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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징조들은 이미 나타나고 있는가?

[궁금했성경] 68화, 성경에 나타난 지구 종말의 징조들

by 허두영

"이런 일이 일어나거든 인자가 가까이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 24:3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기독교 신앙의 주변부 이야기가 아니다. 종말론은 이단들만 떠드는 소재도 아니다. 재림은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리키는 최종 목적지다. 성경은 창세기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바로 그 순간부터,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시작되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가지를 일관되게 말한다. "그분이 다시 오신다." 누군가에겐 두려운 소리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실은 약속이다.


1. 그날은 알 수 없다


재미있는 건, 성경은 "오신다"라는 확실하게 말하지만 "언제 온다"라는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셨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제자들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 1:6)라고 묻자, 예수님은 친절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 1:7)


2. 왜 때를 숨기셨는가?


그렇다면 왜 때를 숨기신 걸까? 성경은 한 가지를 가리킨다. 깨어 있으라고.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살전 5:2) 도둑은 '몰래' 오는 게 아니라, '예고 없이' 온다. "때와 시기는 모르지만, 그날이 가까이 왔다는 징조는 볼 수 있다." 이 징조들은 세상을 향한 최후통첩이 아니다. 오히려 성도를 향한 위로의 메시지다. "겁내지 마. 내가 곧 간다."


3. 재림 직전의 징조들


이제 성경이 말하는 일곱 가지 징조를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며 일어나리라."(눅 21:10, 마 24:6~7) 전쟁은 인류 역사에서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건 '전쟁 자체'보다 '전쟁의 일상화'다. 사람들은 전쟁 뉴스를 보며 점점 감각을 잃어간다. 폭격 장면도 더 이상 충격이 아니다. 전쟁은 더 이상 예외적인 비극이 아니라 세계의 기본 배경음처럼 흘러간다. 하나님 없이 인간이 유지하려던 문명의 균열이 드러나는 것이다.


둘째, 거짓 평화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살전 5:3) 마지막 시대는 역설적이다. 전쟁과 평화가 공존한다. 전쟁은 계속되고 있는데 사람들은 "괜찮다"라고 말한다. 경제는 성장하고 기술은 편리해지고 의료는 정교해지니, 사람들은 말한다. "이 정도면 우리가 충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성경은 여기에 냉정한 진단을 내린다. 멸망은 "갑자기" 온다. 다시 말해,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이 사실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그 평안이 성령이 주시는 평안인지(요 14:27), 아니면 현실을 외면하려는 마취제인지 분별해야 한다.


셋째, 자연재해와 전염병이다.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전염병)이 곳곳에 있으며…"(눅 21:11) 지구가 흔들리고 있다. 기후 위기는 더 이상 환경 운동가들의 과장이 아니다. 팬데믹은 더 이상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은 이것의 근본 원인을 짚어낸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 8:22) 자연도 인간의 죄 때문에 무너지는 고통을 겪고 있다. 지질학적 격변과 바이러스의 변이는 과학이 설명해 줄 수 있는 현상이지만, 신학은 그 현상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묻는다. 답은 이렇다. 심판과 회복을 향해 간다.


넷째, 지식과 왕래의 폭증이다.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 인터넷, 인공지능, 초고속 이동, 실시간 번역, 글로벌 물류. 이 모든 것은 다니엘서의 예언이 현실이 된 장면이다. 인류는 지금 지식의 홍수 속을 살고 있다. 질문보다 답이 많고, 현상보다 해석이 많다. 그런데 역설이 있다. 지식은 넘쳐나는데 지혜는 사라졌다. 무엇이든 알 수 있는 시대, 그러나 무엇도 확신하지 못하는 시대. 그 빈자리를 누가 채우는가? 거짓 교사들이다.


다섯째, 도덕적 타락과 개인주의의 심화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며…"(딤후 3:12)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덧붙이신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몰랐더니…"(마 24:3739) 핵심은 이것이다. 마지막 시대의 문제는 '노골적인 악'이 아니다. 마지막 시대의 문제는 '영적 무감각'이다. 세상은 전혀 거룩하지 않은데, 사람은 전혀 위기를 느끼지 않는다. 마지막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을 때 온다.


여섯째,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등장한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5)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로써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 2:18) 이단이 어떻게 사람을 끌어들이는지 봐야 한다. 그들은 성경을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을 '독점'하려 한다. "진짜 해석은 우리만 안다." "예수님은 이미 영으로 오셨다." "그분은 내 안에 임하셨다. 나는 그분의 재림이다." 초림과 재림을 교묘하게 섞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초림은 땅에서, 재림은 하늘로부터 오신다고 성경은 분명히 구분했다(살전 4:16, 행 1:11). 그런데 이단은 그 구분을 지운다. 왜? 그래야 인간이 재림주 행세를 할 수 있으니까. 그러므로 분별은 간단하다. “그분은 하늘로부터 직접 오시는가?” 그렇지 않다면, 가짜다.


마지막 일곱째, 복음의 전 세계적 확산이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이것은 중요한 반전이다. 우리는 종말을 어둠으로만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종말의 조건으로 '복음'을 말하신다. 세상의 마지막은 폭력이 아니라 복음으로 닫힌다. 역사의 마지막 문은 심판만으로 닫히는 게 아니라, 복음이 마지막 한 사람에게까지 전해지는 것으로 닫힌다. 다시 말해, 복음 전파는 종말의 증상인 동시에 종말의 사명이다.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은 결국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4. 결론


여기까지 읽고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거죠?" 하지만 성경은 그런 식의 답을 원하지 않는다. 성경은 이렇게 묻는다. "너는 지금 깨어 있는가?" 재림 신앙은 세상 종말의 공포에 떨며 집 안에 비상식량을 쌓아두는 신앙이 아니다. 재림 신앙은 머리를 드는 신앙이다.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눅 21:28) 재림의 징조들은 세상 종말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복음 완성을 향한 부름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소망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계 22:20) 이 고백은 기다리는 사람의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기다림이, 마지막 시대를 사는 성도와 교회의 자세다.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인천성산교회 홈페이지: http://isungs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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