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
표지에 적힌 책 소개를 읽고 망설임없이 책을 구매했다. 불치병이라 알려진 조현병을 이겨낸 사람이 있다니. 이겨낸 것뿐 아니라 심리학자가 되어 자신이 조현병을 느낀 후부터 그것으로부터 해방된 때까지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다니. 작가(아른힐 레우벵; Arnhild Lauveng)는 10여 년간 조현병 환자였고 완치 후 오슬로대학교에서 심리학 석사 학위를 받아 지금은 임상심리학자 및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수많은 범죄가 '조현병으로 인한 심신미약'이라는 이유 아래 형량이 감형되는 것을 보며 병을 이용하는 범죄자에 대한 분노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병 자체의 심각성을, 그로 인해 환자가 고통 받을 것이란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만약 고칠 수 있는 병이라면, 정말 작가가 완치된 것이 맞다면 조현병은 더 이상 환자뿐 아니라 그 주변인들의 두려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감형의 이유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또한 자신을 포함한 누구도 해치고 싶지 않은, 그럴까봐 오히려 두려워하는 환자에게도 희망적인 메시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를 가지고 책을 열었다.
국가건강정보포털에 따르면 이전까지 정신분열병이라고 불리던 조현병은 '인격의 여러 측면에 걸쳐 광범위한 임상적 이상 증상을 일으키는 정신 질환'이라고 정의되는데, 작가는 이렇게 정의한다.
자신의 인격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은 감정과 감각적 인상,
지식이 내면에 들어와 있어
그중 일부는 외부의 무엇인가로 옮기는 것
여기서 ‘외부의 무엇인가’는 결국 자기 자신이다. 자기 안에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 자기 안에 넘치는 것들을 전도하는 것, 그것을 조현병이라 얘기한다.
작가는 어느 순간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서서히 병에 잠식되었다. 성적이 우수하던 그 소녀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림과 음악을 즐기며 자신의 미래를 계획했던 그 아이는 '어느 날부터' 오랫동안 산책을 했고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 날 찾아온 그것에는 이유가 없었다.
자주 상념에 빠지는 여느 청소년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새 그녀의 일기는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자신이 아닌 자신(선장)'의 목소리가 들렸으며,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여인과 늑대가 그녀에게만 선명하게 보였다. 14~15세에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고 17세에 입원했다. 이후 병에서 또 병원에서 자유하기까지 수 년이 걸렸다.
이 책을 통해 몇 가지를 배우고 느낀 바가 있다.
난 그동안 자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환청, 환시에 시달려 자신도 모르게 자해를 할 수는 있다지만 자신에게 물리적인 해를 가하면서 안도를 느끼는 그 심리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작가가 과거 자신이 스스로를 죽이려 손목에 칼을 대었던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너무 잘 이해되고 공감되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작가가 분석했던 자해의 이유는 이러했다.
첫째, 선장을 도무지 이길 수 없었다. 여기서 ‘선장’은 작가 내면 안에 넘치는 자기 경멸과 엄격함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 역할을 대행할 수 있게 스스로 만들어 낸 존재다. 그런데 이 선장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작가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가 밥을 먹지 말라면 그래야 했고 잠을 자지 말라면 따라야 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했냐면, 그녀는 병원에서 생활하는 동안 너무 공허했고 빈 속을 채워야 했는데 선장은 그녀의 식사시간을 지켜보았다. 차마 그의 눈을 피해 식사를 더 많이 할 수 없어 그가 알지 못하게 몰래 종이컵과 벽지를 뜯어 먹곤 했다. 이렇게 그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불안한 상태가 되었다. 결국 스스로를 해치라는 명령에 손목을 그음으로써 절대 권력에 순종했다는 안도감을 가졌다. 통제 불가능한 내적 고통이 자해라는 제어 가능한 외적 고통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둘째, 늘 무기력한 내가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선장의 말에 굴복하는 무능력한 존재지만 "손목을 그어 피를 뿌리지 않으면 가족 모두가 죽게 될거야."라는 그의 명령을 따르면 가족을 살릴 수 있었다. 명령을 어겼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가족이 살아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모험을 했다간 가족이 다 죽을 수도 있다. 명령에 불복종하여 소중한 사람을 잃을 바엔 자기 자신을 던져 가족을 지켜내는 것이 그녀에게 중요했던 것이다.
셋째, 살아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많았던 그녀는 스스로가 혈관에 귀리죽이 들어 있으면 어쩌나, 그저 로봇이면 어쩌나 등의 생각으로 괴로웠다. 그래서 혈관에 붉은 피가 존재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목을 제대로 그었다. 그렇게 두 눈으로 피를 확인하고 나서야 마침내 자신이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넷째, 타인의 관심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추하고 이해할 수 없는 욕망이라 생각했고 끝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다른 사람의 관심이 고팠던 것이다. 자주 죽고 싶었지만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이, 관심을 기울여 주는 귀가 필요했고 그러려면 자해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컵이든 화병이든 유리로 만들어진 어떤 것이라도 그녀 눈에 보이면 자해의 도구가 되었고 그녀가 회복될 때 동안, 그 얼마간은 병원 사람들이 그녀 곁을 지켜주었다.
