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옷이라는 감옥 속에서 - 라이너 브라운

by 심홍석

사람과의 관계에서든, 여럿이 함께하는 모임에서든, 이러저러한 이유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거나 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사정이 생길 때가 있다. 그럴 때 자신의 사정을 잘 이야기하면서 상대에게 미안함과 아쉬운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고 잘 마무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제법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그냥 팩트만 던지고 말거나,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니니 딱히 설명하거나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보이곤 한다. 관계적으로 미숙한 태도지만 그래도 여기까진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더 나아가 이 관계나 약속이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되려 흠을 잡는다거나, 상대방의 기대가 부담스럽다며 상대를 탓하고 밀쳐내는 경우도 있다. 최악의 경우 도망치듯 연락을 끊거나 잠수를 타기도 한다.


왜 그들은 미안해야 할 상황에서 회피하거나 오히려 뻔뻔하게 굴까? 정말 미안함을 모르는 걸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자신이 상대방을 실망시킬까 봐 두려운 마음에 두꺼운 갑옷 뒤에 숨어버린 것이다. 그 갑옷 속에는 상대방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미안함, 자신의 실수와 부족함에 대한 수치심, 상대방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숨어있다.


‘갑옷 거인’ 라이너 브라운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의 단단한 갑옷 안에는 깨지기 쉬운 연약한 마음이 숨어있었다.




갑옷 거인이 처음으로 등장해 무지막지한 힘으로 에렌의 세상을 부숴버렸을 때, 갑옷 거인은 무척 강하고 단단해 보였다. 하지만 알고보면 라이너는 그때 가장 두려운 순간을 겪고 있었다. 리더인 마르셀이 자신을 대신해 거인에게 잡아먹히고, 임무를 실패한 채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고향의 기대,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미안함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라이너는 두꺼운 갑옷을 입고 월마리아의 성벽을 부순다.


이후로 라이너는 강해졌다. 마치 자신을 구하다가 거인에게 잡아먹힌 마르셀의 자리를 대신하듯이. 강하고 듬직한 라이너에게 많은 동료들이 의지했다. 하지만 짐승 거인이 나타나고, 동료인 유미르가 마르셀을 잡아먹은 거인이라는 사실도 드러났고, 자신의 정체마저 들킬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자 라이너에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두려움이 다시 찾아왔다. 자신을 형처럼 의지하는 동료들의 기대, 그들의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자신이라는 죄책감, 임무를 수행하길 바라고 있는 마레의 기대. 이 혼란과 충돌이 낳은 미안함과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라이너는 다시 갑옷 거인이 되어 그 속에 숨어버린다.


하지만 그 갑옷은 라이너의 내면까지 지켜주지는 못했다. 인지부조화와 죄책감 속에서 라이너는 점점 붕괴되어 갔다. 환각과 우울, 자아분열 속에 시달리며 라이너는 스스로 총구를 입에 물기까지 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입었던 단단한 갑옷이 감옥이 되어, 그 속에서 라이너는 죽어갔다. 그때 거짓말처럼 에렌이 라이너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라이너는 그때부터 치유되기 시작한다.



라이너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에렌에게 라이너는 처음으로 울면서 사과를 한다.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고. 상황 때문이 아니었다고. 그저 자신이 영웅이 되고 싶었고, 남들에게 존경받고 싶었노라고. 무릎을 꿇고 울면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지켜내기 위한 갑옷 거인이 된다. 막아내고, 깨지고, 그래도 또 막아낸 끝에 라이너는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낼 수 있게 된다. 긴 싸움이 끝나고, 라이너는 마침내 갑옷 거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자신의 어머니 앞에 선 라이너의 말은 “내가 엄마를 지켜냈어” 라든지 “나 살아 돌아왔어” 같은 것이 아니었다.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하면서 라이너는 이렇게 말한다. “난 이제 갑옷 거인이 아닌 것 같아”


라이너가 벗어난 것은 갑옷 거인에서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평생 감옥에 가두었던 죄책감과 두려움에서도 벗어나고 있었다. 라이너는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릴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해 어렵게 고백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라이너에게 한 말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꼭 듣고 싶어 하는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라이너를 안고 사과했다.

정말? 다행이다. 그동안 미안했다. 더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


때때로 우린 잘못이 없어도 미안해진다. 그래서 때때로 우린 갑옷 속으로 숨어버린다. 허세와 변명으로, 회피와 뻔뻔함으로. 하지만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단단한 갑옷이 아니라, 그저 내 마음을 드러내는 솔직한 고백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누군가는 라이너의 어머니처럼, 그 마음을 따뜻하게 끌어안아 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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