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대 윌리엄 핸리 헤리슨 - 최단기 재임 대통령 1773 - 1841
제9대 대통령 ‘윌리엄 핸리 헤리슨’(William Henry Harrison. 1773-1841)은 영국에서 1603년경 이주해 온 선조들이 이루어 논 터전 위에서 군경력과 정치인 경력을 쌓아나간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18세기 신대륙에 형성되어 있던 13개 영국 식민지 주에서 영국 시민으로 태어난 사람으로서는 마지막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한 인물이었습니다. 역대 대통령 중 한 달(31일)이라는 가장 짧은 기간 재임한 대통령이었으며, 재임 중 사망한 첫 번째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일찍부터 전투에 참여하면서 쌓은 군경력으로 ‘1812년 전쟁’ 때에는 육군소장으로 전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는 미국의 독립과 더불어 새로이 미국 영토로 통합된 서북방 영토의 관리책임자가 되었고, 지역 원주민들과 여러 조약을 맺으면서 수백만 에이커에 달하는 새 영토를 미국영으로 복속시켰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그가 전개한 특유한 선거전략은 미국 현대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68세라는 고령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1981년 ‘로널드 뤠건’ (Ronald Reagan) 제40대 대통령이 69세로 당선될 때까지 최고령 당선자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셋째 아들 ‘쟌 스캇’(Johan Scott Harrison. 1804-1878)이 오하이오 출신 연방 하원의원을 지냈고, 쟌의 아들인 ‘밴자민 헤리슨’(Benjamin Harrison. 1833-1901)이 제23대 대통령을 지내 미국 내 유일한 할아버지-손자 대통령 가족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가 사망할 당시 거의 빈털터리였던 관계로 그의 미망인을 위해 연방의회에서는 부인 ‘엔’(Anne)에게 연 25만 달러의 ‘대통령미망인 연금’을 지급하기로 의결하고 무료로 우편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도 부여하는 역사를 창출하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재임 기간이 너무 짧아 그가 대통령으로서 이루어 논 업적을 살피고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윌리엄 헤리슨’(이하 윌리엄)의 가문과 삶, 그리고 정치적 역정을 살펴보는 의미가 깊으리라 생각합니다.
[競慧] 윌리엄의 선조들도 영국에서 이민 온 것이군요?
[海月] 윌리엄의 미국 내 가문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5대 조부(현조부)인 ‘밴자민 헤리슨 1세’ (Benjamin Harrison I. 1594-1649)로 영국의 ‘노셈튼셔’(Northamptonshire)에서 1594년경 태어나 상당한 학교 교육을 받고 1633년경 버지니아 식민 주정부 주지사위원회(당시 버지니아 식민주 상원역할) 서기로 임명되어 미국으로 건너온 것으로 되어있어. 버지니아 카운티 토지등록 기록에 따르면 카운티 정부에서 1635년 7월 20일 밴자민 1세에게 ‘워로스퀴노악 카운티’ (Warrosquinoake County)에 있는 200 에이커(약 245,000 평)에 달하는 토지를 무상공여하였고, 밴자민은 그곳에 ‘웨이크휠드’(wakefield)라는 집을 짓고 살았지. 일찍부터 지주가 된 5대 조부는 1642년에 버지니아 주 하원의원 생활을 시작하고, 1643년경 영국태생 ’메리 스토튼’(Mary Stourton. 1597-1688)을 부인으로 맞아 ‘밴자민 헤리슨 2세’(Benjamin Harrison II. 1645-1713. 4대 조부)와 ‘피터 헤리슨’(Peter Harrison. 1647-1688) 등 두 아들을 두었지. 1649년 55세를 일기로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 (Jamestown)에서 사망했어.
[경혜] 윌리엄의 현조부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고조부(4대)께서는 그래도 오래 사셨네요?
[해월] 67세에 돌아가셨다고 하니 당시로선 일찍 돌아가신 건 아니지. 고조부 밴자민 2세는 1645년 9월 20일 버지니아주 ‘제임스 시티 카운티’(James City County)에서 태어나 1669년 ‘서리 카운티’(Surry County)에서 ‘헤나 처칠’ (Hannah Churchill. 1651-1698. 姓은 분명치 않음)과 결혼하여 ‘세라’(Sarah), ‘밴자민 3세’ (Benjamin III. 증조부), ‘네사니엘 시니어’(Nathaniel Sr.), ‘헤나’ (Hannah), ‘핸리’(Henry), ‘메리 마가렛’(Mary Margaret), ‘엔’(Anne), 그리고 ‘앨리자배스’ (Elizabeth) 등 3남 5녀를 두었지. 밴자민 2세는 버지니아 주 서리 카운티 ‘케빈 포인트’(Cabin Point)라는 곳에서 1713년 1월 30일 67세를 일기로 사망했어. 그는 버지니아 주정부 주지사 위원회 일을 보면서 주 하원(House of Burgesses)에서 수리 카운티를 대표하는 의원생활을 했는데 1676년을 시작으로 여러 번에 걸쳐 선출되었고 1698년에는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어. 1706년에는 버지니아 주 ‘프린스 죠지’(Prince George) 카운티로부터 4,583 에이커(약 5백6십만 평)에 달하는 땅을 무상으로 받기도 했는데, 교회에도 적지 않은 헌금을 하고 지역 교회건립을 위해 5 에이커 땅을 헌납했다고 해.
