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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의 이 책 읽어도 될까요?

[궁금했성경] 60화, 신앙적 뿌리를 모르면, 감동도 함정이 된다

by 허두영

책보다 먼저, 복음


밤의 서재는 조용하다. 표지가 반짝이는 베스트셀러들이 나를 불러 세운다. "위로받고 싶지 않니? 더 나은 네가 되고 싶지 않니?" 책들은 달콤하다. 하지만 달콤함이 늘 안전한 건 아니다. 바울은 달랐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여기엔 협상의 여지가 없다. 복음은 이미 완성된 하나님의 선언이다.


복음 + 아무것도(nothing) = 복음

복음 + 무엇이라도(anything) = 다른 복음


이 두 줄짜리 공식이 서재의 모든 책을 판단한다. 이 렌즈로 눈을 씻듯 닦으면, 책은 다르게 보인다. 감동은 남고 혼합은 걸러진다. 우리가 무심코 넘기는 문장 하나가 영혼의 방향을 틀 수 있다. 때론 지옥으로 인도하는 지침서가 책장 한쪽에 꽂혀 있을 수도 있다. 여기서는 분별해야 할 네 부류의 작가를 해부한다. 그들의 신앙적 뿌리를 더듬고, 복음이 어디서 빛나고 어디서 가려지는지 확인한다.


1. 책은 작가의 신앙을 닮는다


작가의 문장은 고백이다. 신앙은 작품의 뿌리에서 수액처럼 올라와 문장마다 스며든다. 그래서 신앙적 뿌리를 모른 채 감동만 삼키면, 어느 순간 복음의 구조(죄–십자가–부활–회개–믿음–성령–성화)가 감성·체험·이념에 잠식된다. 성경은 "단번에 주신 믿음"(유 1:3)을 지키라고 명령한다. 책을 읽는 일은 '정보 섭취'가 아니라 '예배의 방향'을 선택하는 일이다.


2. 복음 + α = 변질된 독서


복음은 더하는 순간 약해지는 이상한 진리다. 복음 + 체험 = 신비주의, 복음 + 성공 = 번영신학, 복음 + 이념 = 정치복음, 복음 + 심리 = 치유복음…. 공식은 늘 같다. 하나님 중심의 구원이 인간 중심의 종교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감동을 얻고 복음을 잃는다. 네 부류의 작가, 네 가지 읽기의 위험을 신앙적 뿌리, 대표 저작, 문제 지점, 분별 포인트의 순서로 파헤쳐 본다. 분별력 있는 독서를 위한 지표가 되길 바란다.


3. 네 부류의 작가, 네 가지 읽기의 위험

- 감동과 복음 사이,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경계선


책은 늘 매혹적이다. 어떤 책은 눈물을 흘리게 하고, 어떤 책은 세상을 새롭게 본다며 가슴을 뛰게 한다. 그러나 복음주의자의 서가에서는 언제나 이 질문이 앞서야 한다.

"이 감동은 복음으로부터 온 것인가, 아니면 복음을 흉내 낸 감정인가?"


성경은 말한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갈 1:7). 그럼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복음에 '무엇인가'를 더하고 싶어 한다. 더 감동적인, 더 체험적인, 더 실용적인 무언가를. 그 결과 수많은 작가들이 '복음의 언어'를 빌려 세속적 메시지를 포장하고, 교회 안팎의 독자들은 그 감동에 젖어들며 어느새 중심을 잃는다.


정통 복음주의·개혁주의의 관점에서 네 부류의 작가들을 살펴본다. 그들의 신앙적 뿌리, 핵심 메시지, 그리고 복음의 구조와 긴장되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짚는다. 목적은 단 하나다. 감동은 취하되, 복음의 중심을 지키는 분별력을 세우기 위함이다.


① 부분적 복음·혼합 경향 - "감동은 진짜이나, 중심이 흔들릴 수 있다"


먼저 소개할 부류는 교회 안에서도 널리 읽히고, 목회자 설교에도 자주 인용되는 작가들이다. 디트리히 본회퍼, C.S. 루이스, 헨리 나우웬, 릭 워렌, 맥스 루케이도, 유진 피터슨, 필립 얀시.

