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생각이 있는 내게 지인들은 ‘첫째는 아들이니 둘째는 꼭 딸이길 바란다’고 덕담처럼 말했다. 하지만 나는 첫째도, 둘째도 아들인 상상만 해왔다.
그렇게 확고한 마음에 돌을 던진 이가 있었으니 다른 누구도 아닌 로디다. 그렇게 순했던 로디는 요즘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다. 사춘기 아들과 매일 실랑이 할 마흔 중반쯤 이 글을 본다면 ‘이때가 좋았지’라며 푸념하겠지만 엄마가 처음인 나에겐 지금의 로디가 버겁기도, 무섭기도 하다. 누가 내 아들을 무던하다 했던가. (내가 그랬네, 내가.) 마음을 살펴야 하는 딸보다는 몸으로 놀면 되는 아들이 키우기가 편할 거라 생각했다. 그 무던함을 믿고 섬세하게 다루지 못한 엄마라 후폭풍을 겪고 있는 것일까.
어린이집에 갈 때 옷 입기를 거부해서 결국 잠옷 바람으로 간 적이 있다. 그날 원장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로디에게 심리 상담을 받아보게 하는 것 어떻겠냐고.
사실 이전에도 이런 말씀을 하신 적 있어 상담센터를 알아봤는데 전문가의 간단한 소견으로는 크게 문제되어 보이지 않고 아직 어려서 판단이 어렵다고 했다. 그때를 계기로 나도, 남편도, 외할머니도 로디를 긍정적으로 충분히 받아줬(다고 생각하)고 그 뒤로 로디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집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어린이집 선생님 말로는 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고 했다. 아이를 물고 때리던 모습은 없어졌으니 괜찮은 줄 알았는데 불편한 상황에서 친구를 큰 동작으로 거부한다거나 무서운 소리를 내는 등의 모습은 잦아들지 않았나보다.
내 아들에게 전문가 상담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말. 2년 가까이 로디를 보신 원장선생님께서 아이 부모라면 누구나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건네셨을 때는 고민의 시간이 길었을 테다. 복잡한 마음이 역력한 목소리로 전화를 이어가던 내게 원장님이 말씀하셨다. 로디에게 발달 문제로 보이는 행동은 전혀 없다고. 다만 15%에 속하는 예민한 성향의 아이들을 양육할 때는 60%에 속하는 순한 기질의 아이를 양육하는 것과는 달라야 하기에 로디의 기질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무엇인지 알아두면 엄마, 아빠도 양육하는 것이 편해지지 않겠냐고. 그리하여 로디의 생일이 지나고 난 후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니 교회 영아부 전도사님이 생각났다. 이전에도 어린이집에서 로디의 심리 상담을 권유하셨을 때 아동 심리 쪽을 공부하신 걸로 알고 있는 전도사님께 조언을 구한 적 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간 로디의 행동과 마음을 꾸준히 살펴오셨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전도사님이 떠올라 이와 같은 상황을 이야기하고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치료가 진행될 경우 어떤 상담센터가 좋을지, 그렇다면 아이에게는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에 대해.
그런데 전도사님과의 대화는 조금 전 어린이집 원장님과의 대화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예민’하다고 들었던 로디의 기질은 ‘섬세’한 기질로 표현되었고 ‘과하게’ 보이는 행동들은 몸이 커서 ‘크게’ 보일 수 있다고 설명되었다. 원장선생님은 아이가 나중에 단체생활에서 힘들어할 수 있고 엄마인 내가 아침마다 로디와 실랑이를 하느라 힘들어 보이니 걱정과 염려를 담아 말씀하셨다면, 전도사님은 섬세한 아이일수록 외부 자극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니 그 불안이 내려가도록 부모가 충분히 믿어주고, 들어주고, 허용해주면 다시 괜찮아질 것이라는 희망과 안심을 담아 말씀하셨다. 누구도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냉탕에 던져져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뜨끈한 온탕에서 안정됐던 경험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테다.
두 분과의 대화로 로디는 기질적으로 섬세 혹은 예민하기에 불안이 많은 아이고 요즘의 과한 행동과 부정적인 표현들을 보면 지금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음을 알았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다. 로디를 아는 다른 어른들의 입을 통해 우리의 짐작이 사실임을 확인받았을 뿐이다. 이제 부모인 우리는 로디가 안정되도록 도와줘야 한다. 예측할 수 없이 침습하는 불안을 다루는 방법을 천천히 알려줘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랐을 때 눈물이 터졌다. 로디 걱정이 아니라 내가 걱정되어서. 평화롭다가도 아무 근거 없이 속을 헤집고 다니는 불안이 나를 괴롭힐 때 이 불안을 어디서부터 달래야 할지 모르는 엄마가 나를 꼭 닮은 이 아이의 불안을 어떻게 해결해줄 수 있을까 싶어서.
