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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을 지혜롭게 살기 원한다면?

[궁금했성경] 76화, 4가지 시간, 유한한 시간 속에서 영원을 사는 법

by 허두영

1. 인간의 시계가 아닌 하나님의 시계로


인생을 초침으로 재단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늘 적대적이다. 쫓기고, 늦고, 놓친다. 시계를 차고 살지만, 정작 ‘시간의 주인’을 잃은 채 산다. 시편 기자는 말한다. “나의 때는 주의 손에 있나이다”(시 31:15). 이 짧은 고백은 인간의 시계를 멈추고 하나님의 시계를 바라보는 첫 신앙의 전환이다. 인간은 시간을 ‘관리’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시간을 ‘섭리’하신다. 전도자가 “때에 아름답게 하셨다”(전 3:11) 말했을 때, 그는 효율이 아니라 의미를, 통제가 아니라 해석을 말하고 있었다. 시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저 생산성의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해독하는 영적 문해력을 배우는 일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4가지 시간의 개념으로 현재를 지혜롭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2. 베르시트 - 시간을 여신 하나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히브리어로 ‘베르시트(בְּרֵאשִׁית)’는 단순한 ‘시작’이 아니다. 영원의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시간의 문을 여신 사건이다.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셨다. 다시 말해, 시간은 피조물이다. 그분은 영원 위에 계시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시간 아래로 내려오신 분이다. 요한복음은 이 베르시트를 다시 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 그 말씀은 곧 시간의 창조자요, 동시에 그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구속자다. 하나님은 ‘순간’을 통해 영원을 비추시고, ‘과정’을 통해 은혜를 가르치신다.


베르시트의 신학은 분명하다. 시간은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설계도다. 창조의 시점에서 이미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시간은 너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다.” 그때부터 인생은 초 단위의 경쟁이 아니라, 은혜 단위의 깨달음이 되기 시작한다.


3. 크로노스 -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배우는 겸손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솔로몬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사는 인간의 격랑을 노래한다.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심을 때와 거둘 때, 울 때와 웃을 때. 28가지 인간의 때. 그가 발견한 진실은 하나다. 인생의 모든 순간은 하나님의 허락 아래에 있다. 그러나 이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은 유한하다. 시계의 바늘처럼 흘러가고 닳는다. 그 유한함이 우리 안에 영원을 향한 그리움을 퍼올린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전 3:11). 시간의 끝이 두려운 이유는, 우리 안에 ‘끝나지 않는 세계’를 기억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 빛과 그림자, 기쁨과 고난, 긍정과 부정을 함께 심으셨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그분은 우리의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바로잡으신다. 고난은 징벌이 아니라, 방향 교정의 은혜다. 때로 하나님은 앞길을 막으심으로, 우리의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 하신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시 121:1). 인간은 유한함 속에서 배우고, 허무 속에서 영원을 배운다. 크로노스의 허무는 저주가 아니라 초대다. 그 허무를 견디는 자만이 카이로스의 문턱에 선다.


4. 카이로스 - 하나님의 때가 임할 때


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시간의 선언이었다.


“때(καιρός)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헬라어 ‘카이로스(Καιρός)’는 인간의 시계가 멈추고 하나님의 시계가 작동하는 순간이다. 인간이 아무리 계획해도, 하나님이 “이제다” 하실 때가 되어야 일이 열린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먼저 준비시키신다. 모세에게는 40년의 광야가, 예수님께는 30년의 침묵이 필요했다. 그 시간은 지연이 아니라 정확한 조율이었다. “겸손하라. 때(καιρῷ)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하나님은 결과보다 성품을, 속도보다 깊이를, 사명보다 사람을 먼저 세우신다. 언제나.


그러므로 환란은 하나님의 거룩한 초청이다. 고난이 닫는 문은 없다. 오히려 구속의 문이 열린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깨어라”(롬 13:11~12). 십자가의 밤은 인류의 종말이 아니라 구원의 새벽이었다.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καιρῷ)에 거두리라”(갈 6:9). 하나님의 때는 언제나 완벽하다. 지연은 패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완성으로 이끄시기 위한 은혜의 간격이다.


5. 타미드 - 영원의 현재 속을 사는 사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


인간의 시간으로는 불가능한 명령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는 이미 다른 시간대에 산다. 히브리어 타미드(תָּמִיד)는 ‘끊임없이, 언제나, 영원히’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출애굽기에서 성막의 등불을 설명할 때 처음 등장한다. “등불을 타미드로 켜라”(출 27:20~21). 그 빛은 멈추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 빛을 성도에게 옮기셨다.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은 크로노스 안에서 타미드를 사는 것이다. 시간은 흘러간다. 그러나 예배는 멈추지 않는다. 히브리서의 권면처럼 “우리는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히 13:15). 삶의 모든 순간이 예배가 되는 것. 그리하여 믿음은 하루를 견디는 힘이 아니라, 영원을 현재로 불러오는 능력이 된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약속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그 약속이야말로 타미드의 선언이다. 그분과 함께 걷는 사람은 시간 속에 살아도, 시간 밖을 산다. 그의 하루는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원한 현재(Eternal NOW)다.


6. 하나님의 시계에 나의 시계를 맞추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눅 22:42). 이 문장은 모든 신앙의 엔딩이자 시간 신학의 절정이다. 성숙한 기도는 ‘언제입니까?’를 묻지 않고, “그분의 때면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크로노스의 시계를 보며 조급해 하지만, 하나님은 카이로스의 시계로 모든 것을 완성해 가신다. 그러니 인생의 진짜 성공은 하나님의 시계에 나의 시계를 맞추는 일이다. 그때 시간은 더 이상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의미로 채워지는 은혜의 공간이 된다.


하나님은 베르시트의 시간에서 세상을 여셨고,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인간을 가르치셨으며, 카이로스의 시간에 구속을 이루시고, 타미드의 시간 속에서 우리와 동행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은 시간을 통제하는 능력이 아니라, 시간의 주인을 신뢰하는 지혜다. 하나님은 시간을 설계하시고,

인간은 그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배운다. 크로노스는 카이로스를 향한 초대, 타미드는 그 초대가 완성된 영원의 현재다. 당신은 지금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는가?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인천성산교회 홈페이지: http://isungsan.net

인천성산교회 l 인천이단상담소(상담 및 문의): 032-464-4677, 465-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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