중앙은행이 없어지면서 재정관리가 무너진 모양새인가요?

[해월] 지방은행이 발행한 지폐의 불신이 은행파산과 불황으로 이어지면서 망가져버린 경제로 인해 민심이 돌아섰지. 경제가 어려워지면 서로 헐뜯는 말들이 돌게 마련인데, 결론을 말하면 향후 5년간 미국경제의 ‘경기침체’(depression)로 이어지고 말았어. 당장 1838년의 중간선거에서 마틴에 대한 심판을 가한 민심은 ‘위그당’에게 표를 몰아주어 하원과 상원 모두 위그당이 장악했지. 결국 이 경제문제로 마틴의 재선에는 빨간불이 들어오고 말았던 거야.


[명재] 언제나 경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승리하게 되어있는 것이 정치인의 숙명인 것 같아요.

[해월] 정치의 목적은 종국에는 '국민의 행복'이기 때문 아니겠어? 자신을 위한 정치를 한다면, 그런 사람도 없겠지만, 결국 얼마가지 않아 국민이 심판하리라 믿어! 마틴의 어려움 중 하나는 원주민의 문제도 있어. 엔드류가 독하게 마음먹고 백인들을 위해 펼쳐놓은 ‘원주민 추방법’(Indian Removal Act of 1830)으로 인해 수많은 원주민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터전을 잃고 물설고 낯선 이주지(지금의 오클라호마 주 일대)로 반강제로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든 법으로 마틴도 원주민과의 사이에 19개의 조약을 맺으면서 그들 땅을 빼앗았지. 원주민들이 응하지 않으면 군을 동원해서 강제로 이주시키기도 했어. 엔드류 임기부터 시작한 원주민 이주정책이 마틴 때에 와서 그 절정을 이루어 근 2만여 명의 원주민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정든 땅을 떠나 험난한 길로 접어드는 ‘눈물의 추방길’(Trail of Tears)이 만들어지고 말았지. 후로리다 주에 거주하다 엔드류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쫓겨나기도 했던 ‘새미뇰’(Seminole) 사람들 중 남은 사람들은 목숨을 다해 버티다가 1837년에 벌어진 ‘2차 새미뇰 전쟁’(second Seminole war)에서 정부군의 대규모 공격에도 불구하고 죽을힘을 다해 끝까지 버텨 1842년 초에 와서는 웬일인지 미국정부에서 추방을 포기해 후로리다에 그냥 남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기도 했지.


1842 seminole reservation.png 2차 새미뇰 전쟁 후 형성된 잠정 새미뇰 보호구역


[명재] 원주민과의 거주지 책정문제가 마틴에게도 어려움을 주었군요.

[해월] 대외적으로도 조용하지가 못했어. 맥시코 영토인 택사스 지역에 이주하여 살고 있던 미국사람들이 맥시코 정부에 항거하다가 1836년에는 아예 ‘택사스 공화국’(Republic of Texas)이라는 독립 국가를 건립하고 미국정부에는 은밀히 미국의 영토로 복속시켜 주기를 바랐지. 마틴행정부는 택사스가 노예제도를 허용하면서 남부와 북부 간의 국내문제로 시끄러워지고, 택사스를 미국영토로 영입할 경우 택사스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맥시코와의 전쟁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난처한 입장에 되었지.


[명재] 택사스도 중서부와 같이 맥시코가 미국에 팔았으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요.

[해월] 중서부는 연고가 없던 프랑스가 쥐고 있었으니까 쉽게 팔 수 있었지만 택사스 지역이 국토의 일부였던 맥시코에게는 다른 문제지. 한편 북쪽의 케나다 접경에서도 지속해서 문제가 발생했어. 1837년과 1838년에 퀘벡(Quebec)과 온타리오(Ontario) 지역 거주민들이 영국정부에 항의하는 폭동을 일으켜 ‘케나다 공화국’ (Republic of Canada)를 건설하고 영국군과 전투를 벌 열는데 그 와중에 미국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지. 그리고 버몬트 지역에 사는 미국인들이 ‘사냥꾼의 쉼터’(Hunter’s Lodge)라는 비밀무장조직을 만들어 케나다 온타리오 지역을 습격하는 사건도 발생했어. 더욱 심각한 것은 미국의 최북단 메인주와 케나다의 ‘뉴 브런스윅’(New Brunswick) 사이의 국경문제가 재발한 것이지. 그 지역의 양국 벌목공들 간에 국경에 있는 ‘아루스툭 강’(Aroostook River) 미국 측 땅에서 싸움이 발생했고 양국의 전쟁으로 번질 위기에 처했었어.영국군도 국경으로 집결하고 미국 의회에서는 5만 군동원과 1천만 달러 전투예산까지 책정하기에 이르렀지. 이에 마틴은 어떻게 해서라도 전쟁은 막아야 한다는 정책하에 ‘중립주의’를 지키기로 하고 ‘윈휠드 스캇’ (Winfield Scott) 장군을 보내 국경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중재토록 했는데, 다행히 전쟁 없이 문제들이 풀려나갔어.


