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성경] 59화, 복음 + α = 다른 복음, 15가지 다른 복음
복음 + 아무것도(nothing) = 복음
복음 + 무엇이라도(anything) = 다른 복음
밤바다를 건너는 배가 등대에 기대는 까닭은, 등대가 화려해서가 아니라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등대에 네온사인을 달고 있다. 더 환하게, 더 눈부시게 보이도록. 더 감동적이고, 더 실용적이고, 더 쓸모 있어 보이도록. 유튜브 알고리즘은 3초 안에 승부를 건다. 클릭하지 않으면 죽은 콘텐츠다. 교회 강단도 마찬가지다. '구독'과 '좋아요'가 은혜의 척도가 되어버렸다. SNS의 짧은 문장과 교회 강단의 긴 설교가 같은 리듬으로 호흡할 때, 사람들은 복음을 "도움 되는 메시지"로 소비하고, 출판 시장은 그 취향에 맞춰 "믿음의 꿀팁"을 쏟아낸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 흐름의 초입에서 이미 외쳤다.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6~9). 저주. 그 단어 앞에서 우리는 잠시 멈춰야 한다. 복음은 완성된 선언이지, 인간이 추가할 옵션이 아니다. 복음은 완전하기에, 더하는 순간 진리를 잃는다. 이것이 핵심이다.
"복음은 하나이며, 변형될 수 없다." 이것이 성경의 목소리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복음은 없다"(갈 1:69)라고 단언하며, 고린도후서에서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고후 11:34)을 경계한다. 유다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우라"(유 1:3)라고 권하고, 요한계시록의 종결부는 "이 예언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면 재앙을 더하고 생명나무에서 그 이름을 제거한다"(계 22:18~19)라고 경고한다. 모세도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가감하지 말라"(신 4:2)고 못 박는다.
성경의 논리는 수학 공식처럼 명료하다. '복음+α'의 본질은 하나님의 완전한 선언을 인간의 불완전한 시도로 바꾸는 일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순수성은 신학의 옵션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심장이다.
"복음이 왜곡되는 모든 지점에는 인간이 서 있다." 이 장은 본문 핵심이다. 15가지 왜곡을 다섯 축으로 묶어 살핀다. 공통분모는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의 이동이다.
복음 + 체험 = 신비주의
지금 어느 예배당에선 향기가 흐르고 금가루가 떨어진다고 한다. 누군가는 "방금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말한다. 체험은 은혜의 열매일 수 있으나, 복음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베드로를 보라. 그는 변화산에서 눈부신 그리스도를 목격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어지던 그 순간을.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겐 더 확실한 예언(기록된 말씀)이 있다"(벧후 1:19). 요한은 "영들을 시험하라"(요일 4:1)라고 명령한다. 느낌이 기준이 되는 순간, 복음은 감정의 종이 되고, '다른 영'(고후 11:4)이 진리의 언어를 흉내 낸다.
복음 + 은사 = 은사주의
"방언 못하면 성령 못 받았습니다." "불 받으라!"라는 구호 아래 사람들은 줄줄이 쓰러진다. 그러나 성령의 주된 사역은 그리스도를 비추는 일(요 16:14)과 말씀을 조명하는 일이다. 바울은 은사의 목적을 "각 사람에게 성령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고전 12:7)이라 했고, 사랑과 질서(고전 13~14장)를 기준으로 세웠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쓴다. "내가 예언하는 것도 못하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고전 13:2, 의역). 은사가 복음의 증거가 되는 순간, 복음은 은사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복음 + 새로운 계시 = 신사도운동
어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스스로를 '오늘의 사도'라 칭하며 성경에 없는 가르침을 선포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완성되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유 1:3)은 더 보태거나 뺄 수 없다(계 22:18~19). 예언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의 빛에 비추어 검증받는 인도(고전 14:29, 살전 5:20-21)이지, 성경과 동등한 공적 계시가 아니다. 기록된 말씀 위에 또 다른 율법을 세우는 순간, 복음은 끝없이 업데이트되는 체크리스트로 변한다.
