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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숨 Jan 08. 2021

새해 첫 출근날 지갑을 도둑맞았다


모르는 사람이 내 지갑을 만진 건 길에서 지갑을 떨어뜨렸던, 그래서 어느 착한 분이 "저기요" 하고 지갑을 건넸던 단 한 순간을 빼고는 일절 없었다. 그런데 새해 첫 출근 날 아주 신선한 경험을 하였는데 드라마나 뉴스에서나 볼 법한 사건이었다.


지갑을 도둑맞았다.

아니, 정확히는 지갑 속 카드들을 빼앗겼다. 그것도 사무실 내 책상에서.




1월 2일 토요일이 2021년 첫 출근 날이었으나 대리님의 제안으로 쉬게 되었다. 그래서 여느 직장인들과 같이 1월 4일 월요일이 새해 첫 출근 날이 되었다. 3일이나 쉬었으니 비교적 가뿐하게 출근할 수 있었고, 개운한 마음으로 굿모닝 인사를 건넬 수 있었으며, 평소 힘들어하던 외근을 웬일로 순조롭게 마쳤다. 오후 1시가 되어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그렇게 1시 50분까지 꽉꽉 채워 휴식을 취한 후 사무실로 들어가는데 멀리 다른 부서 부장님이 보였다. "안녕하세요."하고 인사 드리며 지나가는데 부장님이 날 부르셨다.




"어, 새벽아."


"네?"


"아까 점심시간에 사무실에 어떤 아줌마가 들어와서 너네 책상에서 뭐 이것저것 만지고 있더라고."


"네? 누가요?"


"몰라. 내가 사무실 들어가니까 그러고 있길래 거기서 뭐하시냐고 물으니까 물 먹으러 들어왔다는 거라. 밖에 정수기 있는데 남의 사무실 들어와서 그러고 있는게 말이 안 되잖아. 그래서 내가 쳐다보니까 슬 나가더라고. 접수 직원한테 말은 해놨는데 혹시 모르니까 책상이나 소지품 한 번 살펴봐."


"헐. 무서워요... 네. 감사합니다!"




사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책상 위에 있던 우유가 사라진 거 아니냐며, 오늘 사온 우유인데 너무하다며 웃었을 뿐이었다. 우리 사무실로 들어가는 문은 직원 탈의실과 원장님 사무실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잠금장치가 없다. 업체 사람들도 많이 출입하고 간혹 환자들이 진료실 혹은 상담실로 착각하고 문을 여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낯선 사람이 사무실에 들어오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병원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쉽게 드나드는 곳이고 그 중 길에서 노숙하시는 분들도 많다. 병원 위치가 교통 요충지이자 도심인 터라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행색을 보고 사람을 구별하여 병원 출입을 막을 수는 없고 진료를 받지 않는 사람이라 하여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단 코로나 사태 이후 커피 머신 운영을 중단했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러 병원에 출근하는 무숙자들은 어느 정도 걸러진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CCTV가 도배되어 있는 병원에서 함부로 남의 사무실에 들어올만큼 간이 큰 사람은 드물다.


이런 많은 이유를 바탕으로 조금 전 들었던 부장님의 경고를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사무실로 들어와 양치를 하려 칫솔을 드는데 책상 위에 놓인 내 체크카드가 보였다. 카드를 집어들면서 이 상황을 해석하기 위해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는데, 짧은 시간 내에 도출해 낸 결과는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주머니에서 떨어뜨린 카드를 착한 직원이 주워다 줬다'였다. 하지만 이날 오전에는 외근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게다가 외근 중에는 법인카드만 썼기 때문에 내 카드를 꺼낸 적이 없다. 그때까지도 부장님의 "소지품 한 번 살펴봐."라는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의아해하며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어 열었는데,


?


동공이 이리저리 정처없이 굴렀고 머리는 팽팽 돌아가는데 그야말로 무뇌 상태인 듯 생각이 정지했다. 지갑이 너무 얇다. 그럴리가 없는데. 여기, 여기 빈 자리가 있으면 안 되는데?




"제 카드."


"응?"


"제 카ㄷ... 카드가 없어졌어요. 설마."


"어?"




옆에서 날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대리님을 피해 접수로 뛰어갔다.




"선생님. 아까 부장님이 이상한 아줌마가 사무실에 들어왔다고 하시던데 뭐 들으신 거 있으세요?"


"아, 네. 얘기하시긴 하셨는데... 왜요? 뭐 없어졌어요?"


"내 카드가 없어졌어요..."


"네?"




놀란 직원을 뒤로하고 다시 사무실로 뛰어갔다.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내가 다른 데서 잃어버려 놓고 병원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너무 창피한데. 접수에는 얘기하지 말걸 그랬나.


동네방네 떠벌리지 말고 정말 도둑맞은 것이 맞는지 다시 생각해보자는 마음과는 달리 손은 자연스럽게 행정 직원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머리와 행동이 따로 노는 것이 이런 거구나.




"계장님. 어디 계세요?"


"아, 저 밖입니다. 무슨 일 있어요?"


"저 아무래도 지갑 털린 것 같아요. CCTV 좀 확인했으면 하는데..."


"네? 아니, 무슨... 사무실에서요? 저 들어가려면 5분 정도 걸리는데..."


"아, 그래요? 네. 오시면 CCTV 좀 열어주세요. 그런데 지금 좀 봤으면 하는데..."