[명재] 영국과의 독립전쟁이 가져온 후유증이 상당히 오래가네요. 영국이 바로 위 케나다 지역을 통치하고 있으니 국경문제는 언제라도 시빗거리가 될 수 있겠어요.

[해월] 국경문제는 스캇장군의 외교적 노력으로 소강상태가 되었다가 1842년에 조약을 맺으면서 확정되어 이제까지 지켜지고 있어. 마틴행정부가 겪어야 할 문제 중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노예제도와 관련된 문제야.

마틴 재직 중인 1839년에 8월경 뉴욕 주 ‘롱 아일렌드’(Long Island)의 ‘몽톡’(Montauk) 포인트 앞바다에서 현 해안경비대(Coast Guard)의 전신 부서(United States Revenue Cutter Service) 소속인 ‘세관선’ ‘워싱턴’ 호가 스페인 국적의 상선 ‘La Amistad’호를 나포하면서 발행한 사건이야. 나포된 배는 ‘커내리컷’ (Connecticut) 주 ‘뉴 런던’(New London)으로 인양되고 당시 배에 있던 흑인 선원들은 육지로 도망쳤지만 육상에서 주민들에 의해 잡혀 인근 ‘뉴 헤이븐’(New Haven)에 감금되었는데 살아남은 43명 모두 영어가 어려워 처음에는 이들에게 살인 및 해적죄를 적용했었지. 나중에 그들의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알아본 결과 그들은 아프리카의 현 ‘시애라 래온’ (Sierra Leone)에서 백인들에 의해 붙잡혀 노예로 팔려 온 ‘맨디’(Mende) 족 사람들이었고, 쿠바(Cuba)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는 스페인 농장주인이 53명을 '허베나'(Havana)에서 구입해 'La Amistad'호에 실어 쿠바 중부에 있는 농장으로 이송 중이었던 거야.


[명재] 아프리카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붙잡아 노예로 파는 상행위가 그때도 벌어지고 있었나 보죠?

[해월] 19세기에도 지속되었던 것 같아. 이동 중에 주방요리사가 그들에게 ‘너희들 곧 잡아서 요리해 먹을 거야'하고 농담을 던졌는데 두려움을 느낀 이들이 쇠고랑을 풀고 폭동을 일으켰어. 선장과 요리사를 죽이고 배를 탈취해 아프리카로 돌아가려 했는데 길을 잘못 들어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뉴욕 쪽으로 향했던 거지. 이 사건에 대한 소송은 두 가지가 진행되었는데, 하나는 세관선 관리가 인양한 선박과 물품에 대한 소유권을 요구한 것이고 또 하나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노예로 매입한 스페인 농장주인에 대한 불법노예소유 처벌건이었어.


Amistad_revolt 1839.jpg La Amistad호 선장 Ferrer의 사망소식을 알리는 기사


[명재] 나포선박에 대한 소유권 요구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노예문제는 심각하지 않나요?

