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성경] 74화, 성경을 하나님의 구속 이야기로 읽기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성경은 내 고민을 들고 해답을 주고, 내 목표를 펼쳐 놓으면 격려해 줄 것이라고. 그러나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니다. 성경을 삶의 안내가 아니라 성공의 GPS로 삼는 순간, 성경은 더 이상 계시가 아니다. 성경은 나를 낮추고 예수를 드러내는 책이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창을 열어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구속을 봐야 한다.
성경은 수천 번 읽고 매일 묵상한다고 이해되는 책이 아니다.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할 때 전제되어야 할 3가지가 있다.
1) 내가 아니라 예수(Not me, but Christ)
2) 성공이 아니라 구원(Not success, but salvation)
3) 내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의 이야기(Not my story, but His story)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연구했지만, 그 중심인 예수님을 놓쳤다. 말씀의 끝은 지식 축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고, 믿고, 사랑하고, 따르는 만남과 변화를 통한 생명이다.
성경은 나의 성공을 돕는 매뉴얼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다. 그러므로 성경을 펼칠 때 중심은 예수의 십자가, 부활, 재림이어야 한다. 대전제가 흔들리면, 말씀은 동기부여 격언집이 되고 신앙은 종교 노동이 되고 만다. 성경은 그분의 이야기 안으로 나를 데려가며(눅 24:27), 지식을 늘리기보다 구원을 확증하고 성화를 돕는다(롬 8:1, 히 10:14).
대전제 없이 다음의 성경 읽기 방법만 익히면 바리새인처럼 되고, 올바른 성경 읽기 방법 없이 대전제만 챙긴다면 감성주의나 위험한 자기 해석에 빠지기에 십상이다. 둘이 결합할 때 비로소 복음적, 구속사적, 성령조명적 성경읽기가 가능해진다.
신앙은 뜨거운데 삶은 왜 그대로일까? 성경을 읽었지만 ‘문’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문을 잘 통과하면 성경을 더 깊게 만날 수 있다.
① 문화(文化) - 유대 문화는 구속을 비추는 무대
창세기 38장의 유다와 다말 이야기는 고대 근동 문화를 알지 못하면 그야말로 ‘막장 스캔들’처럼 읽힌다. 성경에서 곡해가 많은 본문이기도 하다. 현대 독자의 시선으로 보면, 며느리가 창녀로 변장해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는 건 “이게 어떻게 성경이냐?”라고 할 만 한다. 그러나 성경은 구속사 기록이다. 고대 근동 문화에서 ‘레위라트 제도’를 이해해야 한다. 형이 죽었을 때 형의 가문과 상속, 미망인 보호를 위해 동생 또는 가까운 남자가 혈통을 이어주는 관습이다.
다말의 관점에서 남편 가문에 속한 여자는 ‘씨’를 보호해야 했기에 스스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성경이 다말을 옳다고 말한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창 38:26) 왜냐하면 이 사건은 타락이 아니라 언약 회복이었기 때문이다. 다말에게서 태어난 베레스는 예수 그리스도로 족보가 이어진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상처 난 사람들로 메시아 계보를 짠다. 우리는 ‘깨끗한 인생’에 집착하지만, 하나님은 ‘깨진 인생’ 속에서 구원의 길을 내신다. 유다와 다말 사건은 성적 추문이 아니라 언약 회복과 메시아 탄생의 구속 이야기다.
② 문명(文明) - 역사 속에 숨은 하나님의 섭리
아브라함이 유랑하던 시대에도, 다윗이 왕좌에 앉던 시대에도, 하나님은 이미 한 방향으로 역사를 그리고 계셨다. 그리고 때가 찼을 때, 세상은 이상하리만큼 복음이 흘러가기 좋은 모양으로 정돈되어 있었다. 로마는 도로를 닦았다. 군사 이동과 행정 편의를 위해 만든 길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길 위로 사도들을 걷게 하셨다. 헬라 세계는 언어를 통일했다. 문화 정복을 위한 도구였지만, 하나님은 그 언어로 복음이 국경을 넘어 넘나들게 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실 때, 그 소식이 가장 멀리, 가장 깊이 퍼질 수 있도록.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실패와 디아스포라의 상처를 품고 각지에 흩어져 회당을 세웠다. 사람의 눈엔 비극처럼 보였으나, 하나님은 그 회당을 복음의 최초 선교 거점으로 사용하셨다. 로마의 길, 헬라의 말, 유대의 회당. 인류가 피와 땀으로 쌓아 올린 황금빛 문명은 사실 복음을 위해 준비된 하나님의 토목 공사였다. 우리는 역사를 공부할 때 문명을 본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 문명 속에 흐르는 것은 인간의 야망이 아니라 구원의 동선이다.
③ 문맥(文脈) - 한 단어, 한 구절이 아니라 맥락 읽기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은 문맥을 보지 않고 문자적으로 해석한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의 왜곡된 해석으로 수많은 이단이 나왔다. 상급을 구원과 동일시 해서 “구원을 얻기 위해 달려야 한다”라는 말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문맥은 전혀 다르다. 그는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상급을 향해 달리고 있다고 말한다. 바울이 두려워한 ‘버림’은 구원 상실이 아니라, 상급 상실과 사역의 박탈(고전 3:15)이다. 그의 경주 비유는 ‘천국 입성 경쟁’이 아니라 ‘이미 시민권을 가진 자의 올림픽 경기’(빌 3:14, 20)이다. 구원은 출전 자격이며, 경주는 사명이고, 상급은 주께서 준비하신 영광의 메달이다. 한 구절만 붙잡으면 행위 구원으로 오해되지만, 문맥을 보면 은혜로 시작된 신앙이 순종으로 열매 맺는 여정임이 선명해진다.
