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성경] 50화, 회심준비론, 우리가 사랑한 건 복음이 아니라 눈물
청년 시절,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라는 책으로 독서토론을 했던 기억이 있다. 처음 그를 만난 순간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는 '대단한 신학자' 정도로 남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교회 강단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이름은 거의 성구(聖句)처럼 읽힌다. '대각성의 아버지', '청교도의 꽃', '지성의 설교자'. 찬사와 경탄이 먼저 나온다.
그의 실체를 안 건, 얼마 안 된 일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개혁신학의 거장'으로 기억하는 우리의 집단 기억은 어디에서 빚어졌는가? 실은 그는 장로교가 아니라 청교도 회중파(Congregationalist) 목사였고, 웨스트민스터가 아니라 사보이 신앙고백(Savoy Declaration)을 따랐다. 우리가 사랑해 온 에드워즈는, 사실 객관적인 복음보다 주관적인 체험을 더 사랑한 사람에 가깝다. 에드워즈를 공개 비판하는 이단전문가 진용식 목사가 지적했듯, 그의 핵심 교리인 회심준비론(Preparationism)은 개혁신학이 아니라 율법적 체험신학이다.
청교도가 정통 개혁신학이라는 오해가 많다. 실은 아니다. 청교도는 하나가 아니었다. 스코틀랜드 장로파, 잉글랜드 장로파, 잉글랜드 회중파, 잉글랜드 침례파 네 갈래로 갈라졌고, 교회론, 권징, 신앙고백이 달랐다. 이 중 회중파는 "회심 간증이 없는 자는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라는 원리를 교회 구조에 박아 넣었다. 장로파가 말씀과 성례의 객관성을 통해 교회를 세웠다면, 회중파는 특정 체험(회심 간증)을 통과의례로 삼았다. 청교도 회심준비론은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기 전에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구원을 준비하게 하신다는 것으로, 그 시작은 복음이 아니라 율법 선포, 율법 준수였다. 에드워즈는 바로 그 회중파의 대표적 신학자였다. 그에게 붙은 '개혁신학자'라는 호칭은, 말하자면 역사적 오독이다.
회심준비론는 한 마디로 회심을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교리다. 그 준비는 율법의 행위, 선행(불우이웃돕기), 죄에 대한 각성이다. 심지어 영적 각성인 두려움은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느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회심준비론의 계보는 계보는 청교도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윌리엄 퍼킨스, 회중파 신학의 체계수립자인 토머스 셰퍼드, 최고의 청교도 신학자였던 존 오웬, 청교도의 꽃을 피웠다는 조나단 에드워즈로 이어진다. 퍼킨스는 율법적 죄책감의 필요를, 셰퍼드는 회심을 심리 단계(죄책→절망→각성→회심)로 세분화했다.
에드워즈는 여기에 결정적 한 줄을 덧댔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래서 율법을 먼저 선포하고, 죄의 공포를 깊게 만들며, 선행·구제·경건훈련을 회심의 수단으로 권했다. 심지어 '두려움의 깊이'가 깊을수록 참된 회심에 가깝다고 설교했다. 그의 유명한 설교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든 죄인들’은 이 구조를 응축한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롬 10:17)라고 말하는 성경의 구원 질서와 정반대 방향으로 흐른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잘 아는 존 번연은 회중주의적 침례파 목사였다. 그는 회심준비론을 문학으로 각색한 인물이다. 그의 책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은 죄의 짐을 이고 두려움과 공포를 통과해 좁은 문을 지나 십자가에 이른다. 이 여정은 말씀을 듣는 즉시 믿음으로 옮겨지는 복음의 즉시성(요 5:24)보다, 율법의 자극과 감정의 고조를 전제한다. 존 번연은 복음이 아니라, 회심준비론을 서사로 쓴 사람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천로역정>을 복음 교재처럼 소비하는 것은 에드워즈의 체험신학을 비판 없이 수용한 대표적 사례다.
1730~40년대 대각성운동은 역사책에서 '성령의 부흥'으로 기록되지만, 당대 보고를 들여다보면 풍경이 다르다. 사람들은 울부짖고, 쓰러지고, 떨고, 실신했다. 많은 이는 황홀경을 체험했고, 어떤 이는 "몸이 쇠약해져 움직일 수 없다"라고 증언했다. 이렇듯 회심의 체험은 황홀경, 입신(쓰러짐), 울부짖음(웃음), 기절과 발작 등으로 찾아왔다. 에드워즈는 이를 '성령의 표징'이라 주장했지만, 열매는 어둡고 무거웠다. 그의 사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회심 후 만성적 우울과 죄책감 속에 29세에 요절했고, 그 곁을 지키던 딸 제루샤도 19세에 죽었다. 그의 이모부는 극심한 불안과 광증 끝에 칼로 목을 그었다. 아내 사라도 우울증 약을 복용했다.
복음이 아닌 체험에 근거한 회심을 주장하는 그의 교리를 추종하는 교인들이 겪은 악순환은 이런 흐름이었다.
율법의 두려움 → 황홀경 → 회심 불확신 → 우울증 → 자살 or 병세 악화 → 사망
본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일기에 따르면, 우울증을 겪었으며 천연두 예방접종 후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이 비극을 개인의 성향 탓으로 돌릴 것인가, 아니면 신학이 만든 감정의 굴레로 볼 것인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에 대해 좀 더 얘기해 보자. 그는 에드워즈의 사위이자 제자였다. 브레이너드의 죽음 2년 뒤, 에드워즈는 그의 일기와 편지를 엮어 출간했다.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라는 책이다. 여기에 그의 회심 체험이 생생하게 묘사된 부분이 등장한다. 진용식 목사는 우스갯소리로 "우울증에 걸리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라"고 말하기도 한 바 있다.
