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성경] 45화, 구원 상담의 성경적 근거와 현대적 회복
한국교회의 강단은 오늘도 뜨겁다. 그러나 뜨거운 설교가 끝난 자리에는 묘한 공허가 남는다.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그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얼굴들.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 앞에서 신자들은 대부분 멈칫한다. 교회 안에 복음은 드물지만, 복음이 ‘자기 이야기’가 된 사람은 더욱 드물다. 여기서 ‘구원 상담’의 필요가 시작된다. 그것은 단순한 전도 기법이 아니라 복음이 한 인간의 언어와 상처, 이성의 구조 안으로 들어가 새롭게 해석되고 뿌리내리는 성령의 통로다.
니고데모가 그랬다. 그는 율법과 신학에 능통했지만, 거듭남의 실재를 몰랐다. 예수는 그 밤, 율법학자의 이성을 넘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라고 말씀하셨다. 이 한 문장은 구원의 본질 즉 ‘성령에 의한 중생’을 밝히는 동시에, 단순한 지식적인 믿음을 생명력 있는 말씀을 통한 믿음으로 전환시키는 상담의 언어였다.
예수는 니고데모의 개념 체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했다.
복음은 설교보다 대화에 가까운 언어로 역사한다. 사마리아 여인은 한낮의 우물가에서 물을 길러 나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일상적 대화 속에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 4:14)라고 하셨다. 그녀의 표면적 갈증을 영혼의 결핍으로 번역하신 것이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요 4:16)라는 말씀은 정죄가 아니라, 숨겨둔 죄와 상처의 중심을 짚어낸 상담적 개입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아시는 주님 앞에서 무너졌고,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그리스도를 만났다”(요 4:29)라며 마을로 달려간다. 구원 상담은 바로 이런 수치를 증언으로 바꿔 내면의 전환을 일으키는 성령의 대화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수레 위에서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다.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어린 양과 같이 끌려갔도다”(사 53:7). 그는 묻는다.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행 8:34). 빌립은 그가 읽는 그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전했다(행 8:35). 복음은 지성의 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심령의 문을 두드린다.
성령은 이해 없는 감정의 믿음을 원치 않으신다. 내시가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행 8:36)라고 고백할 때, 그 믿음은 지식적 믿음에서 구원의 확신으로 옮겨갔다. 구원 상담은 복음을 해석해서 개념 정리를 도와주는 일이다. 그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믿음은 공허할 뿐이다.
20세기 교회의 결단주의는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시겠습니까?”라는 문장으로 집약된다. 그러나 복음은 ‘선택’이 아니라 ‘탄생’이다. 고넬료의 사건이 그 증거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행 10:2)이었지만, 복음의 실체를 몰랐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 “내가 깨끗케 한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 하시고, 그를 고넬료의 집으로 이끄셨다.
베드로는 가이사랴의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다. 그가 복음을 전할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려오시니”(행 10:44). 그 순간은 인간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였다. 구원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적 방문이다. 구원 상담은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현장을 함께 목도하는 일이다.
빌립보 간수는 감옥의 문이 열리자 절망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
바울과 실라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라고 대답했다. 그 밤에 간수는 온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고, 하나님을 기뻐하였다(행 16:33~34). 구원은 개인의 위로에서 끝나지 않는다. 가정의 질서가 바뀌고, 삶의 중심이 이동하게 한다. 구원 상담은 한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인 동시에, 그가 속한 가족과 세계를 새롭게 재편하는 복음의 질서 회복 사역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수사에 능통한 열정적인 설교자 아볼로를 만났다. “그는 성경에 능통하고 주의 도를 열심히 말하였으나 요한의 세례만 알더라”(행 18:25). 그들은 그를 따로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히 풀어 설명하였다”(행 18:26). 이렇듯 이미 신앙을 가진 자라도 복음의 핵심을 오해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는 아볼로처럼 열심히 봉사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보다 ‘자기의 헌신’을 신앙의 근거로 삼는 신자들로 가득하다. 구원 상담은 그들의 믿음을 ‘행위 중심’에서 ‘은혜 중심’으로 돌려세운다. 복음의 개인화는 단순한 전도가 아니라, 기존 신앙을 확증하고 재조명하는 과정이다.
두 강도가 예수와 함께 달렸다. 한 사람은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라고 조롱했고, 다른 강도는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합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1)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 23:43)
이보다 짧고 순수한 구원 상담은 없을 것이다. 그는 교리도, 세례도, 봉사도 없었다. 회개를 강요받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자기 언어’로 고백했다. 복음이 개인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 그곳이 바로 구원의 현장이 된다.
구원 상담은 교회의 심장 박동을 회복하는 사역이다. 한 사람의 영혼을 붙들고, 그가 죄의 실체를 직면하며, 하나님의 은혜 앞에 무릎 꿇게 하는 일이다. 그곳에서는 복음의 생명력이 흐른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눅 19:10) 예수의 사역은 수천 명의 군중보다 한 사람의 니고데모, 한 여인, 한 강도와의 대화 속에서 완성되었다.
오늘의 교회가 ‘한 사람의 구원 상담’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예배와 프로그램을 가져도 복음의 맥박은 멈출 것이다. 구원 상담은 복음으로 생명을 살리는 교회의 심장 제세동기다. 그 자리에서 인간은 새로운 영으로 다시 깨어나고, 하나님은 사랑을 선언하신다.
구원 상담은 성령이 일하시는 현장을 함께 목도하는 자리다. 우리는 설득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한 사람 안에서 피어나는 순간을 지켜보는 동행자다. 구원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복음이 삶으로 번역되어 내 이야기로 개념 정리되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영접 상담이나 확신 점검 상담을 멈추고, 구원의 복음을 들고 영혼을 독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의 언어로 복음을 전하고, 그의 이야기 안에서 성령의 역사를 기다려야 한다. 구원 상담은 영혼을 구원의 문으로 초대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다.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인천성산교회 홈페이지: http://isungsan.net
인천성산교회 l 인천이단상담소(상담 및 문의): 032-464-4677, 465-4677
인천성산교회 유튜브: www.youtube.com/@인천성산교회인천이단
인천성산교회 고광종 담임목사 유튜브: https://www.youtube.com/@tamidnote924
인천성산교회 주소: 인천광역시 남동구 서창동 장아산로128번길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