[경혜] 고조부께서 정치인이면서 종교인이기도 했네요.
[해월] 훌륭한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실한 종교인이 될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르지. 윌리엄의 증조부 (3대) 밴자민 3세는 1673년 9월 20일 서리 카운티 ‘웨이크휠드’(Wakefield)에서 태어나 1710년 4월 10일 ‘찰스 시티’(Charles City) 카운티 찰스 시티에서 36세를 일기로 사망했어.
[경혜] 아니, 왜 그리 일찍 돌아가셨나요?
[해월] 젊은 나이에 통풍(gout)을 앓았는데 그해 3월에 동료들과 크리켓(cricket) 경기를 하다 심장마비가 왔나 봐.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운명했지. 그의 유해는 ‘웨스트오버’(Westover) 시 강가에 있는 ‘올드 웨스트오버 교회’(Old Westover Church) 묘지에 부인과 함께 안장되어 있어. 그는 일찍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활발한 사회생활을 영위한 사람이었지. 1697년에는 약관 24살에 주 법무장관에 임명되어 1702년까지 봉직했고, 1703년에는 주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1705년에 하원의장을 지냈어. 그리고 1706 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주 재무장관을 역임했지. 증조부는 1695년 ‘그라스터’(Gloucester) 카운티에서 ‘앨리자배스 버웰’(Elizabeth Burwell. 1677-1734)과 결혼하여 ‘밴자민 4세’(조부)와 ‘앨리자배스’ 등 두 아이를 두었어. 증조부는 미국 식민지 역사상 1619년 12월 4일 처음 공식적으로 ‘추수감사절’ 행사가 열렸던 ‘버클리 헌드렛’ (Berkeley Hundred)이라는 땅의 일부를 사서 부인과 함께 자리를 잡았지. 이 땅에 그의 아들 밴자민 4세가 1726년부터 정식으로 헤리슨 가문의 터전이 된 ‘버클리 농장’(Berkeley Plantation)을 만들기 시작했어.
[경혜] 윌리엄의 조부는 어떤 분이셨어요?
[해월] 조부 밴자민 4세는 1693년 9월 11일경 ‘찰스 시티 카운티’에서 태어나 1722년 버지니아 주 ‘렝케스터’(Lancaster) 카운티 ‘코러터만’(Corotoman) 시에서 버지니아의 유명 정치인이자 주지사 대행을 지낸 ‘롸벗 카터’(Robert Carter)의 딸 ‘엔 카터’(Anne Carter. 1702-1743)와 결혼하여 6남 3여, 아홉 명의 자녀(모두 11명이었지만 둘은 영아 때 사망함)를 두었어. 그는 자녀 중 4명을 버지니아 주의 유수 재력가이자 정치 가문인 ‘렌돌프’ (Randolph) 집안과 혼인을 시키면서 미래에 손자와 고손자가 대통령이 될 것을 미리 내다본 것 아닌가 생각이 드네. 조부는 부인이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온 토지를 관리하면서 상당한 수익을 창출했다고 해. 버클리 농장의 조그마한 집에서 태어난 조부는 1726년부터 ‘제임스 강’(James River)이 내려다 보이는 땅에 농장에서 직접 구운 벽돌로 3층짜리 ‘죠지안’ (Georgian) 스타일 벽돌집을 짓기 시작했지. ‘버클리 저택’ (Berkeley Mansion)이라 불리는 이 집은 메사추새츠 주 퀸지(Quincy) 시에 있는 에담스가의 ‘피스휠드’ (Peacefield)와 마찬가지로 두 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사적지가 되었어. 여러 곳에 땅을 사들여 농장수를 늘려간 조부는 1736년부터 1742년까지 버지니아 주 하원에서 ‘찰스 시티 카운티’를 대변하는 의원생활도 했지. 바쁘게 살던 조부는 1745년 7월 12일 넷째 딸 헤나와 함께 저택 2층에서 창문을 닫으려다 번개를 맞는 바람에 52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말았어. 그의 유해가 뭏힌 장소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된 것이 없는 것 같아.
[경혜] 번개에 맞아 부녀가 한꺼번에 내 집에서 사망하다뇨? 정말로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들이네요. 윌리엄의 아버님도 정치인 생활을 하셨었나요?
[해월] 밴자민 5세는 1726년 4월 5일 버클리농장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미국독립을 이끈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이지. 윌리엄의 부친은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체구를 가진 사람으로 그의 형제 모두 국가를 위해 일한 사람들이야. 동생 ‘카터 핸리’(Carter Henry. 1736-1793)는 ‘컴버렌드’ (Cumberland) 카운티의 지도자였고, ‘나사니앨’(Nathaniel. 1742-1782)은 버지니아 주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지냈어. 다른 동생 ‘핸리’(Henry. 1736-1772)는 ‘French and Indian War’ 기간 동안 전투에 참전했고, ‘찰스’(Charles. 1740-1793)는 독립전쟁 시 대륙 군 준장으로 근무했지. 윌리엄의 부친도 근 30년 동안 버지니아 주 하원의원 생활을 했고, 제1차와 제2차 ‘대륙의회’(Continental Congress)에 버지니아 주 대의원으로 참석해 ‘전체위원회’ 의장을 맡기도 했어. 1776년에는 미국 독립선언문에 서명자의 한 사람이 되었던 인물이지. 1781년 12월 1일에는 버지니아 주 제5대 주지사로서 1784년 12월 1일까지 미국의 독립전쟁 동안에 국가에 봉사한 역사적 사람이야.
