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나 계절이 그러듯, 사람의 감정도 다양하고 때에 따라 변화무쌍하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특정한 감정이 고장 난 듯 결여되었거나, 특정한 감정에 고정된 듯 빠져나오지 못하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들은 괴짜처럼 보인다. 조사병단의 기행종, 한지 조에처럼.
처음엔 한지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나는 감정이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한 사람을 볼 때 마음이 불편해지곤 한다. 감정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거나, 컨셉을 미리 정해놓고 그 컨셉에 감정을 끼워 넣는 사람. 주변에 맞지 않는 억지 텐션을 끌어올리거나, 스쳐 지나가는 감정 하나를 붙잡아 부풀려서 남들에게 전시하고 싶어 하는 사람 말이다. 한지의 첫인상도 그랬었다.
거인은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다. 그야 당연한 것이,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큰 덩치에 이상한 표정을 하고 내 가족과 이웃을 잡아먹는 존재가 아닌가. 특히 거인들을 수없이 직접 대면하고, 눈앞에서 동료가 먹히는 것을 보아왔던 조사병단에게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한지에게는 그게 느껴지지 않았다. 벽외 조사를 나갈 때도, 잡아 온 거인에게 여러 가지 실험을 할 때도, 굳은 표정의 조사병단 사이에서 한지는 혼자만 들뜬 표정을 하고 있었다.
두려움이나 혐오를 들키기 싫어서 그러는 걸까? 혹은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 쿨하고 대범한 척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일까? 그런 이들은 주변 사람들의 연약함과 슬픔에 제대로 공감하거나 책임감 있게 행동하지 못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그간 회피해 왔던 자신의 공포와 혐오를 뒤늦게 마주하고 무너져 내리게 마련이다. 환부를 드러내기 싫어 진통제를 맞고 버티다간 결국 곪고 썩어버리는 것처럼. 으레 그렇듯 한지도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한지는 좀 달랐다.
살아가다 보면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연약해 보일 때가 있다. 평생 두려워하고 증오하던 아빠의 매질이 하나도 아프지 않게 느껴질 때. 날 지독하게 괴롭히던 상사가 몹시 우울한 표정으로 혼술을 하는 것을 볼 때.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인간으로 느껴지고, 연약하게 느껴지는 찰나의 순간이 있다. 우리의 공포와 혐오가 살짝 허물어지는 순간. 한지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한지도 처음엔 거인이 무섭고 싫었다고 한다. 동료들의 목숨을 빼앗아 간 거인들을 그저 다 죽여 없애고 싶었다고. 그런데 어느 날 죽은 거인의 머리통을 발로 차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단다. 생각보다 거인의 머리통이 너무 가벼운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갑자기 한지는 거인을 이해해 보고 싶어졌다.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지는 거인을 이해하는데 집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벽을 쌓는다. 공포와 혐오의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벽을 쌓는다. 그러고 나면 벽 너머의 존재들은 그저 나와 다른 존재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 없어져야 할 존재들이 되고 만다. 접촉하거나 대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더 이해할 수 없게 되고, 그러다 보면 공포와 혐오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간다. 그리고 벽은 높아져 간다. 우리 주변엔 그렇게 한없이 높아져 버린 벽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인종과 국가, 세대와 성별, 이념과 종교, 정치색과 빈부 등. 벽을 쌓아 올리고, 상대를 벽 너머에 둔 채로 공포와 혐오를 키워간다.
그 공포와 혐오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벽을 더 높이 쌓는 방법뿐일까? 진격의 거인에서 끊임없이 보여주던 새들처럼 그 벽을 넘어갈 수는 없을까? 한지가 선택한 방법은 벽 너머의 존재를 이해해 보려 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저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적들을 이기기 위해서 이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점점 한지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제거해야 할 존재일 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로 대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의 죽음에 슬퍼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한지와 인간들은 그 공포와 혐오를 다 극복하고 거인들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까? 그런 애니 같은 이야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결국 벽 바깥의 거인을 모조리 없애버렸고, 이제 진짜 거인은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적들은 바다 건너에 또다시 생겨났다.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한지는 웃지 않았다. 조사병단의 단장이 되었고, 적을 제거해 자신과 동료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건너편 상대들을 없애야 하는 적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로 보려는 마음은 계속 한지의 책임감과 충돌했다.
진격의 거인을 보는 많은 이들은 이때의 한지를 한지답지 않다고 말한다. 조사병단의 전임 단장이었던 엘빈에 비해 너무 무기력한 단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이때의 한지가 진짜 한지다. 한지가 섣불리 에렌과 동료들에게 해답을 제시하지 않은 이유는, 한지가 무능력하거나 어리석어서가 아니었다. 한지는 남들이 던져준 쉬운 답을 그냥 답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안쪽 사람들도 바깥쪽 사람들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한지는 끝없이 벽을 넘어갔다. 오냥코퐁과 옐레나를 받아들이고, 마레에 가서 대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가는 순간에서도 끝까지 마레군과 연합군을 만들 계획을 하고 서로에게 다리를 놓는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프록과 싸울지언정 프록이 죽는 순간까지도 그를 존중하며 대화한다. 결국 연합군이 서로 힘을 모아 땅울림을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한지가 넘어간 벽 덕분이었다.
연합군이 비행정을 띄우기 직전 한지는 아르민을 새로운 조사병단 단장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조사병단 단장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이해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자세다”
마지막 희망을 띄우기 위해 한지는 날아올라 자신의 심장을 바친다. 그때 한지는 오랜만에 들뜬 표정을 한다. 한지를 처음 보았을 때의 들뜬 표정은 그저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웃음처럼 보였다면, 마지막 한지의 들뜬 표정은 인간의 공포와 혐오에 지지 않기 위한 저항처럼 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상대해야 할 적을 향해, 자신의 생명을 태우고 밟을 적을 향해, 존중과 이해를 담아 이렇게 말한다.
얏빠리 쿄진데 스바라시나!
(やっぱり巨人って素晴らしいな!, 역시 거인은 경이롭구나!)
진짜 경이로운(스바라시) 존재는 거인들이 아니라 한지였다. 거인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본 자들은 더 포악한 거인이 되어갔지만, 거인들을 경이롭게 바라본 한지는 경이로워져 갔다.
한지의 마지막 말과 표정이 이토록 오래 여운이 남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 삶에도 눈앞에 거인들이 나타날 때. 그래서 나도 모르게 높은 벽을 쌓아 올리고 있는 것을 느꼈을 때. 벽을 넘나드는 새처럼 하늘을 날아오르던 한지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