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의 바다 앞에서
인생의 어느 부분을 잘라 필름 롤 위에 얹혀 놓아야 한다면 아마 대부분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일 것이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 혹은 가장 괴로웠던 순간.
행복했던 순간은 대개 지나고 나서야 그 찬란함을 깨닫는 반면, 괴로웠던 순간은ㅡ과거형으로 쓰는 것이 모순처럼 느껴질 만큼ㅡ매순간 우리 곁에서 생생히 숨을 쉬었다.
내게는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산을 오르는 것처럼 공기는 희박해지고 시간은 더디게 흐르던 때가 있었다. 죽을 것 같은 기분이기도 했는데 절대 죽진 않았고 죽고 싶어서인지 살고 싶어서인지 느릿느릿 허우적대던 시절이었다.
벽화마을을 걸으며 발에 물집이 잡히던 때와는 결이 다른 침잠이었다. 타인에 의해 감정과 의지가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을 나의 얄팍한 자존심이 인정하지 않았고 때문에 더 어리석게 길어진 고통이었다.
30년 정도 살고 보니 고통에 대응하는 방식은 나름의 노하우가 있었다. 20대가 그 생생한 감정에 푸욱 젖어 들어 묵직해지는 스펀지라면 30대는 깨진 렌즈 같았다. 감당 못할 정도로 슬프거나 당장 일상생활도 힘들 정도는 아니었으나, 어딘가 왜곡된 채로 살았다. 괴롭다는 건 알고 있었으므로 두 가지 선택지를 고민했다.
고통을 순식간에 끝내버리거나 언제 끝날 지 모르지만 일단 버텨보거나.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건 두 가지 방법 중 시간이 오래 걸리는 선택지를 뽑은 결과다. 어쨌든 살아 남아. 똥밭에 굴러도 삶이 아름답다고 한 어떤 작자의 말처럼 살아남은 결과. 삶과 죽음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논할 수 있을까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살았다.
괴로운 시간이 남기는 훈장도 종류가 여럿이겠지만 나는 트라우마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게 관심의 유무로 될 일이냐 싶겠지만 나는 선택의 일이라고 믿고 있다. 내가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 트라우마도 나를 쫓아오지 않을 것이다, 라는 믿음. 사실이 어떻거나 상관없다. 애초에 사실이라는 게 있긴 한가? 인생은 내가 바라보기로 선택한 것이 존재하는 곳이다.
시간은 상징적이고 그중 ‘1년’은 특히 더 그렇다. 나도 지옥의 발을 담그고 돌아온 1년을 갈무리하고 새로운 1년을 맞이할 만한 상징적인 무언가가 필요했다. 홀로 아주 짧은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거제까지는 버스로 5시간이 걸렸다. 나는 여행가 중에서도 버스나 기차, 비행기에서 보내는 이동시간까지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5시간이라는 거리는 이 좁은 나라에서 유난히 더 엄청난 숫자였지만 내게는 설렘으로 다가왔다.
내가 묵을 숙소는 거제 시내에서도 1시간가량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가조도 섬 끝자락에 있었다. 단단하고 정적인 공간이 주는 힘이 얼마나 큰 지 깨닫게 해주는 곳이기도 했다. 웰컴 푸드로 애플 시나몬티와 마카롱을 먹었다. 몸을 따스하고 뭉근하게 녹인 뒤에야 체크인 라운지에서 내내 바라보고 있던 나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서 내가 한 일이라고는 고작 바다를 보는 거였다. 침대 위 다락에 이불을 끌고 올라가 바다를 마주 보고 있는 창문을 열었다. 겨울바람까지 달래는 남해의 바다였다. 그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잔잔하고도 고요한 바다. 지치는 기색도 없이 잔물결을 일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그제야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나를 바라보는 것.
나를 미워하던 마음을 알아채고 놓아주는 것.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렇게 나를
용서하는 것.
하늘은 물감이 흩어지듯 파래졌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파도 소리는 점차 멀어지듯 작아졌다. 뺨에 차가운 공기가 닿았다.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와인 한 입에 회 한 점을 씹으며 <그랑 블루>를 보았다. 돌고래가 되어 떠나가는 남자를 보았다. 한 팔을 뻗어낸 거리도 보이지 않는 심해 깊은 곳으로 미련 없이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남자를.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질문을 삼킨 채 다시 창문을 열었다. 코앞의 바다도 보이지 않았다. 밤을 향해 팔을 뻗었다. 차가운 공기가 무겁게 손가락 사이를 누볐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파도 소리가 대답했다.
너는 지금 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