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이 나왔다.
남편과 나는 딸이든 아들이든 좋았다. 내 몸 상태에서 건강한 아이가 나온다는 것이 (아직 안 태어났지만), 손과 발이 열 개씩, 눈 두 개, 코 하나, 입도 하나인 아이가 나온다는 것이 기적같았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 부모님이 걱정하던 중에 아이가 찾아왔고, 마침내 아기집을 보았고, 건강한 심장소리를 들었으며, 나비모양으로 잘 형성되고 있는 뇌와 10개씩의 손발가락을 확인했다. 식단을 크게 신경쓰지도 않았고 게을리 먹고 자기만 한 나에게 병원에 갈 때마다 "아주 건강하네요."라는 말을 듣게 해 준 아이가 너무 고마웠다. 그게 다였다.
그런데 주변의 따스한 관심이 조금씩 따갑게 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성별이 주제가 될 때. 아들보다 딸이 키우기 쉽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마무리는 "딸이든 아들이든 다 감사하지."로 마무리되지만 그래도 딸이 좋단다. 하지만 내 반응은 글쎄, 였다. 난 평생 엄마의 딸로 살았다. 딸이 키우기 쉽다고? 날 키우기 쉬웠을까? 절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비행청소년이 아니었고 술 마시고 난동 부리는 그런 류의 딸은 아니었다. 하지만 학창시절, 집에서 좀처럼 속내를 보이지 않는 어두운 학생이었다. 내가 부모님한테 거의 매일 전화하고 웃으며 대화한 건 결혼 후 따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즉 2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의 엄마가 딸보다 아들 키우는 것이 더 쉬웠다고 이야기할 줄 알았다. 나 또한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나에게는 오빠가 있다. 나름 모범생에, 나와 같이 비행을 저지르거나 술 마시고 집에 들어온 적도 없고, 성인이 되어 10년 넘게 타지에서 혼자 살고 있지만 그간 걱정 끼치는 일 없이 곧게 성장했다. 나는 자라는 내내 "너네 오빠는 참 착해. 진짜 저런 애가 없다.", "니는 매사에 예민한데 오빠야는 성격이 좋잖아.", "너네 오빠야가 전화를 얼마나 자주 하는데! 저렇게 다정한 애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까탈스러울 때. 내가 걱정이 많을 때. 내가 서울에 살 때 엄마한테 연락 한 번 하지 않았을 때!
그런 엄마가 나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이렇게 말했다.
딸이었으면 좋겠다
의외였다. 나는 우리가 성별을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건강하게 태어나면 그만이라 했지만, 물론 엄마도 내 말에 동의했지만 그래도 바랄 수는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래, 소망하는 거야 얼마든지 가능하지. 하지만 만약 아들이라면 실망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되었다. 그리고 2차기형아검사와 함께 성별을 알 수 있는 결전의 날이 왔다.
"바라는 성별이 있어요?"
"저흰 다 괜찮아요."
"그러면 안 알려줘야지. 태어나면 보세요, 허허허. 그럼 한 번 볼까?"
그렇게 아이의 성별을 알았다. 드디어 (남들의) 오랜 궁금증을 해소시켜 줄 수 있겠구나. 먼저 이 사실을 누구에게 알려야 하나 생각해보니 역시 엄마였다. 실망하진 않겠지. 그래도 기뻐하겠지. 정도의 생각만 가지고 전화했다.
"어, 새벽아."
"병원 다녀왔어."
"어, 뭐라던데! (기대 가득)"
"아들이래!"
"아이고, 아들이구나."
엄마는 크게 웃었다. 하지만 금세 웃음이 잦아들더니 이 말을 덧붙였다.
"아쉽지만 축하해!"
?
왜 아쉬워. 아들이 뭐가 어때서. 엄마의 아쉬움을 달래 보려 아들이 태어났을 때의 장점을 읊었다.
첫째가 아들이면 둘째가 딸이든 아들이든 어쨌든 든든한 형제가 되어줄 수 있다. 나또한 첫째가 아들이면 든든할 것 같다.
사실 딸은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경우가 많은데 내가 그 심리를 제때 이해하고 품어주지 못할 것 같다.
난 살면서 내 머리는 물론 남의 머리를 땋아본 적이 없고 예쁜 레이스가 달린 옷도 싫어했다. 하지만 딸이 보통의 여자 아이들과 같이 예쁜 것을 좋아한다면 난 그 욕구를 채워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내 한 마디 한 마디에 엄마는 다른 의견을 보였다. 그런데 그 모든 것보다 결국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네가 많이 외로울 거란 말이야
역시 본인 딸의 행복을 위해서, 앞날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물론 엄마 말대로 딸이 있으면 엄마랑 친구같이 지낼 수 있고 (그만큼 싸우겠지만) 딸이 어른이 되었을 때 엄마를 잘 챙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혼 전까지 부모님을 외롭게 했고 너무나 예민한 딸이었다. 내 딸이 나같다면. 내가 나같은 딸을 키워야 한다면.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남편 성품을 온전히 받은 딸이라면 모르겠지만 나를 많이 닮는다면... 하... 나를 겪고도 내가 딸을 가지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아, 그래서 우리 엄마가 외손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시다면.
월요일: "아이고, 잠잠이(태명)는 오늘도 엄마 뱃속에서 잘 놀고 있나?"
화요일: "저녁 잘 챙겨먹어. 잠잠이 배 안 곯게."
수요일: "내년 여름에는 옥상에 잠잠이 풀장 설치할거야."
목요일: "아빠랑 의논했는데 아파트로 이사 안 가기로 했어. 잠잠이가 뛰어다닐 곳은 필요하잖아."
금요일: "잠잠이는 이제 얼마나 컸으려나? 발차는 건 못 느껴? (아쉬움)"
오로지 잠잠, 잠잠, 잠잠!!! 잠잠이 생각 뿐이다. 자식의 자식은 그런 존재인가보다. 오늘도 잠잠이를 찾을 엄마에게 퇴근길에 전화 한 통 드려야 겠다.
뒷이야기
휘파람 프로도: 아빠
기뻐하는 프로도: 엄마
* 글의 주제 *
: ‘누구보다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기만을 기다리는 부모님과 저’입니다. ‘나는 딸보다 아들이 더 좋습니다’ 혹은 ‘엄마는 손녀를 더 좋아하십니다’가 아닙니다 :) 감사합니다!