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쓰고 싶지 않았던 글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 잊으려 했는데 잊을만하면 아이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계속 각인되는 통에 그냥 대면하기로 했다.
3개월 전. 블로그에 ‘실패했던 영역에 다시 뛰어들 때 가져야 할 마인드’라는 거창한 주제로 글을 썼다. 개인적으로 대표적인 실패 영역은 운전. 글을 쓸 당시 운전할 생각도 없었는데 이런 글을 적었더랬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로디에게 건강 문제가 찾아온 후 내 안에 운전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움텄다. 블로그에 글을 적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마음일까 싶지만 사실 몇 년간 마음 한 편에는 운전의 필요성이 자리했다. 그렇지만 두려워서, 아이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미뤄왔는데 이를 극복하고 싶은 마음이 무심코 글로 튀어나왔고 이 글은 며칠 후 나의 사지를 움직였다.
7월 중순. 연수를 받고 8월 한 달간 종종 차를 몰고 나갔다. 아이와 남편을 데리고. 사실 다치더라도 혼자 다치는 게 낫다고 생각했고 혼자 운전해야 빨리 늘 것 같아 ‘혼(자)운(전)’을 시도하려 했으나 아직은 위험하다는 가족들의 의견에 남편을 조수석에 태우고 운전하며 감을 익혔다.
9월 첫 날. 이날도 지난 한 달동안 그랬던 것처럼 경건하게 운전대를 잡았다. 이제 곧 혼운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아, 운전에 자신감이 생겼다는 뜻은 아니다. 주말마다 운전을 해도 무서움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이 두려움은 오랫동안 지녀야 할 감정이라 생각했고 매번 극복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전 같으면 이 정도 두려움이 올라오면 무조건 회피했다. 내가 운전만 안 해도 사고로 인해 생길 인적, 금전적 피해를 피할 수 있으니. 그러나 살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고 그런 일을 맞닥뜨릴 때마다 괴로움으로 소모되는 정신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극복하고 이뤄내고 싶었고 그 첫 단추를 운전으로 선택한 것이다. 마침 아이가 자주 아팠고 남편이 자꾸 출장을 가니 엄마로서 운전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도 한몫했다.
이 날은 매일 조수석에 탔던 남편을 뒷좌석으로 보냈다. 얼마 전 택시 조수석에 타고 있던 분이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기사를 접한 후 남편이 다칠까 두려웠다. 동시에 혼운을 시작하기 전 남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작은 모험이었다.
공터 주차장. 운전자석에 앉았다. 짧게 받치는 숨을 심호흡으로 길게 늘어뜨리고, 벨트를 매고, 브레이크를 밟아 시동을 켜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좌우를 살폈고 차가 없었다. 천천히 출구로 나가는데 갑자기 대형 버스가 들어왔다.
초보는 시야가 좁다. 숙련자에게는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인식되는 것들이 초보에게는 갑작스러운 방해물로 여겨진다. 이제껏 운전하면서 버스를 단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다. 평소 같으면 마주 오는 차는 내 왼쪽 편으로 들어오는 것이 맞을 터인데 버스는 좌회전을 하며 내 앞으로 비스듬히 들어왔다. 차 크기에 압도되어, 내가 예상하던 길과 다른 행보를 보이는 버스에 당황하여 나는 어디로든 비키고 싶었다.
이것이 잘못된 판단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끝날 상황을 피해야 겠다는 행동으로 옮겨 엑셀을 밟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처박았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우리 차가 많이 다쳤다. 현재 차는 수리되었고, 내 과실로 보험이 처리되어 이제 지난 사고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쓸 거리가 없어졌다. 물리적으로는.
남은 건 이전에 실패했던 일을 극복하기 위해 큰 용기를 내고 다시 도전했지만 또 실패했다는 경험이다. 그것도 꽤 크게. 가벼운 접촉사고는 아니었다.
10년 장롱면허였다. 처음 운전을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기껏 시간과 돈을 들여 면허를 딴 이상 어떻게든 운전을 해보려 했다. 처음에는 운전 실력이 점점 늘 것을 상상하며 나홀로 드라이브도 꿈꾼다. 두려움보단 설렘이 가득하다. 그런데 여러 번의 도전이 실패로, 불안으로, 공포로 끝을 맺으면 설렘은 사라지고 스스로를 향한 부정적 평가가 주홍글씨로 남는다. 내게 성취감을 줬던 자랑스러운 면허증은 신분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카드 조각으로, 또 좌절감으로 남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운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이 나를 운전에서 멀어지게 만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스스로를 보호하는 면역 체계에 장애가 생겨 자신의 조직을 공격하는 '자가 면역 질환'과 같이 자기효능감에 장애가 생겨 자아를 보호하는 능력이 떨어져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무의식은 내가 더 아프지 않도록 아픈 기억을 주는 것으로부터 떨어뜨리려 했다. 사고 기억을 잊도록, 운전을 생각하지 않도록.
