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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숨 Dec 27. 2020

현실이 되면 안 되는 상상

그럼 너무 무섭잖아

주말부부가 된 지 일주일이 흘렀다. 큰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된 남편은 토요일 저녁에 집에 오고 일요일 저녁에 떠난다. 그런 일주일을 겨우 한 번 거쳤을 뿐인데 앞으로 그 3배의 시간을 이렇게 보내야 하다니. 아득했다. 그래도 성탄절에는 쉴 수 있으니 이브에는 집에 오겠다는 말에 대발 나온 입이 조금 들어갔다.


드디어 크리스마스 이브다. 얼마만에 같이 저녁을 먹는 건지! 무얼 먹어야 만족스러울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런. 저녁을 먹고 들어온단다. 내심 슬펐지만 어쩔 수 없지. 우리에겐 내일이 있으니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 마스크를 벗고, 손을 씻고, 씻어서 말린 재활용품을 한데 모으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바로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다. 이 행동들 사이에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고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핸드폰을 선반에 올려두고 유튜브를 켜 놓은 채 샤워를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쾅!


놀란 눈으로 문을 쳐다보았다. 현관문이 세게 닫힐 때 생긴 여파가 방문을 흔드는 것과 같은 종류의 울림이었다. 그 울림이 심장을 타고 내 귀에 다다를 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아까와 똑같이 놀란 눈으로 화면을 쳐다보았다. 남편이다.



밥 먹고 나와서 이제 출발해용.


네.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안 좋네.


오늘 외근 다녀와서 좀 힘드네.


아, 그랬지. 금방 갈게용. 조금만 기다려요.




분명 피곤했다. 하지만 내 통화 텐션이 무너질 때는 피곤할 때보다 통제할 수 없는 감정에 눌렸을 때가 훨씬 많다. 당황스러울 때, 짜증날 때, 화가 날 때, 그리고 긴장을 넘어선 두려움에 휩싸일 때. 사실 이 두려움은 방금 들었던 문 소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아니, 맞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그날 새벽부터 상상해 온 집 안의 어떤 존재 때문이다.




남편이 없는 동안 집에 혼자 있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책도 읽고, 집안일도 하고, 오랜 숙원 사업이었던 '신혼여행 영상 작업'도 마쳤다. 하지만 잠에 들 때만큼은 긴장이 몰려왔다. 방문을 타고 들어오는 시계 초침 소리,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거슬렸다. 침실 안에 있는 화장실 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지 못해 꼭 닫았다. 침대 옆 작은 등을 켜두어 내가 무서운 상상을 하지 못하게 어둠을 차단했다. 그것도 모자라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팟캐스트를 켜두었다. 이같은 습관은 잠들기 전 패턴으로 자리 잡아 갔다.


이브 새벽도 그랬다. 남편이 없는 동안 늘 그랬던 것처럼 잠시 잠에서 깼고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잠들려고 하는데 남편 자리의 매트리스가 위쪽에서 아래쪽까지 슬그머니 무거워짐을 느꼈다. 잠든 내가 깰까봐 남편이 조심스레 침대로 들어오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벽쪽을 보고 자는 습관 때문에 남편 자리를 등 뒤에 두고 자는 나는, 잠결에 엄마가 침대로 들어오나 생각했다. 혼자 있을 내가 걱정되어 부모님이 전날 우리 집에서 주무셨기 때문인데, 하지만 하룻밤만 주무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셨다. 몽롱한 잠결이 또렷한 의식으로 바뀌어가는 동안 이 집에는 나 혼자 있다는 사실 또한 선명히 인지되었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무거움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단어가 되어 마음에 떠올랐다.



아직 난 꿈 속이라고, 잠결이라고 되뇌이며 뻣뻣이 굳은 몸을 조금씩 돌렸다. 힘겹게 180도를 돌아 남편의 베개를 마주한 순간, 무슨 망상을 하고 있냐며 날 혼낸 후 유튜브로 혼난 마음을 달랬다. 그렇게 3시간을 날려버리고 피곤하게 출근했는데, 그날따라 상사님은 꿈에서 섬뜩한 저승사자를 보았다 하고 동료님은 문 틈으로 흰색 옷자락이 지나간 것을 보았는데 남편은 샤워 중이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오늘 나한테 왜 그러는건지 당최 알 길이 없었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저녁까지만 참으면 남편을 볼 수 있으니.


그런데 잠긴 욕실 문이 굉음을 내고 흔들린 일은 매트리스가 무거워지는 느낌과는 달리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보이지 않는 문 너머의 상황에 온 감각을 동원했다. 샤워기를 끄고, 샤워볼을 내려놓고, 유튜브를 중지한 채로. 그런데 갑자기 신발장에서 집 안으로 들어오는 한 사람을 느꼈다. 방금 남편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분명 남편을 불러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 오려면 한 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 희박하지만 부모님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연락도 없이 이렇게 은밀하게 찾아오실 리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엄마, 아빠가 밖에 있어주길 바랐다.