[경혜] 그렇군요! 윌리엄의 부친께서도 대통령만 안 했지 의원에다 주지사까지 지낸 정치인이었군요?
[해월] 부러울 것 없는 정치인이었고 그의 부친(윌리엄의 조부)이 51세 젊은 나이에 상상을 초월한 번개를 맞아 사망하는 사고를 당해 19살 때 많은 유산을 받게 되었어. 버클리 저택은 물론 버클리 농장 등 일대 여러 농장과 ‘서리 카운티’ 내 땅과 제임스 강을 낀 어장, 그리고 ‘핸리코’(Henrico) 카운티의 제분소 및 다수의 노예들까지 물려받았어. 밴자민 5세는 1748년 ‘앨리자배스 바셋’(Elizabeth Bassett. 1730-1792)과 결혼하여 일곱 자녀를 두었지. 막내아들이 우리의 주인공 ‘윌리엄 핸리’ (William Henry)인데 윌리엄은 부친이 사망할 당시인 1791년 4월 24일경에는 18살 청년으로 '필라댈피아'에 있는 'University of Pensylvania'(UPEN)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경제적 사정이 어려워지자 의학공부를 포기하고 군에 입대하게 돼.
[경혜] 윌리엄의 부친이 대륙회의에 참가한 분이셨고 ‘독립선언문’에 서명자였다니 많은 얘기가 있을 것 같은데 언제 기회 되면 그분에 대해서도 알아봤으면 좋겠네요, 선생님.
[해월] 그래, 그래, 알았어! 역사적 인물이니 알아보면 좋겠지. 시간이 허락되면 그렇게 하자. 우선은 대통령에 대한 대화가 먼저니 이제부터 주인공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형제복이 많은 윌리엄은 1773년 2월 9일 버클리 농장에서 일곱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지. 시기적으로 미국 시민권자가 아닌 영국인으로 태어난 윌리엄은 종종 스스로를 ‘혁명의 아들’(child of the revolution)이라고 부르곤 했다는데 기실 그가 자란 곳은 ‘죠지 워싱턴’이 독립전쟁의 마지막 승기를 잡은 ‘욕타운 전투’(Battle of Yorktown)의 현장에서 겨우 30마일 밖에 안 떨어진 장소였기 때문이었다고 봐. 윌리엄이 겨우 8살일 때 벌어진 전투였지.
[경혜] ‘장군의 아들’이라는 소리는 들어봤는데 윌리엄의 ‘혁명의 아들’이란 칭호도 참신한데요?
[해월] 독립을 외치며 13개 주에서 회오리 역할을 했을 ‘혁명의 주인공’들이 오늘날의 미국을 창출했으니 그들의 자녀들도 그 뜻을 이어받아 강력한 미국을 건설하는 역군이 될 각오가 되어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윌리엄도 그렇게 자신도 역군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의미일 테고. 14살까지는 집에서 가정교육을 받은 윌리엄은 그 해에 버지니아 주 ‘헴든 시드니’(Hampden Sydney)라는 마을에 있는 장로교재단의 ‘헴든 시드니 대학’ (Hampden-Sydney College)에 입학, 3년을 공부한 뒤 1790년에 리치먼드에 사는 큰 형 밴자민 6세와 함께 필라댈피아로 건너갔어. 필라댈피아에 있는 ‘팬실베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있던 1791년 그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소식이 전해지지. 갑작스러운 소식에 어쩔 줄 몰라하던 윌리엄은 형에게 아버지 유산이 상속되고 자기한테는 학자금을 낼 돈이 떨어졌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래면서 안 그래도 별로였던 의학공부를 중단했어. 다행히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인 ‘핸리 리 3세’ (Henry Lee III) 9대 버지니아 주지사를 만나 진로를 상의하다 군에 입대하기로 하지. 1791년 8월 16일 리 주지사는 곧바로 그를 육군 소위로 발령내주고 첫 임지로 선정된 곳은 북서부지역 원주민들과 항상 전투상태에 있는 ‘북서 부속령’(Northwest Territory)에 위치한 ‘신시네티’(Cincinnati) 시의 ‘워싱턴 요새’(Fort Washington)였어. 18살 때의 일이야.
[경혜] 그야말로 안타까운 상황이네요. 의학공부를 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산이 전부 형에게 상속되어 본인은 구경도 못하게 되었다는 얘기네요. 어째 유산관리에 문제가 있는 느낌이 드네요.