그런데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떻게 끌어올린 용기인데. 백번 잘못한 그 때의 실수에 메이지 않고 제대로 극복하고 싶다.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 다른 것에 도전할 용기마저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무너진 자신감을 살리기 위한 영상과 글을 찾아보던 중 예전에 운동할 때 도움을 받았던 '다노티비' 영상이 나왔다. 다노 대표님은 건강한 신체 뿐 아니라 건강한 정신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에도 힘을 쓰는 듯했다.
영상에서 대표님은 '사업 중 겪었던 실패'와 '운동을 계속 포기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영상으로 나는 지금 나의 상태와 실패를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는 힌트를 얻었다.
반복된 실패 경험은 나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되어 머릿속에 인이 박힌다. '나는 이러다 말거야.', '이게 언제까지 갈까.', '예전에도 작심삼일이었지.' 예를 들어 운동은 참 건강하고 바른 생활의 아이지만 이 아이를 만날 때마다 나의 체력, 정신력, 의지가 얼마나 바닥인지 끊임없이 일깨워주기 때문에 자주 만나기 불편하다.
‘아유... 하기 싫어... 운동 즐기면서 하는 방법 없을까❓ㅣ다노티비’
위 이야기에 등장하는 운동이 나에게는 운전이다. 운전을 할 때마다 '나는 왜 빠르게 판단하지 못하는지', '피해주기를 누구보다 싫어하는 사람인데 왜 도로에선 진상이 되는 것인지' 등 자괴감이 든다. 그러다 결국 언젠가는 일어날 수 있다고 상상했던, 하지만 지금 당장은 내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겼던 사고를 맞닥뜨렸다.
하지만 사고로 얼룩진 실패를 이대로 종결낸다면 나는 운전 뿐 아니라 꼭 극복해야 할 다른 영역에서도 힘을 낼 수 없을 것 같다. 아이에게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은데, 아이가 넘어지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힘을 주고 싶은데 내가 무너질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이전에 블로그에 적었던 글, ‘실패했던 영역에 다시 뛰어들 때 가져야 할 마인드’의 결론을 다시 꺼내본다.
개인적으로 전혀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하는 것보다 언젠가 배웠던 일, 하지만 실력이 늘지 않아 지금은 손을 뗀 일을 다시 하는 것이 더 어렵다. 여러 번의 실패가 축적되어 자신감이 떨어졌기 때문일 테다. 수영, 운전, 영어회화. 이 모두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 아니라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했던 일이다. 이 버킷리스트들은 해내고 싶으면서도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다. 어쭙잖게 아는 영역을 정복하는 것이 더 어려운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나는 이 영역을 단 한 번도 배워본 적도, 접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라고. 한 번도 실패해본 적 없는 영역이라고. 머리와 몸을 백지장으로 여기는 것이다.
운동을 해야 하지만 두세 번의 무리한 운동 후 요가매트는 다시 창고행이었다. 그래서 마인드 세팅이 필요했다. '나는 지금 재활 중이다. 내 몸은 운동을 전혀 하지 않은 몸이며 감정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비정상임을 인정하고 몸을 이완시키는 스트레칭을 비웃지 말고 성심성의껏 따라해야 한다.’ 그러니 5분 스트레칭이 10분으로, 15분으로 늘어났다. 매일 발전할 필요는 없다. 난 운동선수가 아니니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1~2분 스트레칭을 한다. 그래도 어쨌든 운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
'실패했던 영역에 다시 뛰어들 때 가져야 할 마인드' | 본인 블로그
이전의 글을 읽고 나니 다시 자신이 생겼다. 나는 운동은 못하지만 하루 1분 스트레칭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2분도 안 된다. 일주일동안 딱 1분만 하루도 빠짐없이 스트레칭을 하는 나는 1분도 운동하지 않았던 때보다 훨씬 유연해질 것이다. 몸도, 마음도 다시 유연해지리라. 이것이 성취다. 이 성취는 나를 다시 운전석에 앉힐 것이다.
사실 내게 가장 필요한 건 자신을 믿지 못하는 마음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실패의 기억을 지우는 노력은 성취 경험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1분 스트레칭과 같이 아주 작은 것이라도.
시작이 반이라는 말. 틀리지 않았다.
과거의 글이 지금의 나를 위로하는 것처럼 지금 이 글이 언젠가 또 허우적대는 나를 잡아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