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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는 아담이 먹었는데, 왜 내가 죄인인가?

[궁금했성경] 66화, 내가 주인이 되는 순간 시작되는 인간의 비극

by 허두영

“선악과요?”

“그건 아담이 따먹었지, 제가 따먹었나요?”

“근데, 왜 제가 죄인이 되는 거죠?”


이 질문에는 중요한 신앙의 메시지가 숨어있다. 반항 섞인 이 물음은 이미 진리의 문 앞에 가까이 다가간 신호이기도 하다. 불신이 아니라 갈망의 또 다른 얼굴이다. 믿음은 종종 반항처럼 보이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질문하는 사람을 책망하지 않고 초대하신다.


1. 선악과는 과일이 아니라 주권이었다


창세기의 기록은 단순하다.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다”(창 2:9).

그리고 명령하셨다.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여기서 우리는 거의 자동으로 “과일 하나 때문에 인간이 이렇게 된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히브리어 “알다(야다)”는 단순한 정보 획득이 아니다. 지식이 아니라 주권(통치권)이다. 판단 기준을 세우고, 선과 악을 규정한다는 의미다. 즉, 선악과는 과일이 아니라 왕위였다. 왕좌 앞에 걸린 작은 표지판 같은 것.


“이 자리는 하나님 것입니다.”


하나님은 먹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랑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질서를 주신 것이다. 경계가 없는 사랑은 방임이고, 질서 없는 자유는 방종이기에. 선악과는 금지가 아니라 사랑의 경계였다. 그 경계가 무너질 때, 관계도 무너졌다.


2.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두셨는가?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하려고 함정을 파신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만일 사랑을 강제로만 주입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프로그램이다. 신명기 30장은 이렇게 말한다.


“생명과 사망을 네 앞에 두었나니… 생명을 택하라.”(신 30:19)


자유가 있기에 사랑이 있고, 선택이 있기에 관계가 존재한다. 강제된 복종은 종을 만들고, 선택한 순종은 자녀를 만든다. 하나님은 사랑받기 위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러니 선악과는 하나님을 시험한 나무가 아니라 인간의 사랑을 초대한 나무였다.


3. 아담의 죄는 왜 내 죄가 되는가?


이 지점에서 사람은 다시 묻는다. “그래도 아담이 먹었지, 제가 먹은 게 아니잖아요.” 여기서 성경의 가장 깊은 신비 중 하나가 등장한다. 대표성과 전가의 원리.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내가 죄 중에 출생하였으며, 내 어머니가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우리는 아담의 씨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 다시 말해, 아담이 선악과를 손으로 먹었다면 나는 마음으로 먹으며 태어난 셈이다. 이렇게 아담의 후손인 인류에 반역죄가 들어왔다. 이 때문에 원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것이다. 억울한가? 그러나 이렇게 대답이 돌아온다. “만일 아담의 죄가 억울하다면, 그리스도의 은혜도 억울해야 한다.” 병 주고 약 주고 아니냐고? 어떻든 약을 줬으면 되는 것 아닌가. 아담은 실패했지만, 그리스도는 승리하셨다. 대표성은 심판으로 끝난 게 아니라 구원으로 다시 해결하셨다.


4. 실패의 자리에서 열린 은혜의 문


아담의 선악과 사건 후 에덴은 파국이 임했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의 씨앗이 뿌려진 자리였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창 3:15) 원시 복음. 하나님은 심판에서 끝내지 않으셨다. 그 자리에서 구속사를 여셨다. 인류의 첫 질문은 “왜?”였지만, 하나님의 첫 응답은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였다. 그날 이후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이 잃어버린 자녀를 찾는 대장정의 서사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 오르셨다. 그 사건이 나를 위한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것이다.


5. 선악과는 내 마음에도 있다


잠언은 말한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


선악과는 수천 년 전 동산 중앙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지금 내 마음 한가운데도 서 있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 아담처럼 선언한다. “내가 기준이다.” “내가 판단한다.” “내가 결정한다.”라고. 심지어 남을 비판하고 정죄할 때도 그렇다. 그 순간마다 나는 하나님 자리에 올라간다.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선악과 따먹은 적 없어요.” 아니다. 판단의 말로, 자존심으로, 세상 욕심으로 우리는 매일 선악과를 한 입씩 베어 문다. 선악과는 손으로 먹는 과일이 아니라, 마음으로 먹는 태도다.


6. 오늘의 선악과 시험 - 주권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예수는 겟세마네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이 기도는 모든 선악과의 반대편에서 잔잔하게 울린다. ‘내가 주인’이라는 선언 대신 ‘주님이 주인’이라는 고백으로. 하나님은 오늘도 묻는다. “내가 왕이냐, 네가 왕이냐?” 그리고 그 질문은 기도에서, 인간관계에서, 그리고 돈을 대하는 태도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십일조는 오늘의 선악과 자리다. ‘넘보지 말라’에서 ‘인정하라’로 바뀐 언약의 지점 말이다. 선악과는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표징이었고, 십일조는 ‘하나님이 왕이며 주권자’임을 인정하는 표현이다.


7. 결론: 누가 내 인생의 주인인가?


바울은 말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


신앙은 감정이 아니다. 행동만도 아니다. 신앙은 왕좌의 문제다. “누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가?” 아담은 왕좌를 빼앗으려 했고, 예수님은 왕좌를 아버지께 돌려드렸다. 그리고 나는 매일 그 두 길 사이에 선다. 오늘도 선악과는 내 마음에 높게 서 있다. 그 나무 앞에서 나는 묻는다. “내가 왕인가, 하나님이 왕인가?” 그 질문에 답하는 순간, 진정한 신앙은 시작되고, 교만은 무너지고, 복음은 흘러 들어오며, 삶은 다시 살아난다.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인천성산교회 홈페이지: http://isungsan.net

인천성산교회 l 인천이단상담소(상담 및 문의): 032-464-4677, 465-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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