[해월] 그렇지? 카운티 기록에 의하면 아버지가 유언장을 만들었고 그 유언장을 등록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아마 당시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고 윌리엄이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상속대상에서 제외된 것 같아. 큰 형 ‘밴자민 카터 헤리슨 6세’(Benjamin Carter Harrison VI)는 1755년생으로 36세였고 장자였기 때문에 모두 받아 챙겼나 보지. 당시 관습이었던 ‘장자상속제’ 여파였을 거야. 18살 윌리엄이 소위계급장을 달고 첫 임지로 달려가 근무를 시작한 지 일 년이 지난 1792년 새로 부임한 사령관 ‘엔소니 웨인’(Anthony Wayne) 소장이 그를 중위로 진급시키고, 1년 뒤엔 그를 부관으로 발령 내었어. 윌리엄은 비서관역할을 하면서 군지휘하는 지식을 몸에 익혀나갔지. 1794년 8월 20일에는 북서 부속령 관할 지역의 원주민과 영국군 연합군을 상대로 한 전투인 ‘Battle of Fallen Timbers’ 전투에서 웨인 장군과 함께 대 승리를 거두었어. 이 전투는 북서 부속령에서 원주민과의 전투를 종지부 찍는 전투였지. 웨인은 윌리엄 중위의 활약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1795년 원주민연합과의 ‘그린빌 조약’ (Treaty of Greenville)을 체결하는 서명자의 한 사람으로 만들었어. 그 조약으로 다시 한번 원주민이 소유하고 대대로 살던 땅을 미국정부에 헌납하게 만들었고, 그 땅이 나중에 ‘오하이오’(Ohio) 주의 일부가 되었지. 그래도 개인적 금전복은 없는지 1793년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을 때 땅 3,000 에이커와 노예 몇 명 등 가족 재산의 일부를 상속받았는데 자신이 군에 근무 중이라 그 땅을 형에게 팔았다는 거야. 1797년 5월 대위로 승진하고 1798년 6월 1일 군복을 벗었을 때 주머니가 아주 가벼웠다는 것 같아.
[경혜] 18살에 소위로 입대하여 25살에 대위로 제대한 윌리엄에게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해월] 제대 후 윌리엄의 삶은 매우 빠르게 전개되었어. 한마디로 ‘정치인 윌리엄’의 출범이지. 그런데 그 시작 전에 윌리엄은 일찍 결혼을 했으니 그 얘기를 먼저 해야겠지. 원주민과의 전투가 벌어진 후인 1795년 초 오하이오 주 신시네티 광역도시 내 ‘노스 밴드’(North Bend)라는 마을 출신 ‘에나 터트힐 심스’(Anna Tuthill Symmes. 1775.7.25-1864.2.25)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어. 그가 스물두 살 때지. 에나의 아버지는 독립전쟁에 대령으로 참전하고 연합의회에 대의원으로 참가했던 ‘쟌 크리브스 심스’(John Cleves Symmes) 판사였는데 윌리엄의 결혼허락 요청을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지. 왜 그를 그렇게 안 좋게 봤는지 몰라도 반대를 하는 바람에 에나는 아버지가 출장 가기를 기다렸다가 윌리엄과 함께 가출하여 1795년 11월 25일 북서 부속령 정부의 재무책임자 ‘스태판 우드’ (Stephen Wood)의 집에서 결혼식을 치렀어. 에나의 건강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은 6남 4녀 10명의 자녀를 두었지. 이들 중 셋째 아들 ‘쟌 스캇’(John Scott)이 23대 대통령이 되는 ‘밴자민 헤리슨’(Benjamin Harrison)의 아버지가 되지.
[경혜] 와! 윌리엄도 요즘 같으면 생각도 못할 일을 했네요. 10명의 자녀를 두다뇨?
[해월] 한국에선 인구절벽이라 난리 났다고 하니까 바뀐 세상을 실감하지만 18세기 미국에는 아직 인구가 많이 필요했던 시절이었겠지. 요즘도 미국 내 부유한 가정에서는 숫자에 연연하지 않는 것 같아. 자식의 수는 경제력에 많이 좌우되는 모습이야. 최근에 억만장자 중에 ‘태슬러’(Tesla) 창업자 ‘일런 머스크’(Elon Musk)가 열세 번째 자식을 낳았다는 소식이 있더라고.
하여튼 군에서 나온 윌리엄은 주위의 친구들이 북서 부속령 정부에서 일도 하고 자기와 화해한 장인도 그를 적극 지원하면서 정부일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어. 마침 '쟌 에담스' 대통령이 1798년 7월 그를 북서 부속령 정부 내 공석 중인 총무책임자로 임명하였지. 그러나 총무부일에 권태를 느낀 윌리엄은 '말 사육사업'을 열어 지역 부유층의 관심을 끄는 한편 연방의회에서 북서지역 땅값을 올리는 법안을 만들어 정착인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땅값을 내려야 한다는 켐페인을 벌이기 시작했지. 마침 지역의 인구도 늘어나 1799년 10월에는 의회 대의원 선출자격을 얻었지.
[경혜] 드디어 정치계로 진출하게 되는가 봐요.
