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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숨 Jan 15. 2021

한 회사에서 두 우물 파기


아무도 내 업무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열심히 일을 할까, 말까. 병원 기획실에서 마케팅 업무를 보고 있는 내게 그 누구도 "지난 주 블로그 몇 명 들어왔나?"라고 물어보지 않는다. 입사 초에는 보고서를 냈지만 어느 날부터 나보고 알아서 하라시길래 내 업무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 서운함이 안도감으로 바뀌는 순간 눈치보지 않고 아주 편하게 회사 생활을 했다. 적어도 입사 시 내게 주어진 업무 내에서는. (= 누구도 책임이 없는 일, 즉 잡무는 종종 기획실이 담당하기에 마냥 편하지는 않다. 남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도 관심없는 내 업무 기록


그런데 성취감이 삶의 원동력이 되는 나에게는 이토록 편한 업무 환경이, 달리 말하자면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업무를 하는 매일이 권태로웠다. 나도 일다운 일을 하고 싶었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 힘들고 싶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업무로 충분히 피곤하다. 내가 생각하는 일다운 일은 재미있는 일, 보람 있는 일, 성장이 보이는 일이다. 전문성을 띤 일, 일을 하면 그 전과는 다르다는 티가 나는 그런 일 말이다. 그래서 자기 계발을 하는 동시에 업무 효율도 늘릴 수 있는 방법을 고심했다. 또 누가 알까. 자기 계발을 하다가 다른 문이 열릴지도. 한 회사에서 두 우물을 파보기로 했다.




생각해 낸 두 우물 중 하나는 '웹진 만들기'였고 다른 하나는 '영상 제작'이었다. 웹진 제작은 원장님들이 방송에 사용하신 원고, 블로그에 썼던 포스팅, 직원 인터뷰 등을 시안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이것은 글보다 웹디자인, 편집디자인 영역이므로 디자이너가 아닌 내가 만든 작업물이 실제 제작되어 홈페이지에, 병원에 배치될리 만무했다. 하지만 블로그 콘텐츠를 만든다는 핑계 아래 책(혹은 웹진)을 만들고 싶은 개인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보았다. 만약 부장님이 "그건 네 일 아니니 뻘짓하지 말고 하던 일이나 신경 써라"라고 말씀하셨다면 단번에 접어야 했겠지만 다행히 내 업무에서 마음껏 놀아볼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그것이 내 일에 대한 무관심이었대도 상관 없을 만큼 신나게 만들었다.


영상 업무는 원내 TV에 올라가는 환자 인터뷰나 방송을 편집하는 일, 그리고 병원 계정 유튜브에 업로드되는 영상을 제작하는 일이다. 송년회, 전체회의 때 사용되는 영상을 만들기도 한다. 영상의 스토리를 짜는 기획부터 편집까지 모두 내 계획대로 진행된다. 영상 작업을 좋아하지 않지만 한번 욕심이 생기면 마음에 흡족해질 때까지 놓을 수 없는 마성의 힘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영상 작업을 할 때 굉장한 집중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출근과 퇴근의 간격을 좁히고 싶다면 영상만큼 좋은 업무가 없다. 또 이렇게 회사 업무로 영상 작업을 하면서 늘어난 스킬과 지식은 개인적인 여행 영상 제작에도 활용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나는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자기 계발도 꾀하고자 카드뉴스, 랜딩페이지 같은 시안도 만들어 보고 때때로 맡겨지는 영상 업무에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업무들은 나 혼자 힘으로 지속하기 어렵다. 디자인의 'ㄷ'자도 모르는 내가 작업물을 만들어봤자 뭐 얼마나 완성도를 갖출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한다 해도 기껏해야 이미지 사이트에서 구매한 이미지 몇 개를 나열하는 수준일 뿐이다. 공식 홈페이지나 팜플렛으로 만들어질 수 없고 블로그, SNS에 게재될 뿐이다.


그렇다면 영상 작업은? 지금 우리 회사 사정상 정기적인 유튜브 업로드가 불가능하다. 타병원에서는 진행자를 따로 두고 꾸준히 콘텐츠를 개발하는 경우가 많으나 우리 병원에는 콘텐츠 진행자를 자처하는 의사나 직원이 없다. 그렇다고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시킬 수 없고 특히나 내 위치에서는 조심스레 부탁하는 것도 쉽지 않다. 우리 부서 부장님이 각 부서장들에게 부탁하여 직원 한 명 한 명 힘들게 섭외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버텨왔다. 자기 업무만 해도 바쁜데 얼굴, 이름 팔리면서까지 추가로 일하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전임할 수 없다면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진행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여러 콘텐츠를 만들어본 결과 영상 하나를 만들 때마다 직원들을 설득하면서 하루 에너지를 모두 빼앗기고 결과물이 업로드되면 참여해 준 직원의 반응을 눈치보게 된다. 물론 대표님이라면 본인 회사 홍보를 위해 꾸준히 참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대표님에게는 그 역할을 기대할 수 없다. 몇 개월 유튜브를 운영한 후 깨달은 것은 정기적인 유튜브 업로드가 가능하려면 적어도 1인 크리에이터 혹은 콘텐츠 시나리오 작가와 편집자, 그리고 꾸준히 참여할 수 있는 직원이 있어야 한다. 그 직원이 의사라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우리는 불가능한 걸로.




나에게 디자인이나 영상 업무는 본업 사이에 잠깐 지루함을 깨어주는 일이지,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사실 내가 전문가도 아니니 결과물에 대한 기대가 적고 잘하면 칭찬해 주지만 못해도 그만이다. 그래서 부담없이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던 것이고 그럴 수 있도록 회사에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회사가 나에게 '뻘짓'을 허용한 이유는 디자이너가 블로그 콘텐츠를 하나 하나 만들어 주기에는 본인 업무로 이미 바빴고 영상 전문가를 따로 뽑기에는 지출이 컸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회사에서 다른 분야로 우물을 파 본 결과, 경험은 남았지만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회사는  취미를 위한 놀이터가 아니다. 받은 만큼 결과물을 토해내야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곳이다. 결국 내가 보람있는 회사 생활을 지속하려면 나에게 맡겨진 본업에 성취감이 있어야 하고 그 일은 좋든 싫든 블로그를 키우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입사 첫 해 이후 아마 처음으로) 본래 내 업무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싶어졌다. 내게 주어진 업무 분야 안에서 새로운 우물을 파보는 것이다. -


- 라고 글을 슬슬 마무리하려 했는데 거짓말 같이 사건이 일어났다! 대표님의 아이디로 메인 블로그 외에 서브 블로그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비서님이 대표님의 지시로 아이디를 삭제해 버렸다. 그 아이디로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다행히 메인 블로그가 아니라 서브 블로그가 삭제되었지만 어쨌든 약 1년 6개월의 기록이 사라졌다. 내가 쓴 글을 본 것 마냥 누가 봐도 진심 말도 안 되는 타이밍에 이런 사건을 일으켜 버린 비서님. ㅂㄷㅂㄷ



그래서 어쩔 수 없이 1년 전에 죽은 다른 아이디의 블로그를 소생시켜야 한다. 고마워요, 비서님. 내 글의 마무리를 스펙타클하게 맺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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