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성경] 73화, 자범죄의 눈물에서 원죄 해결의 십자가로 돌아가라
수십 년을 예배하고 봉사하며 헌신한 사람들도 어찌 된 일인지 작은 고난에도 갈대처럼 신앙이 흔들린다. 우리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법은 배웠지만, 왜 믿는지, 무엇을 믿는지, 그리고 어떤 죄가 해결되었는지는 듣거나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신앙은 감정이 아니고, 구원은 기분이 아니며, 확신은 일시적 뜨거움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어 성령의 인치심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의외로 간과하고 있는 신앙의 맥이 되는 개념을 짚어보고자 한다. 바로 원죄와 자범죄이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평생 교회를 다녀도 구원의 확신을 갖기 힘들다.
성경은 간결하다. 그러나 간결한 진리가 모호하게 들리면, 평생 종교 생활만 하다 지옥에 갈 수도 있다.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두 가지다.
첫째, 원죄는 태어날 때부터 지닌 죄다. 아담이 지은 죄이자 반역죄다. 인간은 원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데, 허물과 죄로 영이 죽었기 때문이다(엡 2:1). 겉사람은 살아 있지만, 속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미 끊어진 존재. 출생과 동시에 심판 아래 선 인류의 실존, 이것이 원죄다. 반면, 자범죄는 우리가 살아가며 짓는 죄다. 말과 행동, 생각과 욕망 속에서 반복되는 넘어짐이다. 이 죄는 회개하면 용서받는다.
문제는 많은 교인이 자범죄를 씻기 위해 눈물을 흘리지만, 정작 원죄가 해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그래서 그들의 기도는 늘 반복된다. “하나님, 또 죄를 지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지은 죄 모두 해결해 주세요.” 그 기도는 사뭇 진지하다. 심지어 자범죄를 해결해 구원받으려고까지 욕심을 낸다. 그러다 율법주의의 구렁으로 빠지기도 한다.
선지자 이사야는 700년이 넘은 미래에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 53:5)
우리는 이 구절을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들을 때마다 놓친 것이 있다. 여기서 ‘허물’은 태어날 때부터 지닌 반역죄, 곧 원죄이고, ‘죄악’은 내가 살면서 율법을 범한 죄, 즉 자범죄다. 예수님의 고난 또한 이 두 가지 죄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십자가를 지기 전, 예수님은 멸시와 조롱, 침 뱉음, 채찍질, 가시관, 옷 벗김 등 사람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다. 그 고난은 우리가 지은 자범죄의 결과였다. 그러나 십자가의 여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분은 창에 찔리시고, 죽으시고, 무덤에 내려가셨다. 사망과 지옥의 깊은 자리까지 내려가셔서,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원죄의 심판을 대신 받으셨다.
자범죄는 눈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원죄는 피와 죽음으로만 해결된다. 예수님이 창에 찔려 죽으신 것은 우리의 허물인 원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이 수치를 당하고 채찍에 맞아 상함은 우리의 죄악인 자범죄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다 이루었다”(요 19:30)라는 말씀은 구약의 예언(창 3:15, 사 7:14, 53:1~6)이 성취되어 우리의 원죄와 자범죄가 법적으로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장엄한 선언이었다.
교회는 오랜 세월 “회개하라”라는 메시지를 외쳐 왔다. 그 자체로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회개가 신앙의 중심 교리처럼 자리 잡으면서, 복음의 본질을 대신했다는 데 있다. 이 회개는 자범죄를 다루는 도구일 뿐이다. 구원을 받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대속이다. 그래서 많은 성도는 이런 신앙의 쳇바퀴를 돈다. 회개하면 잠시 마음이 편해지고, 며칠이 지나면 다시 불안해진다. 죄책감이 들면 또다시 회개하고, 어느 날은 문득 “혹시 나는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찾아온다.
왜일까? 그것은 설령 원죄가 해결되었다는 복음이 지식으로는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를 위한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못을 자백하는 법은 배웠지만, 2000년 전에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사실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요한일서 5장은 말한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요일 5:8) 십자가에서 쏟으신 물과 피, 곧 구속의 복음을 들을 때, 성령은 이 모든 사실이 내게 이루어졌음을 확증하는 인을 치신다. 에베소서 1장 13절은 이 과정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구원의 여정은 복음을 듣고, 믿고, 성령의 인침을 받는 순서로 흐른다. 먼저 복음을 듣는다. 원죄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귀로 받아들인다. 그다음 믿는다. 그 사건이 나의 이야기임이 믿어진다. 그 순간 성령께서 “너는 내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도장을 찍으신다. 구원의 확신이란 감정의 온도가 아니라 성령의 인치신 사건이다. 뜨거움이 아니라, 피와 말씀과 성령으로 확증된 신분의 변화다.
기독교는 단지 심리적 안정과 삶의 복을 주는 종교가 아니다. 더 나은 인생 전략을 제공하는 프로그램도 아니며, 행복을 위한 철학도 아니다. 기독교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구속의 종교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종교다. 원죄의 심판 아래 있던 인간의 영혼이 십자가의 대속으로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 바로 복음이다. 그래서 다른 종교와 달리 전도에 더 힘쓰는 것이다. 전도는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며, 죽은 영을 살리는 숭고한 생명 구조 활동이다. 구원받은 자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사람은 영원히 죽기 때문이다.
구원의 확신은 눈물의 양, 헌신 이력, 감정의 상태에서 오지 않는다. 확신은 보혈의 피, 기록된 약속, 성령의 인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곳에서 원죄가 처리되고, 그곳에서 죽었던 영이 살아나며, 그곳에서 영생의 확신이 시작된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다 이루었다”라는 선언이 “나에게 이루어졌다”라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쁜 소식을 영생 주기로 작정된 남은 자를 찾아 땅끝까지 전하는 것이다.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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