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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숨 Oct 19. 2020

안녕하세요. 저는 온라인 마케터입니,까?

오피스 다이어리 1


난 병원 기획실에서 일하고 있다. 어떤 일을 하냐고? 글쎄. 신입 때는 나를 소개할 때 온라인 마케터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과 기획실에서 일하는 사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것 같다.






나는 어려서부터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 특히 촌철살인으로 사람을 홀리는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구직 사이트에서 편집자, 광고기획 등의 단어로 검색하여 마침내 편집디자인 회사에 카피라이터(인지 에디터인지)로 입사했다. 하지만 회사 사정으로 3개월 만에 퇴사 당하고 나는 다시 구직 활동을 시작했다. 광고기획 자리를 검색했는데 이것은 자연스레 온라인 마케팅 업무로 날 인도했고, 그렇게 입사한 곳이 현 직장이다.


회사에서 내게 준 업무는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일’이었고 나는 어떤 글이든 상관없이 그냥 내 글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바로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답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회사에서 날 뽑은 이유는 '블로그에 무지하여 검색 순위를 위해 뻔한 기술은 쓰지 않는 초짜'이기 때문이었다. 회사의 판단이 옳았는지 난 저품질 수준의 블로그를 1년 후 '일 방문 횟수' 2,000회까지 끌어 올렸다. 이때 네이버 로직은 < 성실 > 에 가치를 두었나 보다. 하지만 다른 말로, 1년간 아무 성과가 없었다. 블로그에 안과 지식만 정리하여 포스팅하는 일에 매력을 느끼지 못해 퇴사 욕구가 올라올 때 부장님은 내게 ‘방송원고를 작성해 보라’는, 당시 내게는 그것만큼 전문적이고 보람찬 것이 없던 직무를 허용해 주셨다. 물론 당시에는 이 업무가 방송 출연 원장님 스케줄까지 알아봐야 하는 불편한 일일 줄은 몰랐다. (원장님들은 보통 방송 출연을 꺼리기 때문에 라디오든 TV든 출연을 부탁드리는 일은 감정이 적잖이 소모된다.)


그렇게 어느덧 2년이 흘렀고 또 다시 직업에 대해 고찰하는 시기가 왔다. 쉽게 말해 매너리즘 이 찾아 왔다. ‘내 직업은 온라인 마케터가 아닐까’ 정도로 이해하고 일을 해 왔는데 ‘온라인 마케터의 직무는 어디까지 해당하는 걸까?’라고 생각해보니 적어도 ‘회사의 온라인 광고 집행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그런데 난 키워드 광고를 돌려본 적도, 예산을 설정해본 적도 없다. 그런 업무는 오롯이 부장님 몫이었다. 물론 3년차에게 광고 집행 권한이 주어질 리 만무하지만 나 또한 카피라이터로서 글만 쓰고 싶었을 뿐 광고의 다른 분야는 배우고 싶지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출처 unspalsh



이런 내가 어떻게 병원 온라인 마케팅(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업무를 5년간 할 수 있었을까? 그걸 살펴보기 전에 내가 매일 어떤 업무를 담당하는지 알아봐야 겠다. 나는 매일 두 개의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면서 이웃들과 댓글을 주고 받고, 매월 두 개의 방송 원고를 작성한다. 그리고 두 개의 SNS 채널 담당하고 있는데 이전처럼 '누구도 관심없는 정보성 카드뉴스'를 만들어 올리지는 않고, 대신 디자이너가 요즘 인기 있는 소재를 패러디하여 병원 관련 디자인물을 올리고 있다. 그래서 SNS 영역에서 내가 하는 일은 디자이너가 만든 이미지에 어울리는 글을 적는 정도다.