[해월] 시작이지. 1798년 대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상대방을 누르고 당당히 대의원에 선출된 윌리엄은 1799년 3월 4일부터 1800년 5월 14일까지 제6회 연방 의회에서 일을 보게 되었어. 비록 투표권은 없지만 위원회에 들어가 법안을 제출하기도 하고 1800년에는 ‘공공토지 위원회’(Committee on Public Lands)의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토지법’ (Land Act)을 추진하기도 했어. 이 토지법은 개인이 정부토지를 작은 규모로 싸게 매입할 수 있게 한 법으로 부속령에 급속도로 인구가 늘어나게 한 법이기도 해. 그리고 곧 북서 부속령을 같은 이름의 ‘Northwest Territory’와 ‘Indiana Territory’ 등 두 지역으로 나누는 역할을 했지. 동쪽지역인 ‘북서 부속령’은 현재의 오하이오와 미시간 주 동부를 포함하는 지역이고, 서쪽 지역인 ‘인디에나 부속령’은 현재의 인디에나, 일리노이(Illinois), ‘위스칸신’(Wisconsin), 서쪽 미시건과 동쪽 ‘미내소타’ (Minnesota)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야. 여기에 1800년 5월 13일에는 쟌 에담스 대통령이 27살 된 윌리엄을 '인디에나 부속령'의 주지사로 임명하는 역사가 벌어져. 윌리엄이 지닌 지역연고와 그의 중립적 정치색을 감안한 조치였지. 향후 연방 상원에서 승인이 나자 윌리엄은 대의원직을 사임하고 1801년부터 주지사로서 12년 동안 봉직했어.
[경혜] 윌리엄이 우연히 맺은 군과의 인연이 북서 부속령과의 인연으로 이어지며 미국의 새로운 영토에서 주지사라는 직책으로 정치를 시작하는군요?
[해월] 맞아! 비록 정식 주의 주지사가 아니라 부속령의 주지사이긴 하지만 엄연히 당시 인근 주 규모의 지역이었기 때문에 윌리엄의 임무가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가볍지 않았지. 1801년 1월 10일 '인디에나 부속령'의 수도 ‘빈샌스’(Vincennes)에서 초대 주지사 직무를 시작했는데, 쟌 에담스 이후 ‘토마스 제퍼슨’과 ‘제임스 메디슨’ 등 3대와 4대 대통령들도 1803년, 1806년 그리고 1809년에 윌리엄을 재임명하였지. 윌리엄은 1804년에 인디에나 부속령 인근의 ‘루이지에나 지구’(District of Louisiana)에 민간정부가 세워지면서 그곳의 임시 주지사직도 겸직했어. 5주 동안 행정일을 보다가 1805년 7월 4일 정식으로 ‘루이지에나 부속령’(Louisiana Territory)으로 승격되면서 주지사직을 넘겨주고 돌아왔지.
[경혜] 독립전쟁 후 영국으로부터 넘겨받은 북서쪽 영토에서 윌리엄이 확실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군요?
[해월] 정식으로 미국의 주(State)로 편입되려면 가장 큰 걸림돌이 주민수를 늘리는 것인데 동부사람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영토확장을 시도했어. 지역의 분위기를 파악한 윌리엄에게 원주민과의 협상에 대한 전권이 주어지면서 전격적으로 협약이 맺어지기 시작했지. 1804년의 ‘세인 루이스 조약’ (Treaty of St. Louis)은 ‘소크’(Sauk)족과 ‘매스콰키’(Meskwaki) 족과 맺은 조약으로 ‘일리노이’ (Illinois) 서부땅과 ‘미조리’ (Missouri) 일부 땅을 인수했지. 1805년 8월에는 ‘마이에미’(Miami) 부족과 인디에나 남부, 북동부 그리고 오하이오 북서부 일부땅을 사들이는 ‘그라우스렌드 조약’(Treaty of Grouseland)을 맺었어. ‘그라우스렌드’(Grouseland)는 윌리엄이 1804년에 빈샌스에 지은 주택 이름인데 지역에 많이 서식하는 새의 이름을 따지은 것이야. 이 저택에서 원주민과 조약을 체결하기도 하고 선거켐페인 사무실로 운영하기도 했지.
[경혜] 주지사의 공식 사무실 겸 거주 저택을 마련했군요?
[해월] 맞아! 그 저택에서 주 수도가 ‘코리든’(Corydon)으로 이전되는 1813년까지 살았지. 윌리엄이 연방 정부를 대신해 게걸스럽게 사들인 대지가 1805년까지 모두 5천1백만 에이커(약 624억 평)나 된다고 해. 이때 조약체결에 앞서 원주민 대표들을 술에 취하게 해 얼떨결에 2만 에이커 당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매입했다는 전설적 얘기도 있어. 나중에 조약체결 내용을 알게 된 원주민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는 상상이 어렵지 않을 거야. 윌리엄은 계속해서 1809년에는 ‘포타와토미’ (Potawatomi), ‘댈라웨어’(Delaware), ‘마이에미’(Miami), 그리고 ‘일 리버’ (Eel River) 부족들로부터 2백5십만 에이커에 달하는 땅을 사들이는 ‘웨인요새 조약’(Treaty of Fort Wayne)도 마무리했어. 현 일리노이 주와 '위스칸신'(Wisconsin) 및 '미조리'(Missouri) 주 상당 부분을 사들이는 역사를 말하지.
[경혜] 미국영토를 많이 늘려 놓긴 했겠지만 원주민들의 심기를 극도로 상하게 하지는 않았나요?
