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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인가?

[궁금했성경] 75화, 크리스마스의 유래와 본질적 의미

by 허두영

12월의 공기는 언제나 설렌다. 상점마다 캐럴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바쁘게 선물을 고르고, 서로를 포장한다. 그런데 문득, 나는 묻는다. 이렇게 반짝이는데… 정작 그 빛이 누구를 비추고 있는가? 거리의 트리마다 전구는 터질 듯 환하지만, 그 빛의 근원이신 ‘그분’의 이름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Merry Christmas” 대신 “Happy Holidays”, 언젠가부터 ‘Christ(그리스도)’는 슬그머니 빠져 있다. 거룩한 날(holy day)이 평범한 ‘휴일(holiday)’이 된 세상, 트리보다 먼저 세워야 할 것은 우리 마음의 제단이다. 크리스마스는 상업과 감성, 휴식과 낭만이 서로 얽혀 ‘빛의 축제’가 되었지만, 정작 그 빛의 근원은 잊혀졌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말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한복음 1:14)


그 한 문장이야말로 크리스마스의 심장이다. 하늘이 땅이 되었고, 신이 인간의 몸을 입었다. 하나님이 멀리서 사랑하지 않으시고, 가까이 오신 날, 그것이 크리스마스다.


1. 크리스마스의 유래 - 12월 25일, 어떻게 그날이 되었나?


초대교회에 ‘성탄절’은 없었다. 초기 신앙의 초점은 예수의 생일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이었다(고전 15:3~4). “그가 언제 태어났는가?”보다 “그가 왜 죽으셨는가?”가 더 급했다. 전환점은 4세기.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되자(313년) 공적 예배력(禮拜曆)이 정비되었고, 교회는 이미 널리 퍼져 있던 12월 25일 태양신(Sol Invictus) 축제 위에 복음의 의미를 덧입혔다. 1년 중 밤이 가장 길었던 날이 지나고, 다시 낮이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한 때였다. 교회는 ‘빛이 어둠을 이겼다’(요 1:5)라는 실제로 재해석했다. 태양의 부활은 사라지고, 의의 태양(말 4:2)이 떠올랐다. 그것은 빛이 어둠을 덮은 단순한 계절의 변화가 아니라, 어둠의 상징을 빛의 언어로 다시 쓴 복음의 반전이었다. Christmas는 Christ + Mass, “그리스도를 예배한다”라는 뜻이다. 본래 크리스마스는 파티가 아니라 미사(예배), 곧 구속을 기억하는 공적 경배였다.


동방교회가 한동안 1월 6일 주현절(Epiphany)에 세례와 동방박사의 방문을 함께 기념했고, 서방교회가 12월 25일을 탄생일로 정했으며, 시간이 흐르며 지금처럼 12월 25일(성탄)과 1월 6일(주현)이 분화되었다. 날짜는 상징일 뿐이고, 핵심은 본질이다. 빛이 누구를 가리키는가?


2. 성육신의 신비 - 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셔야 했는가?


요한복음은 단호하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여기서 말씀(로고스)은 창, 질서, 의미의 근원(요 1:1~3), 육신은 피와 살, 한계와 고통의 총합이다. 무한이 유한을, 영광이 비천을 입은 사건, 이 비수 같은 문장 하나가 크리스마스의 골격이다.


왜 꼭 사람이 되어야 했는가?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

첫째, 사람의 죄는 사람이 갚아야 한다. 죄는 ‘하나님 대신 내가 주인 되는 것’이다(창 3:5). 따라서 책임의 주체는 인간이다(롬 5:12).

둘째, 죄인은 죗값을 갚을 수 없다. 모두가 죄 아래 있고(롬 3:10~12),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롬 6:23). 그래서 필요한 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다. 하나님으로서 죄 없고, 인간으로서 우리를 대표하여 죽으실 수 있는 중보자. 성경은 이렇게 정리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성육신은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자리다(시 85:10). 공의는 십자가에서 만족되고(롬 3:25~26), 사랑은 아기 예수의 탄생에서 몸을 얻는다. 그러므로 성탄은 예쁜 동화가 아니라 구속의 서곡이다. 아기가 온 이유는 죽기 위해서였고(막 10:45), 죽음은 끝이 아니라 의의 전가와 생명의 시작이었다(고후 5:21, 롬 5:19).


3. 마구간의 메시지 - 낮은 곳에 임한 영광


“여관에는 그들을 위한 방이 없었기 때문이라”(눅 2:7). 성경은 단순히 기록했지만, 그 짧은 기록 안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방이 없는 이유는 가난, 혼잡, 거절이다. 하나님은 거절당한 자리에서 세상을 받아들이셨다. 구유는 냄새와 혼돈의 현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성소에서 우리를 부르기보다, 마구간으로 들어오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인간은 높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은 낮은 곳에서 인간을 만나신다(빌 2:6~8).


