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태국
두께가 1cm 남짓한 샌들에 발을 얹는다. 뒤꿈치에 살짝 슬링백을 걸치면 끝. 외출 준비가 끝났다. 차가운 냉기가 도는 건물을 나서면 감추어져 있던 햇빛이 쏟아진다. 아스팔트 위 자갈과 굽 없는 샌들이 마찰음을 낸다. 싱그러운 공기와 초록이 살랑댄다. 여름, 아침이다.
가벼운 몸으로 샌들을 끌듯이 걷는다. 옷차림도 가방도 단출하다. 머리도 바람에 흩날리게 둔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내리막길을 걷는다. 작은 빌라 건물을 양옆에 끼고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내려간다. 길 중앙에 자란 보호수 덕에 찻길 사이로 작은 터가 생겼다. 하루 어느 시간에 가도 노인 한둘이 앉아 있다. 왁자지껄 회동을 벌이기에는 턱 없이 작은 섬 같은 휴식처.
동네 깊숙한 곳까지 가로수가 촘촘하다. 이파리로 만들어놓은 그늘 틈으로 햇살에게 자리를 내주기도 한다. 너무 일상적인 풍경이라 무뎌진 아름다움들.
태양이 뜨거워지고 공기가 무겁게 느껴질 즈음 땀도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다. 마침 도착한 버스에 올라타면 에어컨이 잔뜩 식혀놓은 찬 공기가 반갑다. 자리에 앉아 찬란히 빛나는 나뭇잎을 바라본다. 살랑살랑 스쳐 지나간다.
여름의 찬란한 햇빛이 차창을 가득 매우면 한 여름의 태국이 눈 앞에 그려진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뜨거운 공기. 몸을 다 태울듯 강렬하게 쏟아지는 태양.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땅의 열기가 그립다. 닦아내기 무섭게 맺히고 흘러내리는 땀이, 결국 축축하게 젖어 몸에 감기는 옷의 촉감도 그립다.
한 여름 낮의 투쟁 같은 시간을 버티고서야 찾아오는 저녁의 달큰함이 그립다. 은근하게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이 땀에 끈적해진 목덜미를 스쳐 지나갈 때는 안심과 아쉬움이 동시에 든다.
각자의 사투를 벌이고 돌아온 사람들이 자리에 늘어진다. 시원한 음료를 앞에 두고 그제야 웃어 보인다. 얼음이 담긴 잔에 맥주를 따라 거품이 가라앉기도 전에 목구멍에 부어 넣는다. 발버둥 쳐봤자 이길 리 없는 태양을 버틴 뒤의 보상이라 더욱 달콤하다.
맥주는 신비로운 힘을 발휘해 축 늘어졌던 몸에 몽글몽글 에너지를 끼얹는다. 다 같이 발간 얼굴이 되어 늦은 밤까지 웃고 떠들고 춤추고 뛰논다. 겨우 식힌 땀이 다시 송골송골 맺히고 결국 녹초가 되어 다들 각자의 호텔방으로 돌아간다.
몸에 휘감긴 옷을 다 벗어내고 흐르는 물에 모조리 씻어낸다. 땀과 모래와 먼지, 태양이 훑고 지나간 피부도 식히고 어루만져준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깨끗하고 폭신한 침대에 몸을 뉘인다. 온몸이 그제야 안심하듯 비명을 내지른다.
잠시 말똥말똥해진 눈으로 낮에 찍은 사진을 몇 장 훑는다. 눈이 부셔 수평선조차 맞추지 못하면서도 꾸역꾸역 세상을 작은 화면 안에 구겨 넣었다.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시간이 지나야 모습을 드러낸다. 쨍한 하늘 아래 벌건 얼굴로 웃고 있는 모습.
추억으로 미소가 몽글 올라오면, 어느덧 익숙한 도착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황급히 버스에서 내린다. 무더운 공기가 한숨 가득 들어온다. 숨이 턱 하니 막힌다. 고개를 들어 거리를 바라본다. 가로수도 차마 다 가리지 못한 햇볕이 온 세상에 가득하다. 잠시 머뭇거렸다고 어느덧 인중에 땀이 방울방울 맺힌다.
아찔하다. 한여름의 달콤함이란 이토록 우리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