바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구원은 달려서 따내는 상이 아니라, 상급을 향해 달릴 수 있게 하는 출발선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경주는 불안한 생존 게임이 아니라, 확정된 신분을 가진 자의 감사와 충성의 레이스이다. 문맥을 잃으면 성경은 위기감을 조장하는 공포 종교가 되지만, 문맥을 붙들면 성경은 은혜의 확신 위에 세워진 기쁨의 훈련장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야기다. 한 구절을 붙잡기 전에, 그 구절을 품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 전체를 읽어야 한다.
④ 문법(文法) - 구원은 미래형이 아니라 완료형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장 24절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다. 예루살렘의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 직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안식일을 범하고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든다고 비난한다. 그때 그들에게 답변하시면서 하신 긴 설교(요한복음 5장 전체)의 핵심 내용 중 일부다. 믿는 자는 영생을 이미 얻은 상태이며, 미래가 아닌 현재 소유하고 있음을 선포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미래의 심판에 전혀 이르지 않으며, 사망의 권세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완전히 옮겨졌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시제다. 헬라어 원어에서 "영생을 얻었고"는 현재다. 영생은 미래에 받을 희망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어 현재 소유하고 있는 확실한 실체임을 강조한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과거 완료다. 죄의 영역인 사망에서 하나님 영역인 생명으로의 이동(구원)은 과거(믿는 순간)에 이미 완료된 확실한 사건이며, 그 결과는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예수님의 말을 듣고 또 예수님을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구원이 완료 시제로 끝난 것이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⑤ 문자(文字) - 원어에 숨은 복음의 숨결
성경은 여러 번역본이 있지만, 원어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진리가 있다. 하나님은 원어에 숨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름 속에 숨은 의미를 보면 신비롭다. 이들의 이름이 바뀌면서 이름 속에 히브리어 알파벳 H, 헤(ה)가 들어간다. 이는 ‘숨, 호흡, 생기, 영’을 상징한다.
창세기 2장 7절의 생기처럼, 하나님의 숨이 들어갈 때 비로소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다. 정체성이 달라진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 속에 자기 호흡을 넣으셨다. ‘높은 아버지’ 아브람에서 ‘열국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되었고, ‘나의 공주’ 사래에서 ‘모든 민족의 어머니’ 사라가 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름 속에 구속사를 심어놓은 것이다.
⑥ 문하생(門下生) - 혼자는 위험하다, 스승이 필요한 이유
성경은 결코 ‘혼자만의 통찰 여행’으로 읽도록 주어진 책이 아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을 받고도 ‘사도들의 가르침’에 전념했다(행 2:42). 성령 체험이 곧바로 해석의 자격을 보장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정통 교리와 교회의 전통은 자유를 막는 벽이 아니라, 교만한 해석을 정화시키고 참된 영성을 보호하는 울타리다. 개혁교회가 수천 년 동안 성경을 붙들며 세워 온 신학적 뼈대는 사슬이 아니라 울타리이며, 감옥이 아니라 안전한 목장이다. 이 울타리 밖으로 벗어난 순간 가장 깊은 어둠으로 떨어진다.
베뢰아 사람들의 모범도 오해하면 안 된다. 그들은 “우리가 스스로 깨달았다”가 아니라, 말씀으로 검증했다(행 17:11). 검증의 기준은 개인적 직관이 아니라 공동체가 세대에 걸쳐 지켜 온 진리였다. 성경을 읽는 방법 중 하나는 문하생(門下生)이 되는 것이다. 믿을 만한 스승에게 배워야 한다. 성경을 연구할 때 단독 주행은 사고의 지름길이다. 영적 독학은 경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장 교만한 해석 방식이다. 성경은 혼자 오르는 산이 아니다. 검증된 목회자와 정통 신학의 지도 아래, 말씀을 함께 걷는 순례길이다.
⑦ 문(聞) - 성령의 조명과 순종: 해석의 마지막 문
마지막 문은 바로 ‘들을 문(聞)’이다. 곧 성령의 조명 아래 듣고 순종하는 마음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성경은 들리는 책이며, 그 들림은 성령이 여시는 일이다. 성령께서 베푸시는 조명이 없으면, 성경을 천 번을 읽어도 이해할 수 없다.
조명은 순종으로 증명된다. 야고보는 ‘듣고 행하는 자’가 복되다 했고(약 1:25), 예수는 “알면 행하라” 하셨다(요 13:17). 성령께서 열어주신 성경은 지식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부수고 다시 빚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의 마지막 관문은 이해가 아니라 복종이다. 성령 앞에 귀를 열 때, 성경은 정보가 아니라 초대가 된다.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의미를 해석하고 문장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말씀에 의해 다시 빚어지는 과정이다. 성경은 한 번 감동받고 덮어두는 책이 아니다. 하루아침에 꿰뚫을 수도 없고, 스스로의 직관만으로 다룰 수도 없다. 하나님이 인류 역사 속에 준비하신 문화, 문명, 언약, 계시의 결을 따라 깊이 파고드는 학자적 겸손이 필요하고, 동시에 말씀 앞에 무릎 꿇고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을 고백하는 제자적 순복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예수를 닮아가는 영혼의 여정이다. 묵상은 기록된 진리를 심장 속에서 되새기는 일이고(시 1:2), 연구는 그 진리를 흔들림 없이 붙잡기 위한 성도의 무기이며(딤후 2:15), 적용은 그 진리를 삶으로 증명하는 믿음의 실험이다(약 1:22). 성경은 머리에 저장하라고 주신 책이 아니다. 삶에 각인되라고 주신 말씀이다. 지식으로 멈추면 교만이 자라고, 감동으로만 머물면 변명만 늘어난다. 그러나 말씀이 치열한 적용을 통해 순종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요 8:31).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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