[해월] 1808년부터 미국과 영국은 ‘국제노예거래’를 금지한 바 있어. 선박과 노예들에 대한 소유권과 관할권 문제로 국제적 관심을 끈 이 사건은 마틴행정부가 선박과 노예들을 스페인에 돌려줘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반면 노예해방주의자 변호인들은 그들이 불법적으로 노예가 되었으니 석방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맞섰지. 여기에는 6대 대통령이었던 ‘쟌 퀸지 에담스’까지 가담해 열띤 변호를 했어. 연방순회법원은 흑인노예들의 손을 들어주었고, 마틴행정부는 대법원에 항소하기에 이르렀는데 1841년 3월 대법원은 “이들 흑인들이 불법으로 노예가 되어 이송되었고 정당방위권을 발동하여 폭동을 일으켰으므로 자유를 명한다”라고 판결 내렸지. 마틴행정부는 소송에서 패했고, 흑인들은 ‘United Missionary Society’의 도움으로 1842년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이 사건은 미국 내 노예문제에 또 하나의 선례를 남기게 되었어. 선박의 소유권은 미국정부로 넘어갔고, ‘로드 아일렌드’ (Rhode Island) 주 ‘뉴폿’(Newport)에 사는 ‘죠지 호훠드’(George Hawford)라는 선장이 1840년 10월 정부 경매에서 매입해 ‘Ion’이라 개명한 후 양파, 사과, 닭 그리고 치즈 같은 '뉴 잉글렌드' 지역 상품을 싣고 ‘버뮤다’ (Bermuda)와 ‘세인트 토마스’(Saint Thomas) 등지로 팔러 다니다 1844년에 카리브해 프랑스령 ‘Guadeloupe’에서 한 프랑스인에게 팔았다고 해.


[명재] 마틴이 '노예주의자'였나요?

[해월] 노예주의자라기보다 노예해방주의가 국가의 단결을 크게 위협한다고 보고 남부 노예주들에 대한 간섭을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노력했다고 봐. 마틴을 정치적으로 어렵게 만든 사건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알겠지만 부인이 일찍 사망한 관계로 백악관에서 벌어지는 각종 모임과 파티를 이끌어나갈 안주인이 없다는 사실이었어. 그래서 마틴이 직접 안주인 노릇까지 하다가 1838년 큰 아들 ‘에이브러헴’이 ‘안잴리카 싱글턴’ (Angelica Singleton)을 부인으로 맞아들이자 며느리를 안주인(hostess) 대행으로 고용했지. 안잴리카가 제임스 메디슨 전임 대통령의 미망인 ‘달리 메디슨’(Dolley Madison)의 조언을 받아 1839년 백악관 연말파티를 훌륭히 치르자 지역 언론들의 칭찬이 자자했는데, 문제는 그녀가 유럽왕실의 규범을 익히면서 유럽풍 화려한 파티를 열어 안 그래도 국가경제가 형편없는 상황인데 국고를 축내고 있다는 반대파들의 성토가 극에 달하기 시작했지. ‘대통령의 왕족생활’이라며 비난하는 소리가 높아지면서 재선실패의 한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어.


[명재] 잘해보려고 했지만 도와주려는 사람보다 깎아내리려는 사람만 주위에 있었나 보네요!

[해월] 정적들의 냉혈적 처신은 늘 ‘이어령 비어령’에다 '내로남불'이잖아. 막무가내로 대들면 이길 재간이 별로 없어 보여. 14번째 대선이 다가온 1840년 민주당은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의심의 여지없이 마틴을 선출했지만 현직 부통령 ‘리처드 쟌슨’(Richard M. Johnson)의 재선임을 반대하면서 최초로 부통령 후보를 선출하지 못했어. 민주당 분열의 시작이었지. 반면에 위그당 전당대회에서는 3명이 경선한 가운데 오하이오 출신 상원의원 ‘윌리엄 헤리슨’(William Henry Harrison)을 최종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고 버지니아 출신 ‘쟌 타일러’(John Tyler)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선출했어. 민주당에 대한 융단폭격을 가한 위그당 선거전은 끝내 그 성과를 발휘해 본선에서 전체 294명 선거인단 중에서 234표를 얻어 말 그대로 싹쓸이 승리를 거두었지. 자세한 내용은 다음 편에서 살펴보기로 할게.


[명재] 지금은 이름조차 없는 정당이 대세였던 민주당을 누르고 승리했으니 얼마나 좋아했을까요?

[해월] 선거에 승리한다는 것은 정치인들의 지상 대명제니까 좋아했겠지. 헌데 당시 9대 대통령에 당선된 윌리엄은 67세로서 1980년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 70세 나이로 제40대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가장 연로한 당선자였어. 그런 그가 취임한 지 32일 만에 폐렴으로 사망하고 말았지. 그의 손자 ‘밴자민 헤리슨’(Benjamin Harrison)이 1889년 그가 못다 한 대통령(23대)에 당선되어 한을 풀긴 했겠지만. 그와 함께 당선된 쟌 타일러 부통령이 그를 승계해 1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나 원래 민주당 사람이었다가 위그당원이 된 쟌은 대통령이 된 후 위그당 정책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위그당으로부터 축출당해 죠지이래 두 번째로 무소속 대통령이 되었어.