그녀가 선장의 호통에 어쩔 수 없었든, 안도감을 느끼기 위해서든, 타인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든, 어떤 이유로든 자신을 해쳤을 때 주변에선 그 끔찍한 현장을 보아야 하고 수습해야 하며 그녀를 돌봐야 한다. 그녀 입장에선 누군가 시켰기에 한 행동이라도 그녀 주변에선 그 누구도 그녀의 자해를 원하지 않았고 이러한 사건이 계속 일어날수록 병원 입장에서는 골칫거리에 귀찮은 상황으로 여겨졌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고 (일부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선장의 부름에 그녀가 응답하지 않도록 귀를 막아주었다. 관심이나 치료가 필요한 때에 그것을 채워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그녀를 믿어주었던 사람은 가족, 특히 엄마다. 마지막으로 집에 가본 지 1년이 넘은 어느 날, 그녀는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몇 시간의 외출'을 받았다. 엄마와 언니는 막내가 집에 오는 날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다. 자고 갈 수도 없는데 그녀 방에 있는 물침대를 데워 놓을 정도로 딸의 귀가를 반겼다. 그런데 식탁에는 엄마가 물려받은 찻잔 세트가 올려져 있었다. 병원은 그녀가 자해를 할까봐 그녀의 병실에 어떤 물건도 넣어두지 않았고 이번 외출 때 집에 유리를 다 치워달라는 조언을 남겼다. 엄마는 병원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다. 엄마는 딸이 자해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엄마는 자신에게 소중한, 하지만 막내딸을 위협으로 몰고 갈 수도 있는 도구를 그녀 앞에 둔 것이다. 그것은 그 누가 뭐라 해도 예쁘고 소중한 것을 아낄 줄 아는 귀여운 막내딸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 딸은 엄마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그녀는 집에서, 병원에서 수없이 자해를 시도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자주 죽고 싶었던 자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주변인들의 도움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을 지키려는 주변 사람들의 노력에도 자해를 실행하면서 여러 번 실망시켰다. 그래서 그녀의 병력을 보고 편견을 가지는 사람도 많고 병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100번을 넘어진 그녀를 101번 믿어주는 사람들이 옆에 있었고 그녀는 결국 조현병을 이겼다.
이것을 보며 내가 느낀 것은, 노력하는 사람을 무한정 믿어주자, 가 아니다. 난 아직 그런 경지에 올라갈 수 없는 사람이고 허황된 적용으로 대충 감상을 마무리하고 싶지 않다. 다만 한 사람이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갔던 노력과 도전했던 용기를 인정하고 싶다. 그 과정이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이라면 말이다.
난 결과중심적인 사람이다. 얼마나 노력했든 원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과정에 쏟아부었던 에너지가 빛을 발하지 못한 것에 대해 괴로워하며 결국 이 실패의 원인은 의지의 부족이라는 비난을 쏘아 댄다. 실패의 주체가 나든 타인이든.
노력했던 순간을 인정해 주고 치켜 세워주면 또 노력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하지만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결과만으로 노력을 평가해 버리면 다음에는 무언가를 이루려 힘쓰는 것을 주저한다. 그러나 세상 일이 지금과 똑같이 돌아가리란 보장이 없다. 언젠가는 무엇엔가 도전하고 부딪혀야 하는데 그때마다 노력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다면 그 삶은 얼마나 고될까.
그런데 이 책에 나온 것과 같이 그녀 옆엔 여러 번 실망을 안겨줘도 병을 이길 수 있을거라 믿어주고 옆을 지켜줬던 엄마가, 언니가, 의료진이 있었다. 그녀가 불치병이라 알려진 조현병을 이길 수 있었던 원동력은 거듭된 실패에도 다시 일어나는 그녀를 믿어 준 사람들이다. 물론 작가도 말했지만 자신의 과정을 똑같이 겪는 사람은 없으며 모두가 이겨낼 거라 생각하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그럼에도 작가는 자신과 같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린다. 병을 이기고 싶고 노력해 보지만 수없이 무너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심리학자로서 환자의 상태만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음에도 자신의 치부가 될 수 있는 과거를 적나라하게 펼쳐놓음으로써 "당신 스스로를 포함하여 누군가를 해치고 싶은 욕구가 올라와도 그것을 이겨내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면 당신도 선장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병을 이기려는 의지가 약해서 선장에게 휘둘렸다고 폄하하기에는 그녀의 노력이 너무나 처절하고 안타깝다. 때때로 올라오는 우울감, 스트레스라는 감정 하나 제대로 떨쳐버리지 못해 아등바등대는 나에게 선장이라는 존재가 나를 휘두르면 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토록 엄격하고 자신을 위협하던 선장에게서 벗어나는 데에 성공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해서 '심리학자'를 꿈꿔왔던 소녀는, '심리학자를 꿈꾸는 것이 본인의 심리치료사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증상일 뿐'이라는 소견으로 어른들에게 꿈을 빼았겼던 그 소녀는 누구보다 강하고 단단한 어른으로 성장했고 그녀의 바람보다 더 대단한 심리학자가 되었다. '조현병'이라는 개념이 세상에 자리 잡은 지 100년이 넘었음에도 아직 의문스러운 것이 많다고 한다. 그만큼 맞서기 어려운 병임에는 확실하지만 아른힐과 같은 조현병을 이겨낸 산증인이 많아지길 바란다. 인간이 모든 것을 정복할 수는 없지만 존귀한 생명을 회색빛으로 물들게 만드는 마음의 병만큼은 흉터 없이 치유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