그런데 여기에 영상 업무가 추가된다. 나는 회사에서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인데 아무도 담당한 사람이 없을 때 내가 그 일을 함으로써 이 자리를 지켜 왔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일 중 대표적인 것이 영상 제작이다. 신방과를 졸업하면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헬과제'를 체험할 수 있다. 그때 배운 스토리 기획과 프로그램 기술을 이용해서 이 병원에서 그간 볼 수 없었던, 하지만 있었으면 했던 영상 콘텐츠를 만들어 냈다. 영상 제작 일을 좋아하진 않지만, 사실 싫어하지만 나만의 무기라 생각하며 애증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정기적인 업로드를 못하고 있는 불량 유튜브채널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직원들 중에 관종기(?)가 충만한 사람이 없어서 한 명 한 명에게 사정하고 굽신거려 겨우 출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그나마 내가 이 병원에 오래 근속한 편이기에,  또 나보다 어린 직원들이 계속 들어오기에 가능한 일이지, 3년 차까지도 타 부서 직원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일은 내게 어려운 일이었다. 1년 차에 지금 나와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다 할 수 없는 이유다. 지금 내 수준에서 나이·경력이 발휘하는 힘은 타 부서에 조심스레 무언가를 요청할 수 있다는 것, 이 정도다.


업무 현황만 보면 참 일을 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희한하게 늘 해야 할 일이 있고 매일 쳐내고 있다, 라고 스스로를 변호해 본다. 우리 회사 기획실은 늘 고정된 일이 있고 그 외에 주 업무라고 하기는 뭣한, 하지만 매년 시즌별로 해낼 업무가 끼어 있다. 예를 들어 요맘때는 회사 달력 제작이 큰 업무였지만 갑자기 사보 제작 명령(?)이 떨어지면서 달력 제작은 하지 않기로 결정됐다.



출처 unspalsh



어찌됐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온라인 마케터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카피라이터를 꿈꾸고 광고 관련 직종에 발을 담갔지만 개인적으로 얼굴책도, 별그램도 하지 않고 보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남 일상에 큰 관심이 없고 내 일상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도 즐기지 않는다. 온라인 마케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트렌드에 밝고 주변 사람과 사건에 관심이 많은 것이 필수 요건 같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그런 내 성향을 알고 내 직무를 들여다보니 내 직업을 소개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혹시나 날 소개할 때가 오면 “안과 기획실에서 일해요.”라고 말하고 상대가 "거기서 무슨 일을 하세요?"라고 물어보면 “병원에서 관리하는 SNS 채널에 콘텐츠를 올리거나 매달 원장님들이 나가시는 방송 원고를 적구요. 원내 TV에 들어갈 영상도 만들고 해요. 아, 요즘은 유튜브 영상도 만들어요.”라고 주절주절 업무 항목을 읊는다. 설명이 많은 이유는 내 직업을 한 단어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잡다한 일을 하던 내가 퇴사하면 어떻게 될까?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1~2년 안에는 내가 백수의 삶을 살 것이라 예상한다. 내가 결정한 퇴사라면 아이를 가졌을 테고 그렇지 않은 퇴사라면 구조조정이 필요한 순간 가장 먼저 떠올릴 사람이 '온라인 홍보 사무직'인 나일 테니. 이후 내 후임이 필요하다면 SNS·블로그 관련 지식이 전무한 20대 초반 분을 뽑으면 되고, 영상은 기획·촬영·제작 모두 가능한 전문인 한 명만 뽑으면 된다. 방송원고? 내가 하기 전에 부장님이 하고 계셨으니 그대로 이어서 하시면 된다. 난 광고도, 영상 제작도 전문으로 배울 생각이 없기에 내가 퇴사한다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내가 수입이 필요해서 재입사를 희망해도 비전문인인 나를 회사가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므로 내 자리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 업무 관련 이야기를 이곳에 조금씩 써 보려 한다. 10~20대 때 그려 온 커리어우먼으로서의 내 자화상이 어떻게 충족 되고 깨졌는지 기록하다 보면, 다시는 경험할 수 없을지도 모를 직장인의 삶을 더, 잘 누려볼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난 아직 '회사'에서 '직함'을 가지고 나만의 '데스크'에서 '업무'를 하고 싶다.



출처 unspal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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