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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동네 사루비아

그 많던 사루비아(salvia)는 누가 다 먹었을까?

by 새벽

어려서 내가 살던 빨간 빌라 뒤편 동네에는 철마다 꽃들이 만개했다.

공식 명칭은 아니었으나 할머니 할아버지, 아이들 모두 그 동네 이름을 꽃동네라 일컬을 정도로 꽃이 만발하던 작은 시골 동네였다. 교회 언니로부터 꽃들은 꿀을 품고 있고, 당장에 따먹으면 달콤한 꿀즙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던 어느 예닐곱 살 즈음, 나는 이 말을 확인해보기 위해 꽃동네로 향했다.


별별 꽃을 다 쬽쬽 빨아보는데 떫기도 씁쓸하기도 했던 그 맛을 기억해보면 아직도 혀끝이 텁텁하다. 이 언니 완전 거짓말쟁이 아니야, 하고 돌아가려는 순간 눈에 들어온 새빨갛고 조롱조롱한 꽃에 자연스럽게 손을 갖다 대었다. 꽃 하나를 똑 따 뒷꼭지를 쬽! 하고 빨았는데 달달한 꿀이 입안에 감돌았다. 드디어 꿀이 나오는 꽃을 발견했다며 그 꽃을 가지고 엄마에게 갔더니 이 꽃은 ‘사루비아’ 라는 꽃이라 했다.


사루비아 라고 하니 대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당시 즐겨보던 웨딩피치라는 만화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나중에 등장하는 네 번째 전사 이름이 사루비아였고, 그녀의 머리는 붉은색이었다. 원래는 무뚝뚝한 그녀가 싫었고 피치 릴리 데이지(주인공들 이름)와 친해지지 않기를 바랐었는데 그렇게 달달한 맛을 가진 꽃이 사루비아였다니! ㅡ의식의 흐름ㅡ



나는 가장 소중했던 내 친구 두 명을 데리고 다음날 꽃동네로 다시 향했다. 화단마다 만개한 사루비아를 보여주며 이 꽃에서 꿀을 따먹을 수 있다고 알려주니 친구들이 냉큼 꽃을 물어 먹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사루비아 채집을 시작했고 그 자리에서 하나 둘, 꿀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너무 달아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집에 가서 꿀을 짜내자는 의견을 모으고는 주머니에 하나, 둘 채워 넣기 시작했다.


그 때 마을 확성기에서 "아. 아. 지금 동네 화단에서 꽃이 사라지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꽃은 관상용으로 보시고 어린이들은 밖으로 나오시길 바랍니다"라고 하는 할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화단을 보니 새빨갛던 화단이 초록 빛깔만 남은 채 파들파들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잔상이 아른거린다. 어린 나이임에도 내가 '저지른' 만행이 너무 대단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집에 가서 주머니에 넣은 사루비아를 꺼내려 손을 넣었는데 주머니가 벌어지지 않았다. 엄마도 한입 먹게 해 주려고 주머니가 뚱뚱해질 정도로 싸왔는데. 이미 그 안에서 꿀이 축축하게 눌어붙어 사루비아 죽이 되어 버렸다. 엄마에게 멋진 모험담인 양 얘기했더니 그제야 된통 혼났다. 남의동네 가서 다른 사람들도 봐야 하는 꽃들을 함부로 꺾었다고 엉덩이를 찰지게 맞으며 바지를 끙끙 벗어버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 어른이 되어 생각해보면 "저 철딱서니 없는 것들, 부모가 잘못 키웠구먼"이라는 말이 나올 법도 싶은데, 그때는 지나가는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우리에게 "이걸 따먹어봐라 요거 맛있겠다" 하면서 알려주고 가셨었다. 그리고 이장님의 방송이 나오니 동네 할머니들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요놈들 이제 집에 가봐라! 이장님 나오기 전에 빨리 도망쳐라! 했었다. 되게 따뜻한 곳에서 실수해도 괜찮은 유년기를 보냈던 것 같다. 만약 지금 시대에 나의 사루비아 사건(?)을 브이로그에 담았다면 아마 우리 엄마와 나는 뭇매를 맞았을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철없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기억이 내게 잔잔한 행복감을 주는 이유는 그땐 미처 알지 못했던 어른들의 따뜻한 시선과 배려 덕분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나 역시도 타인을 대할 때 모르고 하는 어린 행동에 기회와 따뜻한 회유를 주기.

어린 시절 받았던 사랑으로 좀 더 좋은 어른이 되기를 다짐해본다.




사진출처: 경기도농업기술원(네이버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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