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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숨 Jan 06. 2021

새해라고 새출발이 당연한 건 아닙니다

벌써 세 번째다. 21.01(2021년 1월)을 20.01로 써버린 것이. 날짜 쓰는 것부터 적응해야 하는 새해가 왔다. 1월 1일 0시가 지나자마자 친오빠에게 아이스크림 가게 로고를 네 개나 받음으로써 내 나이를 확인했다. 그래, 나 이제 서른 하나지.


ㅡㅡ^


전날 늦게 잔 탓에 1월 1일 새해에 10시까지 늦잠을 잤다. 밥을 대충 먹고 다시 침대로 들어갔는데 이후의 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중간 중간 새해맞이 카톡에 답을 한 것이 전부인 것 같다. 그리고 1월 2일. 여전히 9시까지 늦잠을 자고 침대에서 꼼짝 않다가 엄마 전화를 받고 나서야 점심시간임을 깨닫고 엉기적엉기적 부엌으로 나왔다. 밥을 우걱우걱 씹던 중 만 하루동안 무시하고 제쳐 둔 생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이 새해를 맞은 인간의 모습으로 적합한가


애먼 시간은 잘 보내지만 마음 편히 쉬지는 못하는 성격이다. 새해가 밝았는데 그 어느 때보다 게을러 터진 나를 보니 얼마나 꼴보기 싫고 밉던지. 안 그래도 입맛이 없었는데 밥알이 서걱거렸다. 새해 첫 날을 썩혀 버렸다는 생각에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당장 몸을 쓰는 유익한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청소가 떠올랐다.


얼른 몸을 일으켜 설거지를 하고 침구 청소기로 매트리스와 이불의 먼지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곧바로 유선 청소기를 집어 들었다. 평소에는 매일 로봇청소기를 돌리기 때문에 무거운 청소기를 끌고 다닐 일이 없다. 하지만 하루하고도 반나절동안 축적된 게으름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여야 했다. 집이 크지 않아 구석구석 청소기를 밀어도 30분 정도면 충분했다. 그 후 침구·로봇·유선청소기와 건조기에 쌓인 먼지를 종량제봉투에 쏟아 붓고 먼지 통을 씻어 창가에 널어 두었다.


그 다음, 걸레에 물을 먹이고 힘껏 짠 후 밀대에 끼우고 바닥을 닦았다. 걸레가 밀리지 않아 밀대가 명치를 자꾸 찔렀는데 그럴수록 팔에 힘을 더했다. 청소에 운동을 더하는 효율적인 인간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강해진 팔 근육을 이용하여 거실장, 선반 유리문, 침대 선반에 쌓인 먼지까지 말끔히 닦았다.

청소의 마무리는 역시 욕실이다. 바닥과 벽, 변기에 찌든 물때를 솔로 문질러 광을 냈다. 얼마 전부터 하수구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길래 세면대와 하수구에 클리너를 뿌렸다.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는데 2시간 후 물로 흘려보내면 광고와 같이 배수관이 반짝반짝해진다. 확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믿는다.


그렇게 청소를 하니 2시간이 흘렀다. 침대에서 유튜브, 영화로 대여섯 시간을 보냈을 때는 찝찝하기만 하더니 단 2시간 몸을 움직였을 뿐인데 그 뿌듯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이 정도 고생했으면 커피 한 잔할 자격은 되겠지’ 라며 잘만 타 마시던 아메리카노에 굳이 의미를 부여했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카페' 한 모금을 마시니 잘 정돈된 거실이 더욱 낭만적으로 보였다. 그 힘으로 빨래를 개키며 오늘 마지막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데 불현듯 어떤 생각이 스쳤고 좀 전의 뿌듯함을 아주 잘게 부스러 뜨렸다.


이게 뭐라고


2시간 청소한 것. 이게 뭐라고 나는 스스로를 뿌듯해하고 남편에게 칭찬을 바라고 있었던 걸까. 얼마나 청소를 안 했으면, 얼마나 몸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으면 이것으로 새해의 시작을 보람있게 보냈다고 말하려 했던 걸까. 생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새해를 맞은 인간의 모습으로 적합한가.  




생각 1.

새해라면 당연히 자연스럽게 새 마음, 새 소망이 떠오르고 힘차게 출발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카운트다운에 이어 새해가 시작되었고 7시간 후 그날의 태양이 떴지만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 오히려 침대에 늘어져 시간을 땅에 버리고 있었다. 청소 한 번 했다고 뿌듯해 하고 있는 모습이 가히 꼴값이다. 시작부터 이러면 앞으로도 자신이 없다. 나의 2021년은 이미 글렀다.


기억의 지속. 살바도르 달리. 1931 _ 침대에서의 내 모습이 마치 그림 속 시계와 같았다


생각 2.

하지만 오늘이 어제와 같을 수는 없다. 매일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데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내일은, 다음 주에는, 다음 달에는 지금과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1월 1일이 어제와 동일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하여 혹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앞으로의 1년도 그와 같을 것이라 섣부르게 재단하면 안 된다.




빨래를 개는 동안 모순된 이 두 가지 생각이 치열하게 싸웠다. - 참고로 집안일을 할 때는 이런 잡생각이 능률을 높이는데 노동요 말고 노동념(念) 덕분에 빨랫감을 신속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 아무튼 두 가지 생각이 싸우고 있으니 일단 하나의 손을 들어줘야 한다. 그에 따라 현재 내 기분이, 당장 내일이 달라질 것이니 신중해야 했다. 전자의 손을 들어주면 내 1년은 이미 망한 것이다. 기분이 영 좋지 않네. 아무래도 후자를 선택해야 겠다. 그에 따르면 내일을, 아니 당장 지금을 잘 살아내면 지금보다 나은 1년을 만들 수 있는 것 아닌가! 첫 단추를 잘못 꿰었으면 옷을 찢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단추를 풀고 다시 채우면 된다.


타지에 있는 남편과 통화하면서 이렇게 정리한 생각을 털어놓았다. 돌아온 대답은 "그냥 하루 푹 쉬는 게 어때서?", 그 말투로 읽힌 생각은 'ㅇ_ㅇ'. 언젠가 남편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새벽이는 스트레스를 만들어 내는  같아." 그 누.구.도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데 혼자 생각을 부풀리고 전개하여 스트레스를 제조하는 습성을 꼬집는 것이다. 인정한다. 생각이란 것이 이미 구축된 회로대로 흘러가기 마련이라 쉽게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회로 엉뚱하게 새해 소망이 하나 생겼다.


스트레스를 줄이는 생각 회로 만들기

시작이 실망스럽다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믿음 버리기


그것만 성공해도 평생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고 방식을 고친 역사적인 해가 될 것이다. 비록 새해 첫 주에는 실패했지만 아직 51주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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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 하던 중 세상 거창한 생각을 펴내다 급 마무리한

2020, 아니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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