그들은 복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예수를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복음의 언어'가 다른 신학적 전제 위에 서 있을 때 발생한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루터교 신학자이자 반(反)나치 저항자였다. 《나를 따르라》에서 그는 "값싼 은혜를 버리고, 값비싼 은혜를 좇으라"라고 외쳤다. 이 문장은 교회의 타락을 경고한 명언이지만, 동시에 미묘한 신학적 긴장을 품고 있다. '값비싼 은혜'가 마치 '은혜를 얻기 위한 순종의 대가'로 읽힐 때, 은혜는 더 이상 선물이 아니다. '은혜 + 순종 = 구원'이라는 공식은 어느새 '복음 + 조건'으로 변질된다. 바울이 "일하지 아니할지라도 믿는 자에게 의를 여겨 주신다"(롬 4:5)라고 선언한 그 칭의는 법정에서 떨어지는 판결이다. 노력이 아니라 선언이다. 본회퍼의 제자도 안에서는 이 선언이 실천의 도덕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우리는 그의 도덕적 결기를 존경하되, 복음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C.S. 루이스는 또 다른 의미의 함정을 보여준다. 《순전한 기독교》나 《나니아 연대기》는 전 세계 독자들에게 신앙의 상상력을 일깨웠다. 그러나 루이스는 성공회 신자로서, 보편구원적 사유와 상징적 신학에 기울어 있었다. 《순전한 기독교》의 말미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르더라도, 선한 의지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 표현은 아름답지만, 행 4:12의 선언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느니라"와는 정면으로 대립한다. 루이스의 인문주의는 감동적이지만, 그 감동을 '복음'이라 부르기엔 위험하다. 그의 책은 철학적 '입구'로는 훌륭하되, '신학적 종착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헨리 나우웬 역시 그 경계선 위에 서 있다. 《상처 입은 치유자》와 《귀향》은 인간의 내면을 다루는 탁월한 영성서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가톨릭 관상 전통과 심리학의 융합 위에 세워져 있다. 죄를 '치유가 필요한 상처'로 축소하면, 복음의 중심인 형벌적 대속은 '내면의 회복'으로 대체된다. 성경은 죄를 상처가 아니라 반역으로 본다(롬 3:23). 죄는 아픈 것이 아니라 배신한 것이다. 나우웬의 글은 감정의 어루만짐을 주지만, 그 위로가 '회개를 통한 구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심리학적 평화에 머문다.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은 말 그대로 전 세계를 뒤흔든 '21세기형 복음서'였다. 그러나 그 복음은 성경의 복음이 아니라, '자기 의미를 발견하는 인생 가이드'에 더 가깝다. 그는 "당신은 의미 있게 창조되었다"라고 강조하지만, 죄와 구속의 서사는 배경으로 밀린다. 목적은 복음의 열매이지, 복음의 본질이 아니다.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찾는 과정에서 '나 중심 신앙'이 강화된다면, 그것은 결국 복음 + 자기실현의 덫이다.


맥스 루케이도의 《예수님처럼》 같은 책을 읽으면 따뜻한 위로가 밀려온다. 하지만 그의 문체 안에는 '십자가의 무게'보다 '하나님의 포용력'이 더 크게 부각된다. 복음은 위로를 포함하지만, 위로가 복음을 대체할 때 십자가는 심리적 상징으로 약화된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도 비슷한 긴장을 가진다. 그는 성경을 현대어로 번역해 독자에게 친밀하게 다가갔지만, 그 의역 과정에서 '칭의'나 '진노' 같은 신학적 용어가 누그러졌다. 진리를 부드럽게 번역하는 순간, 복음의 날카로움은 무뎌진다.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수많은 상처 입은 신앙인들에게 은혜의 의미를 회복시켰다. 하지만 그가 그리는 은혜는 종종 '무조건적 수용'으로 읽힌다. 바울은 "은혜가 죄에 거할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롬 6:1). 은혜는 죄를 덮는 담요가 아니라, 죄를 죽이는 불꽃이다. 얀시의 따뜻한 은혜를 받아들이되, 그 안에 숨은 '거룩의 긴장'을 잃지 말아야 한다.


② 정통 복음주의 - "동맹자이지만, 균형을 잃으면 무거워진다"


다음은 '정통 안의 강경파'라 불릴 만한 인물들이다. 폴 워셔, 팀 켈러, 마틴 로이드 존스.

그들은 모두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 칼을 들었지만, 때로 그 칼끝이 너무 날카로워 상처를 남긴다.


폴 워셔는 개혁침례교 목사로, "값싼 복음"과 싸운 전사다. 그의 책 《복음》과 《회심》, 그리고 유명한 《Shocking Youth Message》는 청년 세대에게 "너는 진짜 구원받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문제는 그 열정이 때로 '복음의 안식'을 위협한다는 점이다. 그는 "확신은 구원의 본질이 아니라 열매"라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이 "열매가 없으면 구원도 없다"는 불안으로 이어질 때, 복음은 다시 '행위의 저울'에 올려진다.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라고 선언했다. 구원의 확신은 열매이기 전에 은혜의 증거다. 폴 워셔의 칼은 거룩을 수호하지만, 그 칼로 자신의 믿음을 베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팀 켈러는 뉴욕의 도시 한복판에서 복음을 변증한 지성인이다. 《탕부 하나님》은 탕자 이야기로 은혜의 중심을 탁월하게 풀어냈다. 그러나 그의 공공신학과 사회정의 담론은 때때로 '복음 + 이념'의 균형 위에서 흔들린다. 켈러의 사회참여적 언어가 '복음의 열매'로 이해된다면 문제없지만, 그것이 '복음의 본질'로 오인되면 사회복음주의의 길로 빠진다. 복음은 사회를 바꾸지만, 사회개혁이 복음은 아니다. 켈러의 탁월함을 읽되, 언제나 십자가가 그 중심에 남아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강해 설교의 거장'으로 불린다. 그의 《로마서 강해》는 성경신학의 교과서와 같다. 그러나 말년의 《성령론》에서는 오순절적 체험에 가까운 '성령 세례' 개념을 언급했다. 그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했지만, 그 진술이 '구원 이후의 제2단계 체험'으로 오독될 가능성을 남겼다. 성령은 새 계시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주신 말씀을 비추는 조명자다. 진정한 성령 체험은 새로운 환상이나 언어가 아니라, 말씀을 새롭게 사랑하게 되는 변화다.(요 14:26)