복음 + 인간 의지 = 인본주의/알미니안 극단
"손을 들고 결단하면 구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같은 복음 앞에서 수십 번 재결단을 한다. 왜? 확신의 근거가 그리스도의 약속에서 내 결심의 온도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라고 하셨고, 바울은 구원이 "원하거나 달음질하는 자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롬 9:16)께 달렸다고 했다. 믿음은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신 선물이다(엡 2:8~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렇게 선언한다. "하나님께서 효과적으로 부르신 사람들을… 그의 능력과 은혜로 영원히 보존하신다"(17장 1절). 구원은 내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복음 + 성공 = 번영신학
"씨앗 백 배" 공식으로 헌금을 투자 상품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자녀를 재벌 2세처럼 포장한다. 십자가는 감춰지고 성공 스토리만 전면에 나선다(고전 1:18). 디모데전서 6장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자들"을 엄중히 경고한다(딤전 6:5~10). 바로 이 대목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라는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은 우리를 행복보다 거룩으로 부르신다(벧전 1:15~16). 고난과 영광의 순서가 뒤바뀌면, 복음은 재테크 비법이 되고, 하나님은 소원을 들어주는 우상이 된다.
복음 + 자기계발 = 긍정사고신학
성경은 성공의 원리 및 지침서가 되고, 예배는 동기부여 세미나가 된다. "네 안의 위대함을 깨워라." 그러나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 15:5)라고 하셨다.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한다"(롬 7:18)라고 고백한다. 복음은 "내 꿈 이루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이루기"다. 자기계발은 유익할 수 있으나, 십자가를 대체할 수는 없다. 주님이 부르신 것은 '더 나은 나'가 아니라 '죽은 나'다(갈 2:20).
복음 + 율법 = 율법주의
규칙은 필요하다. 하지만 율법은 거울이지 비누가 아니다(롬 3:20). 거울은 얼굴의 때를 보여주지만, 때를 씻어내지는 못한다.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아니하고구원받는 것과 거룩하게 사는 것을 뒤섞는 순간, 은혜는 내 노력으로 바뀐다. '믿음으로'(갈 2:16).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엡 2:10) 존재다. 순서를 보라. 선한 일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결과다.
복음 + 도덕 = 도덕복음주의
"착하게 살면 그리스도인." 물론 선행은 귀하다. 그러나 예수는 본보기 이전에 구주이시다. 도덕이 복음을 대체할 때, 십자가는 감동적인 인생 교훈으로 축소된다. "의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갈 2:21), "구원은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며"(딛 3:5). 도덕은 복음의 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거울이지, 태양 자체가 아니다.
복음 + 심리 = 치유복음
죄는 '아픈 기억'으로, 회개는 '나 사랑하기’나 ‘셀프 힐링' 정도로 바뀐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소중해요." 맞는 말이지만 불충분하다. 중풍병자에게 예수는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라고 선언하셨다. 치유가 아니라 죄 사함이 먼저였다. 근본 문제는 죄, 근본 해법은 대속이다(벧전 2:24, 롬 3:23~24). 심리는 도울 수 있으나, 구원하지 못한다. 치유는 복음의 열매이지, 복음의 대체물이 아니다.
복음 + 정치 = 정치복음주의
예배당이 선거 연단이 되고, 강단은 정책 홍보대가 된다. 그러나 주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니라"(요 18:36)라고 하셨다. 제자들이 국가의 회복 시점을 묻자, 주님은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증인이 되리라"(행 1:8)로 화제를 돌리셨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 3:20). 공적 참여는 필요하지만, 복음의 보편성을 이념의 배타성 아래 둘 수 없다. 교회는 어느 정당의 지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대사관이다.
복음 + 이념 = 사회복음/해방신학/민중신학
진보는 "죄는 시스템 문제"라 말하고 구원을 사회 변혁으로 바꾸며, 보수는 구원을 현 체제 유지로 착각한다. 복음은 왼편도, 오른편도 아니다. 복음은 그 위에 있다. 복음보다 좌우 이념이 먼저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복음은 먼저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회복을 선포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롬 3:23~24).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라고 하셨다. 정의와 인권을 복음보다 앞세우는 순간, 우리는 예수보다 윤리, 십자가보다 도덕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또 다른 율법이다.