천사는 왕궁이 아니라 들판의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영광을 비추었다(눅 2:8~14). 사회적 최하층, 종교적으로 부적격자로 취급되던 이들이었다. 영광은 위가 아니라 아래에 임한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동선이다. 낮아지심-성육신-십자가-부활. 구원의 길은 상승의 그래프가 아니라, 내려오심의 곡선이다.


4. 동방박사의 세 예물 - 왕, 제사장, 제물


마태는 긴장감 있는 한 장면을 남겼다. 이방의 지혜자들이 별을 따라와서 “엎드려 경배하고 보물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니라”(마 2:11). 교회는 이 세 예물을 성경의 맥락 안에서 읽어왔다.


황금은 ‘왕권’이다. 왕에게 바치는 가장 합당한 예물. 그분은 다윗의 보좌를 잇는 왕(눅 1:32~33), 세상의 왕들을 굴복시키는 만왕의 왕(계 19:16)이다.


유향은 ‘신성’, 제사장직이다. 성소를 가득 채우던 향은 하늘과 땅을 잇는 상징이다(출 30:34~38).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해 단번에 자신을 드려,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길을 여셨다(히 4:14~16, 9:11~14).


몰약은 ‘죽음’이다. 시신을 감쌀 때 쓰던 향품(요 19:39). 아기 옆에 조용히 놓인 장례의 향. 탄생의 기쁨 속에 십자가의 그림자가 미리 드리워진다.


왕으로 다스리고, 제사장으로 중보하며, 제물로 죽으신다. 세 예물은 성육신의 목적을 압축한 예언적 요약본이다. 크리스마스는 단지 “아기가 왔다”가 아니라 “구속이 시작됐다”라는 선언이다.


5. 오해의 숲을 지나 - 산타, 선물, ‘Happy Holidays’


산타는 사랑스러운 전설이지만, 복음의 언어는 아니다. 복음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롬 5:8)을 선포한다. 공로가 아니라 은혜. 착한 자가 아니라 죄인. 산타의 동화는 ‘착하게 살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다시 살아나라’고 속삭인다(겔 36:26).


선물 교환은 따뜻하지만, 첫 선물은 인간이 드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선물의 원형이다(요 3:16).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작은 선물은 그 큰 선물의 잔향이다. 그 잔향이 원형을 밀어내는 순간, 선물은 소비가 되고, 소비는 의미를 비운다.


그리고 “Happy Holidays.” 단어는 중립처럼 보이지만, 언어는 세계관을 전한다. “Holiday”의 어원은 본디 “Holy Day”, 거룩한 날. 현대는 ‘거룩’을 지우고 ‘휴식’만 남겼다. 크리스마스의 중심이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이동할 때, 우리는 축하할 이유는 남기고, 경배할 근거는 잃는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Merry Christmas”라고 말해야 한다. 그 말은 예의가 아니라 신앙고백이다. “그리스도의 예배가 기쁨이 되기를.”


6. 크리스천의 마음가짐 - 겸손, 예배, 소망


첫째, 겸손이다. 마구간 앞에 무릎을 꿇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높아짐의 언어로는 성육신을 해석할 수 없다. 낮아짐이 복음의 문법이다(빌 2:6~8). 트리보다 먼저 마음의 제단을 세워야 하리라.


둘째, 예배이다. 동방박사와 목자는 엎드렸다(마 2:11, 눅 2:20). 크리스마스는 받는 날이 아니라 드리는 날이다. 찬양은 캐럴보다 깊고, 감사는 선물보다 무겁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께 드리는 예배가 본론이다.


셋째, 소망이다. 성탄은 초림의 기쁨이자 재림의 예고편이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계 22:12). 크리스마스는 과거의 기념일이 아니라 미래의 약속을 현재로 당겨 사는 연습이다. 성도란 이미 임한 나라를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다.


7. 결론 - 축제가 아니라 임재, 감상이 아니라 구속


오늘 밤,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찬란할 것이다. 그러나 그 빛을 바라보며 우리는 더 오래된 빛을 떠올린다. 창세전부터 있었고, 어둠이 깨닫지 못했으며, 지금도 꺼지지 않는 빛(요 1:5). 그 빛이 육신을 입고 오셨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사랑을 선언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땅으로 내려와, 그 사랑을 몸으로 증명하셨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축제가 아니라 임재, 감상이 아니라 구속이다. 그날은 하늘이 인간을 바라본 날이 아니라, 하늘이 인간 속으로 들어온 날이다.


그러므로 다시 고백한다. 크리스마스의 본질은 성육신, 성육신의 본질은 임마누엘, 임마누엘의 본질은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인사한다. Merry Christmas. 그것은 “즐거운 휴일(Happy Holidays)”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예배가 너의 기쁨이 되기를”이라는 고백이다. 오늘, 아기 곁에 놓인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기억하라. 그분은 왕으로 다스리고, 제사장으로 중보하며, 제물로 자신을 내어 주셨다. 빛이 어둠으로 왔고, 어둠은 그를 이기지 못했다.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인천성산교회 홈페이지: http://isungsan.net

인천성산교회 l 인천이단상담소(상담 및 문의): 032-464-4677, 465-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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