5분 뒤면 도착한다는 직원의 말을 들었으면서도 지금 당장 봤으면 좋겠다고 어필하는 나는 뭐였을까. 내가 지금 매우 급하니 빨리 좀 오시라 협박한 것이나 다름 없다. 사실 정신이 나간 것을 들키지 않으려 전화할 때 발음을 또박또박, 목소리를 분명하게 내려 애썼는데 누가 봐도 침착함을 잃어버린 상태임을 또박또박, 분명하게 알린 꼴이 되어 버렸다. 죄송해라.


그런데 행정 직원이 도착하기 전 우리 부서 부장님이 먼저 도착하셨다. 경황 없는 나 대신 대리님이 부장님께 상황을 설명 드렸고 부장님은 곧바로 CCTV 화면을 켜셨다. 그렇게 다급하게 찾던 증거물이 확보되려던 순간, 아직 카드를 정지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카드를 잃어버린 적이 없어서 어떻게 분실신고를 해야 하는지도 몰라 허둥지둥대다가 은행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카드 분실신고 대표번호'를 찾았다.




"안녕하십니까, 00은행 김**..."


"아, 네. 안녕하세요. 카드 분실신고를 하려고 하는데요."




신용카드라 빨리 정지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도 상담원 말을 자르고 용건부터 들이밀다니. 지금 생각해보니 죄송해야 할 분 투성이네. 그러나 이미 침착함을 잃은 지는 오래였다. 다행히 빠르게 분실신고를 진행해 주셨고 다른 은행은 모바일로 분실신고가 가능해서 어플로 진행했다.




"새벽이 가방 바로 뒤지네."


"와. 이 아줌마 미친 거 아니에요?"


"병원 구조를 다 알고 있는 것 같이 행동하네. 들어오자마자 가방에서 지갑 꺼내가 다다다 빼가노. CCTV가 이래 많은데."




분실신고를 하던 중 옆에서 들리는 대리님과 부장님의 대화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이 사건은 내 착각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소행임을, 그래서 내가 당황하여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모습이 민망한 상황이 아님을 확인받은 듯하여 내심 안심했다. 도둑이 아니라 내가 정신이 나간 걸까?


사무실에 들어오면 내 자리가 가장 먼저 보이니까 내 가방을 먼저 뒤질 수는 있다. 하지만 놀라운 건 내 앞자리, 옆자리 다 놔두고 곧바로 행정 직원 책상으로 가서 현금시재 봉투를 턴 것이다. 원래는 그 봉투 안에 틀림없이 현금이 있어야 하는데 착오였는지 그날만 예외였는지 다행히도 수납에서 내려온 그 봉투는 비어있는 상태였다. 우리 직원들도 현금시재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그 아줌마는 어떻게 나 다음 바로 행정 직원 책상을 털었을까? 우연이라도 소름끼친다.


내 지갑 속 카드가 도둑의 손아귀로 무력하게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벙찌게 보았다. 많이 해본 솜씨인지 매우 능숙하게 똑딱이를 열고 꽂혀 있던 카드들을 손목 스냅을 이용하여 낚아채었다. 그 다음 집어 든 파우치 지퍼도 기가 막히는 리듬감으로 열고 닫았다. 그 스냅과 리듬감으로 드럼을 치시지 그랬어요, 아줌마.


신고하자마자 달려 온 경찰은 나와 행정 직원에게서 경위서를 받아갔다. 찝찝하다고 소독약으로 책상과 지갑을 깨끗이 닦아버린 탓에 내 물건에서는 지문 감식이 어려웠지만 시재 봉투에서는 가능할 것 같다며 경찰이 챙겨 갔다. 사실 그럴 것도 없었다. 경찰이 그 사람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하, 이 아줌마. 또 이러고 있노."


그날 늦은 저녁,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네. 00경찰서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여경이 아까 그 아줌마 몸수색을 다 했는데요. 나온 건 없었어요. 물어보니까 카드는 그냥 버렸다고 하더라구요. 분실신고는 하셨죠? 결제된 건 없으니까 안심하시구요. 정신이 조금 이상한 분이고 조만간 병원에 입원할 예정이라 불구속 조치 했습니다. 이해 부탁드릴게요."


"아고. 늦은 시간까지 고생 많으셨네요. 수고하세요."




경위서를 적을 때 처벌을 원하냐는 질문에 '아뇨'라고 답했다. 처벌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물건을 훔친 건 맞아서 처벌은 불가피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것이 아니더라도 돈이 빠져나가기 전 분실신고를 해서 금전적인 피해는 없었으니까. 확실히 정신이 이상한 사람은 맞았다. CCTV가 있는데도 마스크를 내려 얼굴을 공개하고 현금이 떡하니 있었는데 그것은 건들지 않고 카드만 빼갔다. 게다가 내가 제일 많이 사용하는 체크카드 하나는 왜인지 책상에 고스란히 남겨두어서 카드를 재발급 받기까지 생활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경찰 말에 따르면, 그 분은 정신과 약을 복용 중이며 곧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려 하는데 병원에서 코로나 검사 결과지를 받아 오라고 해서 이틀 전에 음성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훔친 물품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조사가 오래 걸린 모양이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교훈을 얻었다.


점심 먹으러 갈 때 지갑 챙겨 가기

가방을 캐비넷에 넣고 열쇠로 잠그기


지난 번 글에 '스트레스를 줄이는 생각 회로 만들기'와 '시작이 실망스럽다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믿음 버리기'를 지키겠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올해 초부터 앞으로 살아갈 방향과 규칙을 정하다니. 보람찬 한 해가 될 것 같다. 적어도 지킬 것이 많아져서 지루하진 않겠다 -


- 라고 마무리해 본다.


힝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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