이 책에 "나에게 울화가 치밀게 한 또 다른 점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점이었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브레이너드는 에베소서 2장 9절 말씀을 "온전히 영접하고 행할 때 하나님은 구원을 주신다"라고 왜곡하며, "내가 해온 많은 선행이 쓸모없는 일이었다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라고 했다. 이 책은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가 큰 감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브레이너드는 청교도 신학과 감리교 신앙을 잇는 사상적 다리 역할을 한 셈였다. 정통 개혁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 책을 교과서처럼 열독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에드워즈의 목회 현장은 교회 분열과 회원 제한 정책(회심 간증 없이는 성찬 참여 제한)으로 흔들렸고, 그는 결국 자기 교회에서 쫓겨났다. 고별 설교에서 그는 "심판 날에 23년의 목회 동안 그들이 나를 어떻게, 목사 아버지와 자녀들을 어떻게 대우했는지 결산해 봐야 한다"라고 말했지만, 냉혹한 사실은 그의 교회가 그의 신학을 견디지 못했다는 것이다. '부흥'의 결과가 확신과 화평이 아니라 불안과 분열이었다면, 우리는 이름표를 바꿔 달아야 한다.
회심준비론의 순서는 율법 → 감정 → 은혜다. 반면 성경의 구원 질서는 은혜 → 믿음 → 행위(열매)다. 사도들은 율법으로 공포를 조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를 전했을 뿐이고(행 2:13), 성령은 그 말씀을 통해 택자를 살리셨다. 그래서 바울은 묻는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2)
회심은 체험이 아니라, 복음의 선포와 성령의 적용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건이다. 고넬료는 구제와 기도로 경건했으나, 구원은 베드로의 복음을 들을 때 임했다(행 10장). 구제는 준비가 아니고, 선행은 조건이 아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롬 3:20). "내 말을 듣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것이 개혁신학의 심장이다.
에드워즈 사후, 회중파 교회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유니테리언(Unitarian, 하나님의 단일신론)으로 대거 이동했다. 감정의 체험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순간, 믿음은 더 이상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마음의 그림자에서 시작된다. 회심준비론이 즉각 유니테리언을 낳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체험 중심 신앙이 교리의 보루를 무너뜨리는 구조적 취약성을 초래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신학은 결국 열매로 판정된다(마 7:16). 이후 유니테리언이 자유주의를 낳고, 자유주의가 보편구원론을 낳는다.
20세기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는 에드워즈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 칭송하며, 성령세례 이원론(중생 이후 별도의 강렬한 확신 체험)을 주장했다. 이것은 회심준비론의 구조인 '말씀 + 별도의 강렬한 체험'을 현대 복음주의의 표준으로 재포장한 셈이다. 한국교회는 이 통로를 통해 다시 체험신학을 들여와서 부흥회, 간증 문화, 체험 기독교를 강화했다. "느끼지 못하면 믿지 못한 것 같다"라는 감정 절대주의가 이렇게 굳었다. 오해가 많은데, 마틴 로이드 존스는 개혁주의자가 아니라, 회심준비론을 부흥주의로 재포장한 인물이었다.
우리는 에드워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종교적 감정을 사랑한다. 울어야 회개한 것 같고, 쓰러져야 성령이 임한 것 같다. 다음의 오해가 그 사랑을 지탱한다.
① 그는 개혁신학자다 → 회중파 체험신학자다.
② 대각성은 성령의 부흥이다 → 집단 감정의 폭발이었다.
③ 그의 신학은 은혜 중심이다 → 준비된 자에게 주는 은혜라는 '노력구원론'이다.
④ 회심은 체험이다 → 회심은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일으키는 새생명이다.
⑤ 회심준비는 경건훈련이다 → 구원의 조건처럼 작동하는 율법주의다.
⑥ 그의 목회는 열매가 풍성하다 → 분열·추방·우울·자살의 쓴 열매가 있었다.
⑦ 그의 후예는 개혁주의를 계승한다 → 유니테리언으로 교리 붕괴가 이어졌다.
⑧ 느껴야 신앙이다 → 성경은 '듣고 믿음'(갈 3:2, 롬 10:17)을 말한다.
결정적 질문은 이것이다. "복음은 무엇이 먼저인가?" 회심준비론은 인간의 준비를, 성경은 하나님의 선물을 먼저 둔다. 복음은 인간 감정의 온도계로 측정되지 않는다. 에드워즈가 회심 후에도 확신이 없다고 고백한 건, 복음이 아니라 체험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이는 우울증으로 이어질 뿐이었다. 회심은 복음이 선포되는 순간, 성령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이다. 은혜 → 믿음 → 행위(열매). 이것이 성경이 그리는 구원의 설계도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 3:20)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 10:17)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1~5)
이 증거들은 하나의 선언으로 모인다. 회심은 준비가 아니라 선물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에드워즈를 사랑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사랑은 복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체험을 사랑한 우리의 자기애였을지 모른다. 한국교회가 지금 필요한 대각성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진리의 회복, 복음의 재건이다. 부흥은 울음의 데시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단순한 신뢰에서 시작한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제, 우리는 고백해야 한다. 복음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며, 회심은 준비가 아니라 은혜의 사건이다. 부흥은 체험의 과잉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그 고백이 시작되는 곳에서, 한국교회는 비로소 에드워즈를 넘어 복음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오해의 장막을 걷고 기쁨의 확신인 사랑, 희락, 화평(갈 5:22)을 다시 배울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성령의 참 표징이니까.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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