[해월] 왜 아니겠어. 자기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땅을 거의 무상으로 백인에게 넘긴 것도 억울한데 그 땅에 백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자 당시 ‘쇼니’(Shawnee) 부족을 이끌던 ‘태컴새’(Tecumseh)와 ‘탠스콰타와’(Tenskwatawa. 예언자라는 별명을 가짐) 형제가 일대 원주민 부족들과 함께 백인에 저항하는 혁명을 일으켰지. 윌리엄은 태컴새를 달래 보려고 노력했지만 조약에 서명한 부족장들에게 조약을 이행할 경우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한 태컴새는 막무가네였어. 결국 1811년 ‘태컴새의 전쟁’(Tecumseh’s War)라고 불리는 전쟁에서 미국군에 패한 부족들은 케나다로 탈출하고 말았지. 이 전쟁 중에 영국군은 또 얄궂게 원주민들을 부추기고 무기까지 제공하여 미국의회에서는 영국이 미국 내정에 간섭했다고 비난하는 결의서를 채택하고 1812년 6월 18일 대영 선전포고를 발표하게 이르렀지. 윌리엄은 때를 놓치지 않고 군에서 한자리 얻으려고 빈샌스를 떠나 중앙으로 갔지.
[경혜] 주지사가 전투에 참여하려고 임지를 떠나요? 그래도 괜찮았나 보죠?
[해월] 윌리엄은 곧 캔터키주 민병대 소장자리를 얻었고 1812년 9월 17일에는 미국 ‘북서부 육군사령관’으로 발령받으면서 그해 12월 28일 주지사직을 사임할 때까지 연방 정부로부터 두 직책에 대한 급료를 받았다고 하네. 잘은 모르겠지만 그쯤 되면 행정부 업무가 아직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제임스 메디슨' 대통령이 영국군에 ‘디트로이트’(Detroit)가 함락되자 윌리엄에게 이를 탈환할 것을 명하지. 영국군과 원주민 연합군이 수적으로 우세한 데다 겨울이 다가온 관계로 잠시 수성하던 윌리엄은 1813년 지원군이 도착하자 공세로 전환, 인디에나 부속령과 오하이오 지역을 접수하고 디트로이트 탈환도 성공하지. 여세를 몰아 영국군과 원주민 연합군이 있는 케나다까지 진격해 1813년 10월 5일 ‘테임즈 전투’(Battle of the Thames)에서 영국군은 물론 원주민연합을 이끌던 ‘태컴새’까지 전사시키는 전공을 세웠어. 윌리엄은 한순간에 미국의 영웅이 되었고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었지. 1814년에는 당시 전쟁장관 ‘쟌 암스트롱’(John Armstrong)의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여 군 장군직을 은퇴하고 가족이 기다리는 오하이오의 ‘노스 밴드’(North Bend)로 돌아갔어. ‘1812년의 전쟁’이 끝나자 미 의회에서는 윌리엄의 갑작스러운 사임에 대한 청문회를 열고 조사를 했는데, 결과적으로 전쟁장관의 부당한 처우를 밝히고 윌리엄의 명예를 회복해 주면서 군인으로서 봉사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그에게 훈장(Gold Medal)을 수여했지.
[경혜] 미육군 장군으로 전쟁영웅의 명성을 떨치게 된 윌리엄의 정치인 변신이 궁금하네요.
[해월] 민간인 신분이 된 윌리엄은 북서지역 원주민들과의 평화협상을 진행하고 있던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 대통령이 1815년 6월 윌리엄을 협상자의 한 사람으로 발령을 내자 북부 원주민인 '완닷'(Wyandot), '댈라웨어'(Delaware), '새내카'(Seneca), '쇼니'(Shawnee), '마이에미'(Miami), '치패와'(Chippewa), '오타와'(Ottawa), 그리고 '포타와토미'(Potawatomi) 부족들과의 두 번째 조약인 ‘스프링 웰스 조약’(Treaty of Spring Wells)을 1815년 9월 8일에 마무리 지었어. 이로서 북부의 대규모 땅이 미국정부에 또 흡수되었고 이들 원주민들은 조약내용대로 미국정부가 제공한 보호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지. 원주민과의 협상을 마무리진 윌리엄은 1816년 오하이오 주 출신 연방 하원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어. 그러나 1817년에는 '제임스 먼로' 행정부의 전쟁장관 자리를 기대했으나 실패했고, 러시아 대사자리를 노렸지만 성취하지 못했지. 1819년엔 하원의원직이 끝나자 오하이오 주 상원의원에 선출되었고, 1820년에는 오하이오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다 실패했지. 1822년에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실패한 그는 굴하지 않고 1824년의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승리했지.
[경혜] 윌리엄이 끝없는 도전 끝에 연방 상원의원에 등극했네요.
[해월] 맞아! 도전의 연속이었지. 그러나 연방 상원의원을 지내던 윌리엄에게 큰 변화가 온 것은 1828년이었어. ‘쟌 퀸지 에담스’(John Quincy Adams) 대통령이 그를 남미 ‘콜럼비아 공화국’(Gran Colombia)의 외교 전권공사(minister plenipotentiary. 대사 아래 직급)에 임명하면서 상원의원직을 사임하게 되었지. 1829년 3월 8일 콜럼비아 수도 ‘보고타’(Bogota)로 부임한 윌리엄은 군부독재자의 길로 들어선 ‘시몬 볼리바’ (Simon Bolivar) 대통령에게 외교관으로서 중립을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치철학인 ‘민주주의’를 지향할 것을 권고하는 등 주재국 통치자와 불화를 일으키기 시작했어. 1829년 3월 권력을 잡은 ‘엔드류 젝슨’(Andrew Jackson) 대통령은 윌리엄을 소환하고 윌리엄은 다시 노스 밴드 농장으로 돌아가 지난 40년을 회고하며 조용한 삶을 살기 시작했지.