로디의 스트레스 요인을 예측해보면 얼마 전 내가 운전 미숙으로 가족이 타고 있던 차를 사고 냈고 그 다음 날부터 로디 아빠는 출장이라 장기간 집을 비운 상황이다. 이 사건들은 충분히 로디의 마음에 불안을 키우는 불씨가 됐다.
그런데 그 불안은 로디에게만 타오르지 않는다. 사고 후 나는 패닉에 빠져 남편에게 몇 날 며칠을 울면서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말했고 남편은 깊이 위로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운전 중 침착함을 잃어버린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고 다시 운전대를 잡아 이 불안을 극복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다. 남편의 위로가 소용없음이 아니다. 그마저 없었다면 난 로디 앞에서 웃을 수 없었을 테다.
사고와 별개로 남편의 부재 또한 결혼 후 지속됐던 꾸준한 불안 요소다. 이직 후에는 장기간 집을 떠나는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금요일 밤늦게라도 집에 오도록 하겠다던 남편의 다짐은 오늘도 실현되지 못했다. 남편 잘못이 아님을 알지만 그 이유가 불안을 누그러뜨릴 순 없다.
내 정신을 무너뜨리려는 불안은 항상 어둠에 숨어서 날 보고 있다. 나와 마주칠 때를 고대하며 숨죽이고 기다린다. 마침내 내 눈이 불안의 눈을 찾았을 때, 남들이 볼 땐 내가 의지적으로 찾은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피하고 싶었고 그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끌린 듯 바라 본 그 눈이 과연 불안의 것인지 확인하려 눈을 게슴츠레 뜰 때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보이는 건 동굴과 같은 그 입 속. 날 삼키려 달려드는 그 빛나는 눈을 이기는 날이 과연 올까.
난 섬세하고 예민하다. 위장약을 달고 살며, 수많은 만약에 대비하기 위한 프로세스를 구상하는 것이 습관이다. 그럼에도 삶은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기에 내가 그린 만약에도 없었던 변수를 맞닥뜨릴 때면 심장이 빠르게 뛰고 위가 조여 온다. 30년 넘게 살면서 수없이 찾아 온 변수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각종 신체 반응이 나타나도 무시하고 침착하게 행동하려 노력한다. 그런데 변수와 불안을 다뤄본 적 없는 네 살 아이가 된다면. 나도 발악하며 날 무너뜨릴 변수라는 위험에서 도망치려 할 테다. 머리감을 때 눈에 물이 튈까 두려워 뛰어나가려던 그제의 로디처럼.
사랑하는 로디에게.
“아들은 몸이 힘들어서 그렇지, 무던하니까 키우기 편한데?”
너의 섬세함을 알아차리지 못한 엄마는
너가 말하지 못하는 때에
너에 대한 잘못된 말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
어느 날
22개월이 조금 넘은 로디가
몇 개월 전에나 들었던 단어를
불쑥 기억하고 말하는 장면을 보고
엄마는 그간 외할머니와 나누었던
너의 앞담화를 내내 후회하고 미안해했어.
넌 다 듣고 있었을 테지.
엄마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얼마나 사랑하고 귀여워하며
동시에 얼마나 힘들어하고 이해하지 못했는지.
로디 앞에서 그냥
울어버리고, 한숨 쉬고,
화난 표정을 지어버리던 엄마를 보며
넌 계속 불안했을까?
걱정과 염려를 담은 포장지가
사랑으로만 칠해져야 하는데
억압과 분노가 섞였던 적이 있었을 거야, 분명.
엄마도 더 배워야 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삶에서
그 뒤틀어진 뜻을 받아들이고
일상을 평온하게 유지하는 방법을.
엄마가 이제 알았어.
엄마 안에서 올라오는 이 불안을 원망하면서
‘나는 왜 이런 사람일까’를 계속 되뇌는 것이
널 이해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로디가 스스로를 이해하고 불안을 통제하면서
그 섬세함을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방법을 배우려면
엄마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함을 이제야 알았어.
이제 진짜
로디와 엄마가 함께 크는 순간이 펼쳐질 거야.
그 엄마에 그 아들.
그 말이 너에게 욕되지 않게 노력해보려고.
다시, 잘해보자.
* 표지 사진 출처 | Unsplash @ Helena Lop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