복음 + 민족 = 기독교 민족주의
"우리 민족은 제2의 이스라엘." 십자가가 태극기에 흡수되는 순간, 복음은 보편성을 잃는다. 하나님은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며(행 10:34~35), 보좌 앞의 무리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계 7:9)에서 나온다. 나라는 사랑하되, 숭배하지 말라. “나라가 있고 교회가 있다” 아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국가의 권세도 주셨다(롬 13:1). 교회는 영원하지만(마 16:18), 나라는 흥하고 망한다(단 2:21). 우리의 시민권은 먼저 하늘에 있고(빌 3:20), 그다음 땅에 있다."
복음 + 철학 = 자유주의 신학
"부활은 상징, 기적은 신화." 이성의 법정에서 계시는 늘 피고석에 앉아 '합리성'의 무죄 판결을 기다린다. 그러나 "부활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며"(고전 15:14~19), "철학과 헛된 속임수"(골 2:8)를 조심하라고 권한다. 믿음은 비이성(非理性)이 아니라 초이성(超理性)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세상의 지혜를 부끄럽게 하신다(고전 1:21~25).
복음 + 문화 = 문화복음주의
공연형 예배가 일상이 되고, 감동이 진리를 대체하는 순간, 회개와 순종은 엔터테인먼트로 밀려난다. 바울은 "귀가 가려워 자기의 사욕을 따라 스승을 많이 두고" 신화를 좇는 때를 경고한다(딤후 4:3~4).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이다(요 4:24). 문화는 도구, 복음은 내용이다. 감동은 증언이 될 수 있어도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복음 + 이성/과학 = 합리주의 신학
"믿어지는 것만 믿는다." 창세기는 신화, 기적은 오해가 된다.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다. 이성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도구지만, 계시의 우위 아래 봉사해야 한다. 계시는 검증 대상이 아니라 수용 대상이다.
"모든 이단은 복음에 인간을 더한 신앙이다." 신비주의는 '내가 느낀' 하나님, 율법주의는 '내가 이룬' 의, 이념복음은 '내가 세울' 세상, 자기계발복음은 '내가 되는' 하나님을 말한다. 바울의 언어로 바꾸면 "그들의 신은 배요"(빌 3:19). 배-배부름-자기중심. 복음의 주어는 언제나 하나님인데, 다른 복음의 주어는 언제나 나다.
'하나님을 위해'라는 포장 아래 실상은 '나를 위해'의 종교가 작동한다. 주어가 바뀌는 순간, 예배는 섬김이 아니라 자기만족이 되고, 확신은 약속이 아니라 기분이 된다. 그때 하나님은 우상으로 대체된다. 내 욕망을 합리화해 주는 거룩한 포장지로.
덧셈은 은혜를 더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빼 버린다. 복음의 단순함은 복잡한 규칙과 체험 경쟁으로 변질된다. 십자가 중심은 인간 성취 중심으로 이동한다. 교회는 은혜의 공동체에서 영적 소비자 집단으로 바뀐다. 무엇보다도 구원의 확신이 하나님의 약속에서 내 감정과 성과로 이동한다.
그래서 바울은 못을 박는다.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나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그러므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복음은 '완성된 등식'이다. 복음 + α는 언제나 '은혜 – α'가 된다. 복음은 더할수록 약해지고, 비울수록 강해진다.
복음은 상품이 아니라 선언이고, 우리는 개선자가 아니라 증언자다. 교회의 사명은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개혁의 다섯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Sola Scriptura(오직 성경), Sola Fide(오직 믿음), Sola Gratia(오직 은혜),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
등대는 늘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는다. 복음도 그렇다. 더하지 말라. 가감하지 말라. 그리하면 복음은 스스로 빛난다. 그 빛이 길 잃은 우리를 다시 항로로 이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알게 된다. 복음 + 아무것도(nothing) = 복음, 복음 + 무엇이라도(anything) = 다른 복음. 복음은 완전하다. 복음에 무엇을 더하는 순간, 은혜는 사라진다. 복음은 덧셈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성이다.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인천성산교회 홈페이지: http://isungs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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