부질없는 희망이다. 내가 느낀 그가 정말 실재한다면 그 또한 욕실 안에서 씻고 있는 사람, 바로 나의 기척을 느꼈음이 틀림없다. 누가 보아도 유리한 쪽은 욕실 밖에 있는 그 사람이다. 손잡이 옆에 달린 잠금장치가 한없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고작 이 작대기 하나가 날 보호해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전의를 상실했다.



이 모든 건 내 망상이라는 결론을 내고 (50%의 확신이었지만)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남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 상태로 욕실 문을 열고 소리를 죽여 침실 문까지 달려가 재빠르게 닫았다. 그리고 누군가 거실에 숨어 우리의 대화를 들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남편에게 속삭였다. 사실 아까 욕실 문이 쾅 소리를 냈다고. 물론 집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겠지만 현관문이 세게 닫히지 않고서야 그런 소리가 왜 나겠나 싶어서, 그냥 무서워서 전화한 거라고. 오빠가 집에 도착하려면 한 시간은 더 남았는데 도저히 침실 밖을 나갈 수가 없다고. 그렇게 남편에게 내 불안함을 설명하면서 잠긴 침실 문을 팔로 밀어냈다. 조용히. 하지만 누구도 열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세게. 그러다 지치면 발로, 등으로 자세를 바꿔가며 문을 밀었다.


그런데 문에 귀를 갖다 대고 있을 그가 느껴진 순간 그냥 멀어지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통화는 침묵과 의미 없는 말로 계속 연결되었고 정말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인터폰에서 남편 차가 들어왔다는 알람을 들을 수 있었다. 긴장을 조금 늦추고 조용히 스킨과 크림을 꺼내어 입술만큼 바짝 마른 얼굴에 수분을 공급했다. 그리고 늦춘 긴장을 다시 끌어모아 욕실 안으로 발 한쪽을 걸친 채 침실 문을 응시했다. 언제든 욕실 안으로 도망갈 수 있게. 그 무력한 잠금장치라도 내겐 필요했다.


남편은 이제 엘리베이터를 탄다고 했고 나는 조심히 들어오라 일렀다. 어떻게 조심하면 되냐고 묻길래 현관문을 토퍼로 걸어둔 채 방 구석구석을 확인하라고 답했다. 그가 무기를 들고 있을지도 모르니 피할 수 있게 문을 꼭 열어두라 일렀거늘 현관은 열리자마자 쾅 닫혔다. (에휴.) 방을 들어갔다 나오는 소리가 들렸고 침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남편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고 그제서야 난 잠긴 문을 조심히 열었다. 안타까운 건지 걱정되는 건지 가만히 날 보는 남편을 향해 환히 웃어보였다.




남편이 운전해서 집으로 달려오는 한 시간 동안 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트리에 불을 켜둘 수 있었고, 저녁을 미리 먹을 수 있었고, 남편을 위해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에 쪽지라도 넣어둘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한 시간 동안 침실 밖으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한 나는 머리도 말리지 못한 채 문을 힘껏 밀고 있었다. 그 알량한 몸뚱이로 뭘 막아 보겠다고. 그러고 있느라 힘이 다 빠져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중 남편이 먼저 선물을 발견했다. 그래도 반응이 궁금하여 얼굴을 삐쭉 내밀어 보았는데 기대한 만큼 좋아하지는 않았다. 왜 기뻐하지 않느냐며 추궁했더니 이 와중에 선물이 중요하냐고 되묻는다. 그럼. 안 기뻐할 이유는 또 뭔가. 나만큼이나 불안한 마음으로 달려와 지친 건 알겠지만 그래도 선물을 봤으면 오와! 하며 기뻐해야 할 거 아니니. 잉? 잉????




어쨌든 내 상상이 만들어 낸 인물 혹은 그 어떤 것 때문에 쌩쇼를 벌이느라 하루종일 축적된 피로는 놀랍게도 옆에 자고 있는 남편의 숨소리에 한순간 날아가 버렸다. 그만큼 상상은 가벼운 존재였다. 아니면 남편의 숨소리가 그만큼 큰 존재일지도.


+


다음 날(성탄절) 샤워를 할 때 또 욕실 문이 쾅 소리를 내었는데 그때 남편은 서재에 있었다. 아마 윗집 욕실 문이 닫히면서 낸 진동이 밑에까지 내려온 게 아닐까 한다.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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