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성경] 67화, 율법의 숫자에서 은혜의 마음으로
십일조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공기가 바뀐다. 설교의 톤이 살짝 낮아지고, 교인들의 시선은 예배당 천장이나 의자 틈새로 향한다. 누군가는 마음이 불편하고, 또 누군가는 '이 얘기 또 시작이군'이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쉰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불편한 단어 속에, 인간의 믿음을 가장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을 숨겨두셨다. 드림은 계산이 아니라 고백이다. 십일조는 돈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가 주인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헌금은 금액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이 어디로 흐르는가를 보여주는 답이다.
하나님은 우리 통장 잔액보다 마음의 주소를 더 오래 보시는 분이다. 십일조는 "하나님, 제 삶의 주인은 당신입니다"라는 선언문이고, 헌금은 "그 주인께 받은 사랑이 이제 흘러갑니다"라는 응답이다. 둘이 만나는 순간, 신앙은 의무에서 예배로 바뀐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던 날, 그는 전리품을 움켜쥐지 않았다. 멜기세덱 앞에 서서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돌려드렸다(창 14:18~20). 전쟁의 결산서가 아니라 주권의 고백서였다. "이 승리는 내 손이 아니라, 주의 손에서 왔습니다."
야곱도 그랬다. 광야의 돌베개 위에서 하늘 문이 열리는 꿈을 꾸고 깨어나 이렇게 서원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반드시 십분의 일을 드리겠습니다."(창 28:22)
거래가 아니라 선언이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자신을 두겠다는 언약적 결단. 십일조는 '세율'이 아니라 '서약서'였다. 10%의 계산이 아니라 100%의 주권을 인정하는 예배였다.
그래서 십일조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십일조는 소유의 10분의 1을 떼어내는 행위가 아니라, 인생의 100%가 하나님께 속했음을 인정하는 신앙 고백이다."
율법의 비율(10%)에서 은혜의 본질(100%)로 건너가는 순간, 십일조는 숫자가 아니라 언약의 언어가 된다. 그 언약은 손끝이 아니라 마음으로 기록된다.
십일조가 하나님을 향한 수직의 고백이라면, 헌금은 사람을 향한 수평의 사랑이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이웃에게 흘러가는 물길. 십일조가 ‘주권의 질서’라면, 헌금은 그 질서를 채우는 ‘사랑의 내용’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후 9:7)
여기서 '즐겨'라는 헬라어는 기쁨이 터져나오는 마음'을 뜻한다. 헌금은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 감사가 넘쳐서 표현되는 언어다. 십일조가 "나는 주인이 아닙니다"라면, 헌금은 "그 은혜가 나로부터 흘러갑니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금 자체보다, 그 헌금이 흘러가는 '은혜의 구조'를 기뻐하신다. 복은 거래가 아니라 관계이다. 헌금은 복을 '사는 행위'가 아니라, 복이 흐르는 자리로 자신을 옮기는 행위다.
교회는 오랫동안 이 '드림'의 문제에서 극단을 오갔다. 한쪽은 율법주의 "명령이니까 내라" 다른 한쪽은 은혜주의 "네 마음이 기쁘면 내라"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은 그 중간이 아니라, 그 위에 있다. 그것이 바로 청지기주의다.
율법주의는 "명령이니까 내라"라고 말한다. 사랑 없는 의무만 남고, 결국 두려움과 피로로 이어진다. 은혜주의는 "기쁘면 내라"라고 말한다. 질서 없는 자유만 남고, 결국 느슨함과 회피로 빠진다. 그러나 청지기주의는 "넌 더 이상 주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사랑 안의 질서를 세우고, 결국 은혜의 균형을 이룬다.
율법주의는 사랑이 빠진 질서이고, 은혜주의는 질서가 빠진 사랑이다. 청지기주의는 사랑 안에서 질서를 세우는 길이다. 십일조는 더 이상 율법의 잔재가 아니다. 그것은 하늘 시민의 주권 참여, 하나님 통치에 들어가는 공식 선언이다. 그 선언이 헌금으로 이어질 때, 사랑은 구조가 되고, 신앙은 '감정의 신앙'에서 '관계의 신앙'으로 성숙한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그 자리, 벧엘에서 서원했다. "이곳이 하늘의 문이요, 하나님의 집이로다." 구원을 경험하고 복음을 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십일조를 약속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십일조는 복음이 선포된 교회, 곧 벧엘에 드려져야 한다. 그곳이 바로 "하늘의 문"이기 때문이다(말 3:10).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공식적 언약의 참여이며, 헌금은 그 언약의 사랑이 세상으로 흘러나가는 통로다. 헌금은 종교적 거래가 아니라 신앙의 순환 구조다. 돈이 아니라 마음이 드려지는 자리,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거쳐 세상으로 흘러가는 그 순간, 신앙은 완성된다.
“교회는 왜 돈(헌금)에 그렇게 민감한가?”, “십일조는 얼마를 드리는 건가요?”, "돈이 없을 때도 해야 하나요?”, “십일조는 어디에 쓰여야 하나요?” 사람들이 십일조와 헌금 앞에서 가장 자주 던지는 질문 중 몇 가지다. 하지만,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정말 하나님이 이걸 필요로 하실까?”
십일조는 하나님이 부족해서 요구하신 세금이 아니다. 그분은 이미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이다(시 24:1). 그분이 원하신 건 돈이 아니라, ‘누가 주인인가’라는 고백이다. 많은 이들이 묻는다.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해야 하나요?”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그분은 율법의 강요를 넘어서, 마음의 주권을 회복한 드림을 원하셨다. 십일조는 구약의 세율이 아니라 하늘 시민의 서명이며, 그 서명은 구원의 확신과 함께 찍힌다. 가난하다고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믿음의 통로가 된다(막 12:42~44). 한편, 많은 교인들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교회 대신 선교지에, 기관에, 혹은 어려운 이웃에게 드립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경의 원리는 분명하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곳, 벧엘, 곧 복음이 선포된 하나님의 집에서 서원했다(창 28:22). 십일조는 복음이 나를 살린 그 자리로 되돌아가는 은혜의 순환이어야 한다. 그곳이 바로 ‘하늘의 문이 열리는 자리’이기 때문이다(말 3:10). 결국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것은 금액이 아니라 방향이다. 십일조는 ‘주권의 질서’를 세우고, 헌금은 그 질서 안에 ‘사랑의 순환’을 채운다. 하나님은 이 두 고백이 만날 때, 닫힌 하늘 문을 여신다.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십일조와 헌금은 마치 두 날개 같다. 한쪽 날개는 주권의 고백, 다른 날개는 사랑의 순환이다. 한쪽만 펴면 맴돌 뿐, 둘이 함께 펴질 때 비로소 하늘로 오른다. 율법주의는 사랑 없는 의무, 은혜주의는 질서 없는 자유, 청지기주의는 사랑 안의 질서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내 삶의 중심이심을 인정하는 위를 향한 예배, 헌금은 그 사랑이 세상으로 흘러가는 옆을 향한 예배다. 두 예배가 하나 될 때, 신앙은 하늘 문 앞에서 진짜 예배가 된다. 드림은 결국 '잃음'이 아니라 '돌아감'이다. 하나님께로, 은혜의 원천으로. 십일조와 헌금은 그 길 위에서 신앙의 방향을 섬세하게 바로잡는 나침반이다.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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