③ 문학·자기계발 - "아름답지만, 구원하지는 않는다"


세 번째 부류는 복음의 언어를 빌린 문학과 자기계발의 작가들이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빅토르 위고, 헤르만 헤세, 파울로 코엘료, 노먼 빈센트 필. 그들은 인류의 도덕적 양심을 깨웠으나, 복음의 대속적 진리를 증언하진 못했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사랑을 최고의 도덕으로 그렸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결심'이다. 예수는 그에게 도덕 교사일 뿐, 구속자는 아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죄를 누구보다 깊이 그렸다. 그러나 그의 구원론은 '고난 속 자기정화'에 가깝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문학적 상징으로만 남는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인류의 양심을 깨운 위대한 서사지만, 그 은혜는 '인간성의 승리'이지, '하나님의 구속'은 아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신을 찾는 인간의 여정이 아니라, '신이 되어가는 인간'의 신화다. "내 안의 신성"을 깨닫는 순간, 복음은 범신론으로 희석된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는 "우주가 너를 돕는다"라는 문장으로 대표된다. 그러나 우주는 구원하지 않는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행 4:12)


노먼 빈센트 필의 《긍정적 사고의 힘》은 더 직접적이다. 그는 "믿으면 이루어진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그 믿음은 신앙이 아니라 자기 암시다. 성경적 믿음은 '무엇이든 가능하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이다.


이 모든 문학과 자기계발의 메시지는 인간의 가능성을 노래한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무능에서 시작한다. 그 차이를 모르면, 우리는 감동을 복음으로 착각한다.


④ 정식 이단 - "복음의 구조 자체가 붕괴된 경우"


마지막 부류는 '복음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복음의 구조 자체를 무너뜨린 사람들이다.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왓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지방교회' 운동을 주도하며, 혼·영 삼분설과 신인합일을 주장했다. 그들의 저작은 성경 공부 자료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 근본에는 '하나님의 확장'이라는 위험한 사상이 깔려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경계가 흐려질 때, 창조주와 피조물의 질서가 무너진다.(사 43:10) 엘렌 G. 화잇의 제칠일안식일 운동은 '율법 + 은혜'의 협력 구조를 만든다. 구원이 행위와 협력의 결과가 되면, 복음은 무너진다.(롬 11:6) 여호와의 증인의 창시자 찰스 테이즈 러셀은 삼위일체와 예수의 신성을 부정했고, 몰몬교의 조셉 스미스는 '새로운 계시'를 성경과 동등한 권위로 세웠다. 윌리엄 브랜햄은 신사도운동의 원형을 만들며, 자신을 새 선지자로 주장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성경 외의 새 계시를 인정한다"는 것. 계시의 종결(계 22:18~19)을 부정하는 순간, 모든 이단은 태어난다.


이처럼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거나 오해하는 다양한 흐름들이 존재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언제나 복음의 순수성과 중심을 지키는 것이다. 복음은 인간의 노력이나 철학, 감동적인 이야기로 대체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된다. 이러한 기준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흔들림 없이 진리를 붙잡을 수 있다.


4. 감동보다 진리, 문학보다 복음


좋은 문장은 영혼을 어루만지지만, 죄를 사하지는 못한다. 복음은 감동의 최대치가 아니라, 구원의 유일한 길이다. “그럼, 어떤 책을 읽으라는 거야?”하고 물음이 생길 것이다. 복음 서적을 고르는 기준이 궁금한가? 독서의 영성은 세 가지 질문으로 측정된다.


1) 뿌리: 이 작가의 신앙은 어디에서 올라오는가? 작가의 신앙 뿌리와 교단을 확인하라.

2) 구조: 이 책은 죄–십자가–부활–회개–믿음–성령–성화가 명확히 존재하는가?

3) 결과: 감동이 나를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가, 나를 나에게 감탄하게 하는가? 쉽게 말해 나를 높이는가, 그리스도를 높이는가 봐야 한다.


5. 복음 중심 독서의 황금률


복음으로 시작하라. 글을 펼치기 전, 십자가를 마음에 세워라.

복음으로 분별하라. 달콤한 문장이라도 복음에 더하면 걸러라.

복음으로 끝내라. 책을 덮을 때, 남아야 할 것은 감탄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다.


이 공식을 잊지 말자.


복음 + 아무것도(nothing) = 복음

복음 + 무엇이라도(anything) = 다른 복음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인천성산교회 홈페이지: http://isungsan.net

인천성산교회 l 인천이단상담소(상담 및 문의): 032-464-4677, 465-4677

인천성산교회 유튜브: www.youtube.com/@인천성산교회인천이단

인천성산교회 고광종 담임목사 유튜브: https://www.youtube.com/@tamidnote924

인천성산교회 주소: 인천광역시 남동구 서창동 장아산로128번길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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