[경혜] 외교관이 주재국 지도자와 개인적 감정이나 이론을 펼치는 무리를 저질렀네요.
[해월] 최소한 자기 생각을 강요할 필요는 없었겠지. 당시 볼리바 대통령은 스페인제국이 다스리던 일대의 여러 식민지를 통치하던 군부독재자였는데 그와 맞상대하려 했다는 것은 무모한 일일수밖에 없었을 거야. 개인으로 돌아온 윌리엄은 생활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주위 지지자들에 의해 오하이오 주 남서부 변두리에 있는 ‘헤밀턴 카운티’(Hamilton County) 법원 서기 자리를 얻어 1836년부터 1840년까지 일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옥수수 밭을 일구고 위스키 만드는 증류소도 만들었었어. 그러나 자기가 만든 알코올이 고객에게 끼치는 해악을 본 윌리엄은 곧 증류소 문을 닫아버렸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던 것 같아. 헤밀턴 카운티 농업위원회에 출두해서 “내가 알코올을 제조하는 죄를 저지른 것 같다. 내가 저지른 실수를 거울삼아 다른 이들도 술제조를 중단하기를 바란다”라고 밝힐 정도였으니까.
[경혜] 죠지 워싱턴도 만들어 판 위스키인데 윌리엄은 위스키 마신 사람들의 추한 모습에 죄책감을 느꼈나 보네요! 요즘 남녀 모두 주야로 술 마시는 분위기와 견주면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네요!
[해월] 어디까지 개인의 감정이니까 시비를 논할 이유는 없을 거야. 어쨌든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원주민과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끈 윌리엄의 인기는 1836년 11월에 치러진 13차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위그당(Whig Party)의 대선주자 중 한 사람이 될 만큼 컸지. 네 명의 대선주자가 민주당의 현직 부통령 ‘마틴 벤 뷰런’(Martin Van Buren)과의 경쟁에서 젝슨 대통령의 지지를 받은 벤 뷰런에게 패배하고 4년을 더 기다렸어야 했어.
[경혜] 4년 후라면 윌리엄이 67세가 되는데 상당히 연로한 상태이지 않나요?
[해월] 68세에 대통령에 취임했으니까 1981년에 ‘로널드 뤠건’(Ronald Reagan)이 69세로 취임할 때까지 가장 연로한 나이에 취임한 대통령이었지. 1839년 열린 위그당의 전국 전당대회에서 단독 대선주자가 된 윌리엄은 현직인 벤 뷰런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강조하는 선거전략을 펼쳐 나갔어.
1837년 닥친 경제위기로 국내 경제에 여러 어려움을 겪은 벤 뷰런을 '귀족정치인'으로 몰아세우고 그에게 “미국의 경제를 망친 벤”(Van Ruin)이라는 별명을 지워 불렀지. 물론 민주당도 가만히 있진 않았어. 연로한 윌리엄을 ‘늙은 헤리슨’(Granny Harrison)이라 부르면서 ‘1812년 전쟁’이 끝나기 전에 전역했다고 ‘유약한 장군’(petticoat general)이라고 하고, 또 ‘멍청한 우상’(dumb idol)이라며 비하하기도 했지. 버지니아 주 출신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쟌 타일러’ (John Tyler)를 부통령후보로 함께한 윌리엄은 1840년 10월 30일부터 시작된 14번째 대선에서 294명의 선거인단 중 234표를 얻어 60표를 얻은 벤 뷰런을 가볍게 누르고 승리했어. 국민투표에서도 53%를 얻어 완승을 거두었고.
[경혜] 나이가 많아 걱정되었지만 국민의 선택은 역시 영웅에게로 돌아가네요.
[해월] 벤 뷰런 행정부 시절 경제위기가 닥쳤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특히 전쟁영웅에게는 지도자로서 신뢰가 강하게 발생하는지 미국 역대 대통령에는 그 같은 영웅들이 대통령에 추대되고 선출된 경향이 짙네. 1841년 3월 4일 취임식을 가진 윌리엄은 영상 9도의 춥고 찬 바람과 함께 습한 날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배움이 많고 생각이 깊은 그리고 전쟁에서 미국을 확고하게 지킨 전쟁영웅임을 알리고 싶었던 것 같아. 추운 날씨에도 오버코트와 모자를 착용치 않은 채 말에 올라 취임식장까지 간 윌리엄은 역사상 가장 긴 장장 두 시간에 걸친 취임연설을 강행했어.
[경혜] 취임식이 야외에서 열렸었나요?
[해월] 맞아. 국회의사당 동쪽현관 앞에서 열렸지. 요즘은 해를 많이 받는 서쪽에서 열리지만 동쪽에서 추운 날씨에 몇 시간 동안 밖에 서서 진행하려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거야. 윌리엄은 취임연설에서 "본인은 단 한 번만 대통령으로 복무하고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어. 대통령의 거부권도 최대한으로 적게 하고 경제문제는 전적으로 의회에 일임하겠다고 했지. '중앙은행' 재건을 찬성하고 동전대신 '지폐 발행'을 선호한다고 하면서 노예문제는 각 주에 위임한다고 해 남부지역 사람들을 두둔하는 발언도 했어. 자신을 낮추고 불화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보이는 정책을 펼치려고 한 것 같아. 연설을 끝낸 9대 대통령 윌리엄은 다시 말을 타고 취임 퍼레이드를 하여 백악관으로 돌아가 또 세 시간이나 방문객을 맞이했다고 해. 저녁에는 취임축하 연회를 세 곳이나 참석하는 강행군을 치렀지.
