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숨 Jan 21. 2021

죽긴 싫은데 살고 싶지도 않았던 날


분명 그런 날이 있었다. 살고 싶지 않았던 날. 그렇다고 죽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살기 싫은’이 ‘죽고 싶은’과 동의(同義)가 아니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2010년. 대학교에 들어가자 은둔자였던 고등학생 때와 달리 남들 앞에서 말할 기회가 많아졌고 마음에 맞는 친구들도 몇몇 만났다. 어둡던 얼굴에 점점 생기가 돌았다. 그런데 2012년 하반기부터 내가 이상해졌다. 특별히 큰일을 당한 건 아니었지만 고등학생 때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음울하고 음침했던 그때로. 원인 모를 대3병에 걸려 1년여간 심각하게 앓았다. 그러는 동안 내 얼굴엔 생기고 활력이고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응당 가질 만한 기운이 사라지고 있었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때는 수면 중일 때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그래서 무의식만이 누린 행복이 깨지면 비몽사몽한 의식의 틈을 비집고 이런 생각이 새어 나온다.


오늘 하루를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생각은 날마다 계속 되어 ‘오늘 학교에 가서 잘 지낼 수 있을까’, ‘점심은 잘 먹을 수 있을까’, ‘앞으로 한 시간은 버틸 수 있을까’로 좁혀졌다. 그러다 당장 앞으로의 1분을 잘 살아낼 자신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얼마 전 모 방송에서 정신과 의사가 나왔는데 우울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런 대답을 하였다.


흐리고 비오는 날씨가 우울감이라면
비가 하루종일 오는 날이 2주 연속 지속될 때
우울증이라고 볼 수 있다


대3병에 걸린 나는 자주 울고 싶었고, 동굴로 들어가고 싶었고, 거기서 오랫동안 나오고 싶지 않았다. 그 기분으로 수업도 들었고 친구와 수다도 떨었고 맛있는 것도 먹었다. 때때로 즐겁다고 생각했지만 그 기분이 몇 시간도 채 지속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들과 회의를 하는데 의견이 조율되지 않았고 그러다 큰소리가 오갔다. 큰 문제가 아니었고 금방 해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갈등 상황을 겪는 동안 갑자기 방이 나를 중심으로 빠르게 좁아졌다. 나를 단숨에 삼키려는 듯이. 아니, 내가 방을 빨아들이는 것 같기도 했다. 너무 놀라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잘 쉬어지지 않는 숨을 이어 붙이느라 애썼더니 땀이 삐질삐질 났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50년은 더 살아야 할텐데 앞으로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근처 정신과를 남몰래 알아보고 겨우 용기 내 찾아갔지만 이내 발길을 돌렸다. 어떤 분위기에서 어떤 치료가 이루어지는지, 또 비용은 어느 정도인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기에 겁이 났다. 무엇보다 내 진료 기록을 누군가 알게 될까 두려웠다. 그때 그 문을 들어섰다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살고 싶지 않은 날이 조금은 줄어들었을까.


unsplash


뒤늦은 사춘기에 정신이 없던 중 나는 2013년 9월에 집을 떠났다. 서울에 있는 모 단체에서 휴학생을 대상으로 5개월간 영상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미디어팀의 팀원을 모집 중이었다. 사실 한 달 전쯤 갑자기 서울로 발령난 아빠 때문에 안 그래도 집이 적적했는데 나까지 서울로 가겠다고 하니 엄마는 많이 당황했을 터였다. 그 큰 집에 시아버지랑 둘이서 살아야 했으니 마음이 얼마나 복잡했을까. 하지만 엄마는 내 결단에 두말 않고 필요한 재정과 함께 나를 보내 주었다. 표면상으로는 졸업 전 스펙을 쌓기 위해서였지만 엄마도 알았을 것이다. 내가 집에서 탈출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이곳을 벗어나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경험을 쌓으면서 내가 내면적으로 변화되길 기대했을 것이다. 그렇게 난 엄마를 내버려 두고 짐 싸들고 서울로 떠났다.


5개월로 예정된 나의 서울 생활은 본의 아니게 10개월로 연장되었다. 대3병은 완치 되었을까? 지금도 서울 생활을 떠올리면 가슴이 떨리고 행복할 만큼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어둠이 날 야금야금 파먹었던 시절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빛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다. 엄마의 외로움과 고독의 크기가 내 행복의 크기와 비례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당시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 엄마가 연락하기 전에는 죽어도 먼저 전화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살아가는 이 시간이 너무나 비현실적인, 그저 행복한 꿈이라서 지극히 현실이었던 우리 집이 생각나지 않았을 뿐이다. 내 세상은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행복한 꿈 속이었고 이 세상이 깨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서울 생활을 마치고 복학한 나를 보며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새벽이 너가 내 주변에서 외적으로, 내적으로 가장 크게 바뀐 사람이야”라고. 아직도 대3병의 정확한 병명을, 그 원인을 모르겠다. 다만 지금 생각해 보건대, 어쩔 수 없이 붙어 있어야 하는 집에서 사랑하지만 그 크기만큼 밉고 애잔한 가족과 함께 살았기 때문일 수 있다. 또는 어쩔 수 없이 출석해야 하는 학교에서 사랑하지만 불편하기도 했던 친구, 선후배들과 함께 섞여야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손에 꼽을, 기억나는 커다란 문제는 없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들이 모래알처럼 층층이 쌓여 무겁게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뭐, 다 날 위한 변호다. 냉정하게 얘기해 보자면 이제까지 너무 편하게, 평탄하게 살아와서 그때쯤, 남들 다 한번씩은 혼란스러워 하는 20대 중반으로 넘어가는 그때쯤 아무 이유 없이 고꾸라진 것일 수도 있다.


더 이상 행복할 이유가 없던 그때, 평소라면 절대 택하지 않았을 모험을 택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스스로를 던져 넣는 것. 거기서 난 집도, 학교도 떠올리지 않고 열심히 배우고 활동하면서 나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비록 그때 그린 미래와 지금의 모습 중 일치하는 구석은 없지만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지낸 10개월 덕분에 대3병은 어떤 약도, 상담도 없이 완치되었다. 감사하게도 난 스스로에게 가장 필요했던 약을 잘 처방했나 보다. 아니, 가장 필요했던 길로 잘 인도되었나 보다.


빛으로 나온 내가 다시 그 동굴에 들어가 눈과 귀를 막는 일은 없기를 간절히 바라 본다. 물론 살다 보면 나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기 위해 때때로 동굴을 이용할 수는 있겠지만 그곳이 지금보다 더 평안한 곳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난 우리 집을, 그 안의 모든 것을 사랑하며 그들과 이유없는 사랑을 주고 받으면서 안정을 누리고 있다. 그 사랑이 꺼지지 않는 한 내 빛도 꺼지지 않을 것이다.


난 빛이 가득한 우리 집에 오래도록 거주하고 싶다.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새해 첫 출근날 지갑을 도둑맞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