[명재] 재선에 실패한 마틴은 정계에서 은퇴하고 편히 쉬었나요?

[해월] 웬걸! 그가 대통령 시절 사들여 이름까지 ‘린든월드’(Lindenwald. 제자 첫면 사진 참조)라고 지은 저택으로 들어간 마틴은 그 후 8년간 도광양회(韜光養晦)의 뜻을 품었지. 1844년 15번째 대선을 앞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제임스 폴크’(James K. Polk)와 맞붙은 마틴은 아홉 차례나 간 표대결에서 끝내 후보자리를 놓쳤어. 택사스 합병을 주장한 폴크는 11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마틴에게 영국대사직을 제의했지만 마틴은 거부했고, 조각단계에서 의견충돌을 보여 결국 두 사람은 결별하고 말았지.


Lindenwald.jpg 'Lindenwald' - Home and Farm of Martin Van Buren in Kinderhook, New York


[명재] 재선을 위한 노력을 계속했군요.

[해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야. 16번째 대선이 다가온 1848년에 이르러서는 노예문제로 충돌이 발생한 민주당의 분열로 민주당 내 노예반대파, 위그당내 노예반대파 그리고 ‘자유당’(Liberty Party) 내 노예반대파들이 모여 ‘자유의 땅 당’(Free Soil Party)을 만들고 마틴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어. 부통령 후보로는 2대 대통령 쟌의 손자이자 6대 대통령 퀸지의 아들로서 메사추새츠 주 상원의원이었던 ‘찰스 에담스 시니어’ (Charles Francis Adams Sr.)를 선출했지. 민주당을 떠나게 된 마틴은 1848년 대선에서 육군소장 ‘제커리 테일러’ (Zachary Taylor)와 뉴욕 주 재무검사관 ‘밀라드 휠모어’(Millard Fillmore)의 위그당 팀 그리고 민주당의 ‘루이스 카스’(Lewis Cass) 미시간 출신 상원의원과 ‘윌리엄 버틀러’(William O. Butler) 캔터키 출신 하원의원 팀 등 위그당과 민주당 후보들과 겨루면서 열심히 노력했건만 선거인단 표를 하나도 얻지 못했고, 오히려 민주당표를 뺏어가 위그당의 제커리가 당선되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지.


[명재]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 두 번씩이나 더 대선에 출마하려고 노력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네요.

45대 대통령을 지낸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도 재선에서 민주당의 ‘조 바이든’(Joe Biden)에게 패한 후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절치부심하다가 끝내 재선에 성공하긴 했지만요.

[해월] 마틴은 1848년 선거에서 성공을 못하자 더 이상 대선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정치에서 떠나지는 못했어. 뒤를 이은 9대 헤리슨에서부터 16대 링컨에 이르기까지 8명에 달한 대통령의 등극을 지켜보며 그들 정부정책에 훈수꾼 내지는 감초가 되었지. 마침내 1861년 4월 미국 내 노예문제로 ‘내전’(American Civil War. 일명 남북전쟁)이 벌어지자 링컨이 이끄는 북부(the Union)를 지지하는 성명을 낸 것이 그의 마지막 정치행위였어. 그때 마틴의 나이는 이미 78세, 그해 겨울부터 폐렴으로 들어 눕기 시작한 후 1862년 7월 24일(79세 8개월) 목요일 새벽 2시에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어. 알려진 병명은 기관지 천식(bronchial asthma)과 심장마비로 그의 부인 헤나와 부모님 그리고 아들 마틴 주니어와 함께 ‘킨더훅 개혁 더치교회 묘소’(Kinderhook Reformed Dutch Church Cemetery)에 안장되어 있어.


Martin_van_Buren's_grave_at_the_Reformed_Dutch_Cemetery_in_Kinderhook..jpg 마틴 벤 뷰런의 묘비석

*마틴 벤 뷰런의 이름을 딴 미국 내 카운티는 미시건, 아이오와, 알켄소 그리고 태내시 주 등에 있으며, ‘Mount Van Buren’, ‘USS Van Buren’ 외에 3곳의 주립 공원 그리고 여러 곳의 도시이름이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져 전해오고 있습니다.


8대 대통령 마틴 벤 뷰런의 서명:


Martin_Van_Buren_Signature.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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