[경혜] 미국 대통령 취임식날은 말 그대로 축제의 장인 것 같아요. 밤새 연회장에 사람들이 끊임없더군요.
[해월] 축하할 일이니 축하연을 갖는 것이 당연하겠지. 항상 그 뒤가 문제없기를 바라면서 갖는 연회장일 거야. 나도 제43대 아들 부시 대통령(George Walker Bush)의 1기 취임식이 열렸던 2001년 1월 20일 아침에 워싱턴, 디씨의 의회의사당 취임식장에 수많은 인파와 섞여 흥분을 나눈 적이 있지만 하나의 축제며 장관임에는 틀림없지. 불행히도 윌리엄은 취임 후 지속해서 위그당 사람들에게 시달렸어. 가장 큰 라이벌이던 캔터키 출신 상원의원이던 ‘핸리 크레이’(Henry Clay Jr.)와의 정책설정 의견불일치로 언쟁이 이어졌고 내각구성에 까지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계속해서 백악관으로 찾아드는 취업희망자들로 귀찮을 지경이었어. 심지어 내각장관들까지도 윌리엄의 인선에 반대하는 사태도 빈번했지. 국고가 비었다는 재무장관의 보고로 의회의 특별회기를 설정해 놓은 윌리엄에게 큰 변화가 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야.
[경혜] 주위의 비협조와 심각한 재정문제가 윌리엄의 심기를 어지렵혔겠네요.
[해월] 윌리엄은 머리도 식힐 겸 1841년 3월 24일 수요일 아침 산보를 나갔는데 마침 소나기를 만나 흠뻑 젖은 상태로 백악관으로 돌아왔는데 26일 금요일부터 감기증상이 나타나면서 주치의를 부를 정도로 악화되었지. 27일 토요일에 의사의 두 번째 왕진이 이뤄지고 일요일인 28일엔 일요예배를 거르면서 당시 치료법의 한 방안인 ‘피 뽑기’도 했어. 29일 월요일에 윌리엄 곁에 모인 여러 의사들은 윌리엄의 병이 오른쪽 아래 폐에 ‘폐렴’(pneumonia)이 발생했다는 최종 진단을 내렸지. 그때까지 백악관으로부터 아무런 발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밖에서는 괴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어.
[경혜] 서민적 대통령 윌리엄이 두문불출했을 테니 워싱턴 사람들의 입이 가만있지 않았겠지요.
[해월] 대통령의 모습이 사라졌으니 온갖 풍문이 돌아다녔겠지. 병세가 악화되면서 내각과 가족들에게 백악관으로 모일 것을 통보하기 시작했어. 윌리엄의 부인 ‘에나’(Anna)는 본인의 지병으로 오하이오에 머물고 있었지. 4월 3일 토요일 저녁의 윌리엄은 심한 설사를 하면서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어. 저녁 8시 30분경 윌리엄은 곁을 지키던 주치의에게 나지막하게 “여보게, 자네가 미국정부의 진정한 조직원리를 이해하기를 바라. 그 원리대로 이어나가기를 바랄 뿐이네. 그것이 나의 마지막 바람이네”(Sir, I wish you to understand the true principles of the government. I wish them carried out. I ask nothing more.”)라는 유언을 남겼지. 이 유언은 그때까지 대통령의 유고시 누가 어떻게 그 직을 이어받을지에 대해 아무것도 법으로 정리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주치의의 입을 통해 부통령 ‘쟌 타일러’에게 직을 승계하도록 하라는 명이었을 수도 있겠지. 결국 4월 4일 일요일(Palm Sunday) 자정이 지난 0시 30분경 직무 중 사망한 최초의 미국대통령이 되었어. 부인은 아직 오하이오에서 짐을 싸던 중에 사망소식을 들었다고 하니 마음이 어땠을까.
[경혜] 대통령에 취임한 지 31일 만에 사망한 대통령이라 하니 많이 애석하네요.
[해월] 윌리엄 사망 후 30일 동안 추모기간을 가진 미국정부는 영국왕실규범에 준하는 장례절차를 가졌지. 백악관 동부실(East Room)에서 초대손님만 참석하는 장례식을 가진 후 유해를 일차로 ‘의회묘지’(Congressional Cemetery)에 유치했다가 6월에 기차를 이용해 오하이오 주 노스 밴드로 운구하여 7월 7일 ‘내보 산’(Mt. Nebo) 정상에 안치했어. 이곳은 현재 ‘윌리엄 핸리 헤리슨 묘 주립 추념공원’ (William Henry Harrison Tomb State Memorial)으로 명명되어 있지. 19세기 초 미국 정치의 풍운아적 면모를 보였던 윌리엄이 뜻을 펼치지 못하고 졸지에 사망함으로써 국가의 운명은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는데, 대통령 대행이 아닌 대통령직 승계를 주장하면서 선서를 하고 10대 대통령으로 등극한 '쟌 타일러'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 윌리엄의 성품을 살펴볼 그의 서명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